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07: 천문학의 혁명 - 코페르니쿠스, 티코, 케플러

강형구 2016. 4. 15. 14:06

 

7: 천문학의 혁명 - 코페르니쿠스, 티코, 케플러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중 서문 및 1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 시대에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구의 회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가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 얼마만큼 확신을 갖고 있는지 묻는다면 우리들 중 대부분은 아마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지식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더라도, 일상적인 경우 우리는 지구가 정지해 있고’, 뜨고 지는 것은 지구가 아닌 태양과 달 및 별들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회전을 정확하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경험의 차원이 아니라 천문학이라는 전문화된 이론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른바 천문학의 혁명을 이끈 코페르니쿠스의 이 책 속에서 우리는 전문적인 천문학자로서의 코페르니쿠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결론이 천문학의 혁명을 이끌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문제 의식은 철저히 천문학에서 출발하며 천문학적 관측과 동반된 철학적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바치는 헌정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가 움직임의 질서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확실한 도식을 강조하며 기존의 천문학 이론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톨레미는 물리적 실재와 수리천문학 체계를 구분하며 천문학을 천체 현상을 예측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생각했다. 천문학에 대한 톨레미의 관점에서는 제기할 수 없는 수학적 단순성의 문제를 코페르니쿠스가 제기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의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코페르니쿠스는 가설이나 원인을 편의에 따라 고안해 내는 것이 천문학자의 일이며 이러한 가설들이 반드시 사실이거나 또는 사실에 근사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우주 체계의 실재성을 감추려고 한다. 천체 현상을 관측하고 계산하는 천문학자는 어쩔 수 없이 우주의 전체 구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하게 되는 것일까? 만약 능력있고 사려깊은 천문학자가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천문 체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의 구조와 합치하는지, 올바른 천문 체계가 가져야 할 보편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까? 그는 톨레미 뿐만 아니라 고대의 많은 저작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이전에 자신과 유사한 견해를 가졌던 작가들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필롤라우스 등이 지구는 원운동을 하며 또 하나의 행성일 뿐이다라고 생각했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에 어떤 단순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 지구에 비해 우주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며, 천체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 어마어마한 우주가 회전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지구가 회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직관이었다. 18절에서 그는 지구가 회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시 반론을 펼치는데, 이 때 그는 지구가 자연적인 회전을 하며 자연스러운 운동을 하는 것들은 적절한 상태에서 최적의 구성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구 위의 물체들은 지구와 함께 자연스러운 운동을 유지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전혀 불합리한 결과를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에 의하면 큰 규모의 우주가 회전할 경우 그 속도가 엄청날 것이며, 그에 따라 무한하게 외부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에 우주의 회전이 더욱 더 불합리하다.

 

   또한 코페르니쿠스가 중력에 대해 가졌던 견해도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중력이란 우주를 창조한 분의 신성한 섭리에 의해 우주의 일부분이 각각 떨어지지 않고 그 단일성과 전체성을 간직하며 구체로 모일 수 있도록 각 부분들에 부여된 어떤 자연적인 욕구이다. 그에 의하면 지구의 중심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따라서 우주에는 많은 중심이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을 경우 행성들의 역행 운동 및 수성과 금성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더 단순하게 기술할 수 있으므로, 실제로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조물주로부터 자연이 창조되었으며, 이 때의 창조는 자연스럽고 조화로우며 그 속에 섭리가 포함된어떤 것이다. 이는 그의 철학에서 기독교에서의 신 개념과 신플라톤주의의 수학적 조화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함을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가 보여주는 천문학자의 상()을 간단히 그려보자. 천문학자는 단순히 왕실에 소속되어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점성술을 수행하고 정확한 달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천문학자가 그런 역할을 일부 했을지도 모르지만, 천문학자는 그런 정치적 압력에 전적으로 종속적이지 않았다. 고대의 위대한 천문학자인 톨레미가 그랬던 것처럼, 천문학자는 천체의 현상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 사색하는 자연철학자이다. 천문학자들의 주요한 무기인 수학은 단순히 도구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플라톤이 주장했던 것처럼, 만물은 이데아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지고 운행되고 있으며,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는 수학의 언어를 갖고 만물을 운행한다. 수학은 자연의 합리성과 섭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무이하고 신성한 도구인 것이다.

