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0: 실험과학의 등장 - 실험 철학, 실험실, 기구

강형구 2016. 4. 19. 05:54

 

11: 실험과학의 등장 : 실험 철학, 실험실, 기구

 

샤핀 & 섀퍼, 리바이어던과 공기 펌프 : 홉스, 보일, 실험적 삶중에서

 

   보일과 홉스는 과연 실험이 지식의 기초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보일의 새로운 실험은 체계적인 지식 이론을 수립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험을 하고, 가설을 세우고, 인과적으로 이론화하고 설명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었다. 그의 책에서는 탄성, 압력, 무게 등의 개념이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으며 사실과 설명 사이의 구분을 명료하게 하지 않고 있다. 또한 보일은 공기의 탄성과 압력이 사실인지 가설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암시적인 방식으로 실험적 철학과 그 외부의 경계를 그리려고 했다. 실험을 통해 생산된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 실험을 직접 확인하는 증인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실험을 통해 생산된 사실에 대한 증인을 증가시키는 또다른 중요한 방법은 출판이었다.

 

   독자로 하여금 가상적으로 실험 상황에 개입하게 해서 그 결과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기법(virtual witnessing)이 출판된 실험적 저서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실험을 직접 확인하거나 되풀이하는 것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가상적 확인이 실험에 대해 동의를 얻는 중요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보일 등 실험철학자들은 문헌을 통해서 실험을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가상적 확인에 있어 도상(image)이 매우 중요했고, 따라서 보일은 도상을 제작하는 데 굉장히 신경을 썼다. 도상은 실험의 전반적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신뢰감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 실험에 대한 기술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실험철학자들은 독자들이 실험에 참가하는 것과 동등한 효과를 느끼게끔 하려고 했다. 보일은 실험을 서술하는 문헌적 기법의 규칙들을 서술하는 데 노력했다. 정교한 문장,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 도상의 도움을 토대로 실험을 동시적이고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했다. 또한 실패한 실험에 대한 서술도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이를 통해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는 신참 실험가들의 불안을 완화시키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실험철학자들은 독자에게 저자가 믿을 만한 인물인지를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달리 말하면, 독자에게 저자가 신중하고 온건하다(modest)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엄밀한 철학적 체계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서술하는 내용을 담으려고 해야 했는데,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책의 내용이 신중하고 건설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수사를 배제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서술했고, 실험 프로그램의 인식론적인 범주를 지키기 위해서 실험의 사실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실험이 정당한 철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가 사실성이었다. 실험 보고에서 실험 그 자체와 실험에 대한 반성은 이러한 이유에서 분리되어 취급되었다. 실험가는 자신이 특정한 철학적 이론 체계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 및 실험 현상에만 집중한다고 강조했다. 직설적으로 서술하고, 온건하며, 철학 체계에 무지한 듯한 저자는 자연을 그대로 잘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사람들의 신뢰성을 얻었으며 실험의 결과를 성공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실험적 지식의 생산 문제는 이러한 종류의 담론을 유지하고 사회적 유대성을 유지하는 문제라 할 수 있었다. 1650년대 후반에서 1660년대 초반에는 실험 프로그램이 안전하게 제도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실험철학의 옹호자들을 확보하고 실험철학자의 사회적 역할이 정의 및 공개되어야 했다. 실험자 집단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사실성을 확보해야 했고, 실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적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지가 정의되었다. 실험철학의 입장에서 연금술은 실험적 담론으로 흡수해야 할 대상이었다. 논쟁과 불일치를 제기하는 방식이 실험철학 내부에서 필요했다. 논쟁을 수행하는 문제는 왕정복고 시대의 과학 초기에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개인주의적 견해와 지식이 기존의 질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실험철학의 논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및 규칙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실험 결과에 대해서는 비판하되 실험자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 것, 오류를 인정하고 이를 공적으로 공개하여 받아들일 것 등이 논쟁의 규칙들에 포함되었다. 보일의 저서 회의적 화학자에는 논쟁을 다루는 방식이 극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이 저서의 상황은 가상적이며, 등장 인물 상호 간의 대화를 통해 진리가 출현하며, 대화 내내 예의 범절이 지켜지고, 대화를 통해 실험적 사실에 대한 상호 간의 정보 교류가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보일은 체계적 실험 및 그러한 실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사실, 실험철학자들의 사회적 삶에 있어 지켜야 할 규칙들을 강조했다. , 실험철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독자적 공간을 왕정복고 시대의 문화 속에서 확보하는 것이 보일의 중요한 목표였던 것이다.