 

   종교적인 신성함과 탐구자(혹은 철학자)의 지적 진지함이 결합함으로써 서양 과학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추동력의 역할을 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정념(pathos)은 비단 코페르니쿠스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로세테스테, 아퀴나스, 뷔리당, 오렘 등과 같은 인물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차별화된 정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아마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던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전능한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전능한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분명 신은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기 때문에, 임시방편적(ad hoc)이고 단순히 기술상의 편리를 위해 도입된 이론적 도구들은 자연의 조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정념을 가진 인물들이 우주론이 아니라 천문학에 자신의 지적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천문학은 우주론에 비해 사변적인 자연철학에 덜 의지하며, 우주의 수학적 구조를 더 세부적으로 탐구한다. 자연과 수학의 상호작용, 수학을 통해 자연을 해석하려는 움직임은 천문학에서 더욱 격렬하게 표현되고, 이는 결국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상을 변화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며 이는 순수한 자연철학적 논의에서는 이르지 못했던 결론이다.

 

(Kuhn), 코페르니쿠스 혁명4~6

 

   대체 왜 천문학 혁명이 일어났을까? 대체 왜 양자역학이 만들어졌을까? 더 나아가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왜 일어나며 그것의 본성은 무엇일까? 또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세계상은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것일까? 아마 이와 유사한 종류의 의문들이 쿤으로 하여금 근대 초기의 천문학 혁명과 20세기 초기의 양자역학의 혁명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쿤의 이 책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이전에 출판된 연구 결과로써, 천문학 혁명에 대한 이러한 선행 작업을 통해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의 나타나는 과학혁명의 많은 특징들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쿤은 고대의 천문학과 중세 중기 이후에 서양에서 부활한 고대의 천문학을 분명히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서양에서는 단순히 이전의 지식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이전의 지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부활된 지식 속에 투영시켰다. 실제로 고대의 과학은 다양하고 분산적이었지만, 중세의 학자들은 일관된 고대의 지혜(ancient wisdom)'가 있으며 논란이 되는 부분들은 다만 그러한 단일한 지혜 내적인 충돌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세의 학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내적인 충돌을 조화시키고 통합하는 것이었으며, 자연스럽게 고대보다 더 언어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전통이 등장하게 된다.

 

   더불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신학적 세계관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중세의 학자들이 이교도로부터 비롯된 철학을 받아들이는 주된 근거가 되었으며, 이후 자연에 대한 논의에 있어 그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단순히 지식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철학이 기독교의 세계관과 융합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적 작업이 필요했으며, 중세에 성행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가 아닌 기독교가 흡수하고 동화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였다. 따라서 이러한 중세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중세 기독교 문화 전체의 세계상과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이렇듯 중세에서의 고대의 지식이 중세 고유의 지식이었음을 보여준 이후,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준 주요한 요소들을 차례로 살펴본다.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스콜라 학자들이 수행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이다. 파리 유명론 학파의 오렘(Oresme)은 복수의 지구가 있을 경우 우주의 중심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의 중심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지구의 회전 여부는 논리적물리적성서적으로 반박될 수 없다며 이후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천문학자들의 논의에 있어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오렘의 스승이었던 뷔리당(Buridan)은 투사체 운동에 주목해서 임페투스(impetus) 이론을 제시했으며, 이는 14세기에 이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역학을 대체하게 되고 이후 코페르니쿠스 혁명 및 뉴턴의 제 1법칙을 수립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당시 사회가 보여주는 옛 시대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모습이다. 그리스어 원작이 재발견되기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아랍어와 라틴어를 통해 접한 고대 과학적 지식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진정한 고대의 지식은 불완전한 현재의 지식에 비해 앞서는 까닭에 지식의 수준은 시기에 따라 쇠퇴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리스어 원작이 재발견되면서 고대의 지식 또한 불완전하다는 것이 인식되었고, 신대륙의 발견 및 장거리 항해 등으로 인해서 많은 천문학적 자료들이 수집되면서, 천문학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전의 천문학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천문학자들은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이 보여준 개혁적 성향의 영향 및 새롭게 부활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플라톤주의에서의 가치 판단 기준(자연의 본성으로서의 수학적 단순성)을 토대로 톨레미의 천문학 체계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쿤이 생각하는 코페르니쿠스 저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이중적 성격에 있다. 그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혁명적인 문헌이 아니라 혁명을 준비하는(revolution-making)’ 문헌이며 이러한 문헌은 과학적 사유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헌은 과거적 전통의 정점에 이르는 동시에 미래 전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전문성이다. 지구 회전의 가능성을 생각한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여럿 있었지만 지구 회전에 기반한 종합적인 천문학 체계를 수학적으로 수립한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항성과 태양 운동을 톨레미 체계와 대등한 정도로 설명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행성 운동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는 적어도 그 질적 측면에 있어서 훨씬 더 단순했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힘은 단순히 사상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었던 천문학자들에게 결코 무시하지 못할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그 자체에는 이전까지의 전통과 이후의 발전이 섞여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천문학자들 특히 코페르니쿠스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톨레미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출발할 수 있었다. 이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핵심적이었던 신플라톤주의적가치 판단 기준을 더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이후 이 체계에서 문제가 되는 사항들을 점차적으로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간다.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경우는 평생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와 상당 부분 유사한 자신의 천문 체계를 개발함으로써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개념과 문제 의식을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브라헤의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 결과는 이후 천문학이 발전하는 데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다.

 

   코페르니쿠스의 후계자로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천문학자는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이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수학적 논변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체계 안에 남겨진 비혁신적인 부분을 수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질적인 측면에서는 이심원과 주전원을 도입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양적인 측면에서는 다수의 이심원과 주전원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케플러는 태양 중심설이라는 기본 교리와 브라헤의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 자료(화성)를 토대로, 타원 궤도의 법칙 및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을 도입하여 기존의 이심원과 주전원 및 등각속도점을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또한 행성운동에 관한 그의 세 번째 법칙(

)은 개별 행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성에 적용되는 최초의 보편 법칙이었으며, 이러한 보편적인 수학적 규칙성의 추구는 이후 뉴턴을 비롯한 근대의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비록 쿤이 케플러에 이어 갈릴레오를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갈릴레오의 업적은 천문학 내적인 것에 있다기보다는 천문학 외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그는 케플러만큼의 중요성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갈릴레오는 당시에 이미 개발되어 있던 망원경을 이용해서 천체를 관측함으로써 우주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바꾸는 데 실제적인 기여를 한다. 그는 망원경을 통해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금성의 위상 변화 또한 정확하게 관측했다. 또한 망원경이 대중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문학이 대중화되고,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 체계 자체에 친숙하게 되는 효과가 발생했다.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의 업적과 더불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점차적으로 기존의 우주관을 대체하게 된다.

 

   쿤이 6장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듯 천문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실질적으로 갈릴레오에서 종결된다. 왜냐하면 뉴턴 이후의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유지되고 정교화된 것이라기보다는 뉴턴 역학이라는 더 포괄적이고 거대한 세계상에 맞게 조정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뉴턴 혁명혹은 역학 혁명의 본성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후계자이자 완성자로서가 아니라 뉴턴 혁명의 예비자로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왜 갈릴레오는 뉴턴의 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만약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뉴턴의 역학 혁명에 영향을 주었고 더 나아가 역학 혁명안으로 포섭될 수 있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과학 혁명은 뉴턴의 역학 혁명이 아닐까? 쿤은 이렇듯 우리로 하여금 뉴턴 혁명의 근원과 본성에게로 주의를 기울이게끔 하면서 그의 6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웨스트만(Westman), 16세기에서의 천문학자의 역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문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자연 철학을 했으며 우주론을 펼쳤다. 비록 톨레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적 전제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톨레미는 철학자가 아닌 천문학자였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천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주론적 원리에 위배되는 기법(이심원, 주전원, 등각속도점)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6세기에 이르러 천문학자로서의 코페르니쿠스가 자연 철학적인(-플라톤주의적인) 이유를 토대로 톨레미의 천문학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천문 체계(태양중심론)가 우주의 실제 구조를 반영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대체 천문학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천문학자가 자연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를 언급하는 것일까? 이런 문제 의식을 중심으로 웨스트만은 당시의 천문학자가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역사적으로 분석해나간다.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을 쓴 오시안더에 의하면 천문학자는 자연 철학에 대해 언급할 능력이 없으며 그럴 권리도 없으며’, 이는 당시에도 서로 다른 학문 영역 사이에 엄연한 분리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분리를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의 합리성과 조화는 수학을 통해서 드러나며 천문학에서 주로 쓰이는 도구가 수학이기 때문에, 천문학이야말로 자연의 합리성과 조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학문이며 따라서 이는 인문학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 천문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지동설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옛 철학자들의 실례를 들기도 하고 자연 철학을 임시방편적으로 변형하는 등 엄연히 자연 철학자로서의 행세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대학에서의 천문학자의 지위는 어떤 것이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문학자가 철학의 영역으로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을까?