 

   실험철학자들은 물질적, 언어적, 사회적 기법을 통해서 자료를 객관화시키는 방법(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의 담론에 따르면 기계가 사실의 생산자였으며 관찰의 옳고 그름 또한 기계에 의존했다. 담론을 내외적으로 경계짓고 담론 내부에서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형식과 규약을 제공하는 데 실험철학자들의 언어적 기법이 사용되었다. 실험철학자들의 사회적 기법은 실험철학적 담론이 개인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믿을 만하며 사실적이라는 일종의 객관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지식을 공공화시킴을 통해 합법화하고, 이러한 공적 지식은 극단적 개인주의와는 차별화됨을 강조했다. 즉 실험적 지식의 자연화는 실험적 규약의 제도화에 의존했던 것이다.

 

   홉스는 자연 철학에 대한 실험적 프로그램에 반대했다. 그는 실험적 수행이 공개적으로 수행되고 동의를 얻는 과정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에 의하면 원인과 결과가 식별되면 단일한 실험만으로도 충분하고, 철학은 원인에서 결과를 추론하거나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하는 것이지만 실험적 프로그램은 이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관찰과 물리적 원인을 과정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했고, 실험철학에서 제시하는 가설추측을 실제 원인에 대한 진술로 간주했다. 그는 실험철학자들이 제시하는 것과는 다른 대안적이고 더 뛰어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에 의하면 측정 기구의 구성 및 기능에는 이미 이론적 가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홉스는 실험철학자들에 대한 적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실험철학자들의 실험이 실제로는 공공적이지 않으며 오직 소수의 집단에만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실험철학자들 사이에서의 담론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유로운 것이 아니며, 그 집단에도 권위자가 있어 논의의 주제 및 방식 등을 제한한다고 홉스는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실험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실적 지식, 객관적 지식도 기존의 지식과 다를 바 없으며, 더 나아가 쓸모 없고 불필요한 것이었다. 홉스는 공기 펌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이 도구는 철학적으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오히려 진공이 아니라 가득 차 있음'의 가정을 토대로 실험 현사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홉스는 공기에 대한 선행 가정(공기는 순수하고 섬세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를 토대로 공기 펌프가 진공을 형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공기 펌프는 샐 수밖에 없으므로 진공 생성은 불가능하며, 공기(혹은 공기의 순수한 부분)가 공기 펌프 내부로 침투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공기 펌프의 봉인(seal)이 불완전하다는 것이 홉스 반론의 핵심이었다. 보일의 펌프가 닫힌 계라고 할 수 없으므로 그 결과로 주장된 것들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가 가능했다. 하지만 홉스는 실험철학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물리적 설명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홉스에게 있어 진공은 순수하게 텅 빈 것이어야 했으므로 공기 펌프를 통해서는 진공이 생성될 수 없었다. 이렇게 진공을 정의하면, 홉스는 공기 펌프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질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다.

 

   공기 펌프에 남아 있는 미묘한 유체에 대한 이론을 기타의 학자들(월리스, 호이겐스, 후크 등)이 제기했다. 홉스는 가시적 물질, 비가시적 물질, 공간을 채우는 유체 에테르 등 물질에 대한 삼분법을 제시했다. 보일은 공기의 탄성을 별다른 설명 없이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홉스에 의하면 이는 자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진공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공기를 제거했을 때 생명체가 죽고 촛불이 꺼지는 현상 등 공기 펌프와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이 홉스의 유체(기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홉스의 이론으로는 물기둥 상승 현상도 설명할 수 있었다. 진공에서의(낮은 압력에서의) 방광의 터짐 현상도 홉스의 이론으로 설명 가능했다(물질의 유공성에 근거). 응집된 다수의 원형 물질들이 진공화를 통해 분해되는 현상 또한 홉스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홉스는 자신의 자연 철학에 부합하면서도 보일의 실험에 적용될 수 있는 물리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홉스가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하비와 갈릴레오에 대한 홉스의 평가)이 있다. 하비는 피가 순환함을 개인적 경험의 차원을 뛰어 넘어 객관적으로 보여주었고, 이러한 하비의 작업을 홉스도 인정했다. 홉스는 거듭 시행되어서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 실험이 자연 철학에서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좋은 기구를 통한 실험 만으로는 올바른 자연 철학이 불가능하며 대중은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이 홉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홉스는 체계적 실험을 수행하는 것과 자연 철학을 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자의 사고 양식은 기계공의 사고 양식과는 다르다. 홉스와 보일 모두 철학자는 고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생각하는 철학자의 상은 서로 달랐다. 보일의 철학자는 실제적이고 겸손하며 기술친화적이었던 반면 홉스는 기존의 철학적 방법론을 옹호하고 철학과 기술을 구분하려 했다.