 

   중세 대학에서의 공식적 학위는 법학신학의학에만 주어졌으며, 천문학자로서 대학에 남아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과목 중 한 과목에 대한 상급 학위를 가져야 했다. 이에 따라 천문학자들은 의학자로서의 직위와 수학자(혹은 천문학자)로서의 직위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학과 천문학은 학문 그 자체로서는 독자적이었지만 대학에서는 독립적인 지위를 얻지 못하고 다른 학문들(의학과 신학)을 지원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 이후로 사회 지도층을 육성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대학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한 교육 개혁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게 된다. 인문주의자들은 수학의 가치와 실용성을 높이 평가하고 대학에서 수학의 지위를 높이려고 시도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점차적으로 대학에서 수학자 및 천문학자의 공식적 지위가 증가하고 독립성이 보장되는 등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당시의 왕실 인문주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왕실에서는 이른바 새로운 학문을 장려했고, 수학자와 천문학자들 중 일부가 왕실에 고용되어 왕실 고유의 의학자기계학자수학자 역할을 함으로써 강력한 정치경제적 후원을 얻게 된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티코 브라헤다. 그는 대학에 소속되어 교육의 기능만을 집중적으로 담당하는 수학 교수들을 조롱하는 반면, 수학의 유용성과 확실성을 강조하며 수학이 대학의 정식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실의 권력을 등에 업은 브라헤는, 천문학자가 이전까지의 부정확한 관측을 교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잘못된 자연 철학 또한 개혁할 수 있다며 천문학자의 지위를 철학자의 지위로까지 승격시킨다.

 

   교육 개혁가들의 노력도 수학자천문학자의 지위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교육 개혁가인 라뮈(Ramus)는 수학의 유용성을 강조하며 대학에서 수학자가 공식적인 지위를 차지해야 함을 주장했다. 영국 머튼 대학에 있던 새빌(Savile)은 언어학수학천문학 등 많은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고 정치가로서의 수완도 뛰어나, 그 또한 대학 사회에서의 수학과 천문학의 지위를 승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619년에 이르러 옥스퍼드 대학에 높은 전문성과 자율성을 갖춘 기하학 및 천문학 교수 직위를 만든다. 예수회에 속한 클라비우스(Clavius) 또한 수학 교수들이 공적인 토론의 장에 참석해야 하며, 수학 교수들은 수학 이외의 다른 업무 때문에 방해받지 않아야 하며, 철학 및 다른 과학에 있어서 수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수학자들의 지위를 높였다.