 

   17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얻는 서로 다른 전략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홉스가 몇몇 왕립학회 회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음이 분명하나, 홉스와 왕립학회 사이에는 신랄한 논쟁이 있었다. 홉스는 인격적인 측면에서 독단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가 철학에 있어서 완전하고 자기 충족적인 체계를 완성했다고 야심차게 주장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온건겸손을 표방하는 왕립학회와는 달랐다. 왕립학회는 홉스의 독단적인 측면을 거부했으며, 권위주의적인 독단주의와 겸손하며 온건하고 친근한 실험철학자들을 대비시켰다. 이러한 측면에서 홉스와 왕립학회의 지식 추구 방식은 양립할 수 없으며 바로 이 근거 때문에 왕립학회는 홉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험철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획득된 사실들을 근거로 원인을 추론했지만, 홉스는 원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근거로 결과를 추론하고자 했다. 실험철학자들은 공기 탄성에 대한 원인을 제시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원인을 제시할 경우 원인에 대한 무한퇴행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홉스는 외부적 원인이 찾아지면 원인에 대한 물음이 종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홉스는 보일의 탄성 개념이 기본적으로 비기계적이며 불합리한 결론을 낳는다고 비판했다. 참되고 일관된 메커니즘은 공기의 탄성에 대한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원인을 구체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실험철학자들과 소요학파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홉스는 실험철학자들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운동론을 제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고, 그런 의미에서 홉스는 실험철학자들이 기능공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홉스의 언어적 기법은 소크라테스와 유사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결론은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도출된다. 물론 홉스에게서도 대화 참여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참여자는 그릇된 추론을 지적받고, 적절한 질문을 하고, 홉스의 논증에 동의하기도 하면서 결국은 홉스가 주창하는 철학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홉스의 대화는 논리를 사용하는 철학적 방법론의 우위를 극적으로 나타내준다. 특히 그는 동의를 얻는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방법임을 보여주려 했다. 따라서 홉스는 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실험 체계의 조작과 관련된 도상을 자신의 저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것이다. 홉스 또한 보일과 마찬가지로 현상의 설명에 대한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그는 보일과는 다른 근거에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홉스에 따르면 철학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종합적 방법으로 이는 알려져 있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분석적 방법으로 이는 감각으로부터 인과적 원인을 구성하는 것이다. 홉스는 기하학이 확실하고 인과적인 지식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는데, 기하학이 인과적인 까닭은 선, , 공간 모두 인간이 구성한 대상물이기 때문이었다. 홉스는 이성주의와 규약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확실성이 규약의 기능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야말로 완전히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 철학은 가능한 원인을 자연적 효과를 근거로 찾아야하므로 기하학만큼 특권적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자연 철학은 올바른 방법의 적용을 통해서 충분한 확실성을 얻을 수 있으며, 실험철학자들은 자연사와 자연 철학을 혼동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홉스는 생각했다. 보일은 개인들의 감각 경험의 집합체가 동의의 근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홉스는 동의의 근거는 믿음이 아닌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군주의 권위는 그것이 사회 자체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기하학과 유사한 특권을 가지게 된다.

 

   내전, 공화정을 경험한 후 왕정복고가 된 상황 속에서의 영국은 어떤 종류의 지식이 사회적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수의 동의를 확보하고 파괴되지 않는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것 사이의 연관은 실험가들과 홉스 모두에게 분명해보였다. 왕정복고 시기에는 사회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고 기존의 왕조아 교회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지식과 사회 조직의 모형이 요구되었다. 보편적 지식의 성공적 모형은 지식에 대한 의견 다툼을 방지해야 했고 복고된 왕정에 반하는 광신도들의 믿음 형식 또한 부정할 수 있어야 했다. 교회의 안정화와 정보의 전파 및 통제의 문제가 대두되었고, 극단적이지 않은 범위에서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허용해야 했다. 상충하는 이익에 대한 평화적 해결의 열쇠는 학문의 형식에 있었다.

 

   클라렌던(Clarendon)은 주체들의 믿음, 공동체의 동의, 왕정복고에 대한 동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했으며, 논쟁이 사회 질서에 혼란을 주지 않도록 논의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과연 사회적 분쟁을 막을 수 있는 형태의 자유로운 논쟁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했다. 당시에는 정치, 역사 등에 관한 저서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었지만, 왕립학회는 고유의 출판 허가권이 있다는 큰 특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공공적인 모임 장소도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커피 하우스에서는 참가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졌고, 이 때 홉스의 철학은 커피-하우스의 철학이라 불리기도 했다. 홉스의 철학은 왕정의 기호에는 부합했으나, 이에 대한 평면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그의 저서들은 검열의 대상이 되었으며 억압되었다. 홉스의 책에는 위험한 지식을 판단하는 척도 및 그러한 지식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고, 이 책은 1680년이 되어서야 출판된다.