 

   이렇듯 천문학자들은 대학에서의 불안정한 지위와 학문 사이의 영역 구분을 뛰어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경쟁과 협상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학문 사이의 구분은 단순히 인식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기도 했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주장을 함으로써 다른 분야의 영역을 침범하고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기를 꺼려했다. 그런 까닭에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가 발표된 이후 많은 천문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수학 기법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의 체계가 실제의 우주 구조에 적용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학이 사회 지도층 육성을 위해 인문주의적 교육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대학에서의 수학의 위치가 증대되고, 당시에 등장했던 강력한 왕조에 후원을 받아 정치경제적 입지가 강화된 이후에야 비로소 천문학자들은 그 영역을 넘어 우주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블래어(Blair), 코페르니쿠스와 그 체계에 대한 티코 프라헤의 비판

 

   천문학 역사에서 브라헤는 독특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비판하고 지구 중심설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체계에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상당 부분을 수용했다. 그는 자신의 천문 체계를 입증하기 위해 상당히 정교한 천문학적 관측을 광범위하게 수행했지만, 이는 이후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원리(지동설)에 기반해서 행성의 타원 궤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따라서 브라헤는 과연 코페르니쿠스 주의자였는가 반-코페르니쿠스 주의자였는가?’라는 이분법적인 물음은 천문학자로서의 브라헤의 본질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데 있어 도움보다는 장애가 된다. 이에 저자인 블래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평생에 걸친 브라헤의 비판을 자세히 조명함으로써, 어떤 근거로 브라헤가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했으며 어떤 의미에서 브라헤의 업적과 영향이 독창적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브라헤는 수학적 체계를 토대로 물리적 구조에 대한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 코페르니쿠스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지동설의 가설 그 자체가 물리학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비판한다. 그는 톨레미 천문학에서 보여지는 불규칙한 원운동 및 불필요한 주전원의 도입에 대해서는 코페르니쿠스와 그 비판을 같이 하지만 지구가 회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지동설의 원리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우선적으로 드는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원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의하면 지구는 지상계에 속하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의 격렬한 운동을 감당할 수 없으며 오직 천체의 영역에서만 그런 운동이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브라헤의 체계에서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 반면 다른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한다.

 

   지동설을 비판함에 있어 브라헤가 사용했던 또 다른 두 가지 근거는 성서의 권위와 천문학적 관측 결과였다. 성서에서는 지구는 정지해 있고 태양이 그 주변을 회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브라헤는 지동설을 비판하기 위해 많은 천문학적 결과들을 활용한다. 만약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맞다면 항성까지의 거리 및 항성의 크기가 막대해지는데 이는 불합리하며,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따르면 항성의 광행차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관측 결과 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브라헤가 제시한 관측 결과가 항상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성의 시차가 작다는 것을 근거로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했지만 1580년에 이르러 자신의 체계를 지지하기 위해 그 비판을 철회했다. 그의 비판의 또 다른 근거 중 하나였던 혜성이 행성과는 달리 역행 운동을 일으키지 않다는 사실 또한 코페르니쿠스 체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계에 대한 비판에도 적용되는 근거였다.

 

   브라헤는 거대하고 정밀한 관측 기구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광범위하고 정밀하게 천체에 대한 관측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코페르니쿠스가 톨레미의 옛 관측 자료들을 쉽게 믿고 직접 노력을 투자해서 관측하지 않은 사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비록 브라헤가 자신의 체계를 옹호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억지스럽게 비판한 부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천문학자가 정확한 기구를 통해 천체를 더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관측하고, 그 결과를 통해 천문학 체계가 실제로 맞는지를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는 천문학에서의 새롭고 독창적인 기준을 창시했다. 이는 이후의 천문학에 강하게 영향을 미쳐, 브라헤 사후 그의 관측 결과를 얻은 케플러는 수학적 구조와 관측 결과의 엄격한 합치를 요구함으로써 행성의 타원 궤도를 밝혀내고 이후 천문학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초석을 놓는다.

 

자딘(Jardine), 근대적 실재론의 형성 : 회의론자에 대한 클라비우스와 케플러의 반박

 

   인간이 자연에 대해 고안한 이론적 체계는 자연 그 자체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단지 자연을 잘 예측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을 경우, 그 답의 표면적인 의미를 근거로 그 사람을 실재론자혹은 도구주의자라고 이분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 사람의 견해를 피상적인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딘은 과학사에 있어 케플러를 실재론자로, 우르서스를 도구주의자로 구분하는 기존의 뒤엠적 해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케플러가 그렇게 단순한 실재론자였을까? 또한 우르서스가 그렇게 단호한 도구주의자였을까?

 

   르네상스 시기에는 온건한 회의주의의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세계에 대한 진실을(혹은 세계의 형상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에까지 이르면 이는 건설적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지식이 그럴 듯함의 차원을 넘어서서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까지는 주장하지 않는 입장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온건한 회의주의이다. 이러한 입장은 어거스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멜랑크톤의 경우 진실과 믿음을 구분하면서도 보편적인 경험(불은 뜨겁다), 자명한 원리(2+2=4), 논리적 추론(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을 통해 얻어진 지식은 믿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오시안더와 우르서스의 경우에도 그들을 극단적인 도구주의자가 아닌 온건한 회의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것이 자딘의 생각이다. 이들의 입장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떤 복잡한 현상을 설명해야 할 경우, 물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에서부터 출발해서 순수하게 해석적인 과정을 거쳐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의 과학자들은 아무도 그렇게 작업하지 않는다. 그렇게 엄밀하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제한 조건들을 적용시켜가며 엄청난 양의 복잡한 계산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상황에 많게 다양한 임시방편적인 일반화와 모형을 사용해서 그 현상을 설명한다. 물론 과학자들은 이러한 일반화와 모형이 현상 그 자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이 단순히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 우리가 오시안더와 우르서스를 극단적 도구주의가 아닌 온건한 회의주의혹은 실용주의의 입장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면, 클라비우스와 케플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톨레미 혹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가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실재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클라비우스는 잘못된 전제로부터도 참인 결론이 도출될 수 있으므로, 톨레미의 주전원과 이심원이 천체 현상을 잘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클라비우스가 생각할 때 거짓인 전제로부터 참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삼단 논법톨레미의 주전원 및 이심원이 천체 현상을 잘 설명하는 것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톨레미 체계의 예측 능력이다.

 

   잘못된 전제로부터의 삼단 논법이 참인 결론을 우연히 이끌어냈을 수는 있지만, 이 전제를 통해서는 이후 더 많은 참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반면 톨레미의 주전원과 이심원은 현상을 잘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이후의 많은 천체 현상들에 대해 예측을 제공하고 그 예측이 잘 들어맞는다. 만약 주전원과 이심원이 단순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들은 천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천문학의 가설이 보여주는 성공적인 예측 능력은 이 가설에게 상당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 클라비우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변 만으로는 천문학 체계의 실재성을 충분히 보증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동일한 현상을 같은 정도로 설명하는 두 이론 체계(코페르니쿠스 체계와 톨레미의 체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쟁하는 두 이론 체계 중 어떤 것이 더 실재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케플러의 해법은 다음과 같다. 케플러에 의하면 두 천문학 체계가 동일한 현상에 대해 동일한 예측력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관측적 동등성) 그 두 체계가 역학적(kinetic)으로 동등한 것은 아니다. 톨레미의 체계에서는 태양(및 항성과 행성들)이 움직인다는 가설을, 코페르니쿠스에서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지만 이는 태양과 지구의 상대 운동(relative motion)’이라는 '천문학적 가설'을 기술하는 서로 다른 '기하학적 가설들'이다. 그리고 어떤 기하학적 가설이 더 옳은지는 관측 결과를 근거로 하는게 아니라 물리적 타당성을 근거로 평가할 수 있다. 톨레미의 체계의 경우 불규칙한 원운동, 이심원과 주전원 및 등각속도점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톨레미 체계의 기하학적 가설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경우 톨레미 체계에 비해 행성들의 운동을 더 단순하고 정합적으로 설명하므로 서로 경쟁하는 두 체계들 중 어떤 체계가 더 옳은 것인지를 분명히 결정할 수 있다.

 

   케플러가 두 천문학 체계의 공통 가설로 상대 운동(역학적 상대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흥미를 자아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회의주의자에 대응하는 케플러의 충분한 증거로부터의 논변이다. 이 논변에 의하면 서로 경쟁하는 두 체계가 있을 경우 그 체계 중 어떤 것이 더 합당한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케플러가 두 체계를 판단하는 데 있어 어떤 기준(criteria)이 적용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으며, 만약 그러한 기준이 있다면 그 기준이 어떤 의미에서 정당화되는지 또한 밝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옹호하게 된 근거들 중에는 단순한 물리적 타당성 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하학적 조화에 대한 그의 형이상학적 믿음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 체계 사이의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임을 감안할 때 이를 제시하지 못한 케플러를 비난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19세기 말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 5공준과는 다른 공준을 채택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했고, 따라서 물리적 공간이 유클리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은 과연 물리적 기하학이 어떤 기하학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에 프랑스의 수학자 푸앵카레의 경우 물리적 현상을 기술하는 데 있어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동등하며, 이들 중 어떤 기하학을 선택하는지는 단순히 규약편의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런 경쟁하는 기하학들 중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실제의 물리적 기하학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동일한 설명력을 갖는 복수의 체계들 중 어떤 이론 체계가 무슨 근거로(그것이 이론적이든 경험적이든) 더 타당성을 얻는지 밝혀내는 것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철학적 문제(특히 20세기의 실재론자 라이헨바흐가 고민했던).

 

프로이덴탈(Freudenthal), 길버트의 자석론에서 나타난 물질론과 우주론

 

   우주론(혹은 자연 철학)과 천문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우주에 대한 어떤 세계관을 갖는지에 따라서 우주의 구조를 기술하는 천문학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딘의 논문이 천문 체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등장 과정을 조망하는 것이었다면, 프로이덴탈의 논문은 그러한 새로운 천문 체계가 어떤 새로운 물질론과 우주론을 통해 지지될 수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실제로 케플러는 길버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티코 브라헤를 변론하는 책에서는 “..영국인 윌리엄 길버트가 자석을 연구하면서 코페르니쿠스를 옹호하려는 나의 논의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길버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물질론과 우주론을 창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길버트는 나침반 바늘과 자석이 회전 운동을 통해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근거로 하나의 커다란 자석인 지구가 일주 운동을 한다는 기본적인 공준을 세우고, 이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의 이론을 구축한다. 지구가 자석이라는 공준으로부터 지구의 자전축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면서 회전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길버트는 이러한 가설에 부합하는 새로운 물질론을 창시했는데, 그에 의하면 지구 내부에는 자성을 띤 '참 지구(true earth)'가 있으며, 지구와 지구에서 증발된 증기(exhalation)가 주형 과정(matrix)을 통해 결합해서 금속과 자석을 만들게 된다. 그에 따르면 철은 순수한 증기가 결합한 것이며, 증기가 오염된 결과로 기타의 광물들이 생성된다. 다양한 종류의 금속들을 설명하기 위해 길버트는 지구의 각 지역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금속이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길버트에게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의 우주론이다. 만약 지구의 일주 운동을 받아들인다면 중력 및 지구가 그 구성 성분들을 계속 결합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이에 길버트는 전기력과 자기력을 구분하고, 전기력은 모든 물체에 작용해서 물집을 응집시키는 작용을 하는 반면 자기력은 물질들을 배치하고 조직한다는 이론을 편다. 전기력은 물질의 마찰을 통해 생성되며, 이 때 생성된 증기가 갖는 끌어당기는 성질 때문에 중력이 발생한다.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지구 및 여러 천체들은 각자 고유한 중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지상계에 고유한 무거움의 개념이 없어짐) 지구와 다른 천체들의 구분이 사라지며, 중력은 물질적인 작용의 연장이므로 지구 위로 던져진 물체가 뒤로 물러날 필요도 없게 된다.

 

   길버트는 여러 이유에서 태양 중심설을 지지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일주 운동을 전제하는 그의 이론적 관점에서는 태양 중심설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또한 당시의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거대한 우주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그의 책 과학의 탄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케플러는 길버트의 영향을 받아 태양 또한 일종의 자석이며 태양이 행성들을 끌어당기것 또한 일종의 자기적인 힘으로 보았다. 이렇듯 길버트의 물질론과 우주론은 최초로 새로운 천문학에 걸맞는 물리 이론을 제시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과학 발전(요시타카의 표현을 빌리면 물리학적동역학적 우주론’)에 있어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제 근대의 과학자들은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톨레미의 천문학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새로운 우주론천문학역학 및 이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과 더불어 출발할 수 있던 근대인들은 이후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