 

   그는 철학적 논쟁에 있어 이단의 계보학을 분석하고, 사회적 법률만이 종교적인 박해를 검열할 수 있는 강제력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박해를 법률화하려 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비판했다. 홉스는 자신의 저서들을 왕에게 헌정함으로써 궁정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으며, 그는 성직자들과 실험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독립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위험하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에는 개인적인 믿음과 대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헨리 모어는 교회 자체의 상황과 리바이어던이 왕정복고 체제를 위협한다고 보았고, 이에 대항하는 두 집단이 자신을 포함하는 교회 개혁가들과 보일이 주도하는 실험철학자들이라 생각했다.

 

   실험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라면서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건전한 지식은 가치 있는 사회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고, 경쟁하는 견해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사회적 안정성을 유도할 수 있으며, 자율적 토론은 그 경계가 조심스럽게 정의되고 유지되기만 하면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실험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분쟁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하트립과 보일은 독단적인 지식에 반대하고, 정부가 과학적(합리적) 지식을 보호하고 장려함으로써 사회적인 논쟁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왕정복고 시대에 억압과 관용 사이의 문제는 더욱 첨예해졌고, 보일과 그의 동료들은 분쟁이 안전하고 참을 수 있게(관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교회와 실험철학자들은 공동으로 관용과 배제의 문제, 자유로운 토론의 장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문제를 연구했다. 이 때 홉스의 독단주의는 배척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강제와 강압으로 침묵하는 사회보다는 논쟁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가, 강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참된 원리를 토대로 이끌어진 정치적 합의가 선호할만 하다고 생각했다.

  

   실험과 상호협력적으로 산출된 사실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경우에는 그 주장에 오류가 있어도 용인함으로써, 보일은 안전하게 경계지워진 사회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험에 기반한 자유는 개인의 도덕 초월적 자유 및 통제 불가능한 개인적 판단과는 구별되었다. 특히 당시 급진적이었던 천년 왕국 출현론이나 종말론은 억제되어야 하는 위험한 움직임들이었다. 교회는 실험철학적 담론이 기존의 과거적 전통을 전복시키지 않으면서 앞으로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험철학자들은 전제적 독단주의를 비판하고 실험적 자유와 의심을 강조했다. 스프랏(Sprat)역사는 실험철학을 변증하는 성격이 강했다. 1666년을 실험이 등장하기 가장 적합한 시대였다고도 하고, 신적 권력이나 더 나은 지식(실험적 지식)에 반기를 드는 개인적 지식을 비판하기도 한다. 실험철학의 표방이 사회적 차이와 종교적인 이견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 담론의 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실험적 사실에 따르는 것 및 종교적 권위에 복종했기 때문에 담론장의 안정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이에 실험적 작업은 저급의 노동일 뿐만 아니라,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실험에만 호소하는 것은 또다른 강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한 실험가들의 활동은 교회와 국가의 지위를 보존하는데 있어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권위에 근거한 활동보다 효과가 덜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따라서 보일을 비롯한 실험철학자들은 교회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유물론의 배제, 영혼의 증명 등) 실험적 탐구를 진행시켰다. 홉스는 교회와 연계해서 신적 권위를 통한 독립성을 주장하는 실험철학자들 또한 권력을 분산시킨다는 의미에서 교회와 더불어 비판했다. 홉스의 이러한 비판은 역으로 실험철학자들과 교회의 연합 및 홉스 철학에 대한 반대로 이끌었다. 홉스는 권력을 분리시킨다는 이유로 교회와 실험철학자들에 반대하고, 교회와 실험철학자들은 홉스의 반신론적인 요소를 지적함과 동시에 실험철학이 종교적 교리를 지지함을 근거로 홉스를 비판했다.

 

   보일과 성직자들은 연합해서 홉스주의를 공격했고, 실험은 기독교 변증에 기여를 하는 차원에서 용인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하지만 실험의 이러한 유용성은 실험 단체가 갖는 이익에 무관한 자율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연에 대한 신의 책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에만 원자 가설과 같은 반신론적 이론을 이겨낼 수 있다고 성직자들은 생각했다. 왕립학회는 종교의 옹호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교회가 당시 영적인 존재를 확인하는 데 실험철학적 방법을 사용한 것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 방법론은 무엇이 어떻게 증명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증명되었으며 증명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주었다. 실험철학적 담론의 장에서는 근거 없는 광신도들의 주장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신비적인 현상(그레이트레이크의 치료 능력)은 이 담론의 장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실험을 통해 생산된 사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으며, 이 사실은 도덕적 확실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사람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영혼에 관한 실험적 증거들의 생산은 교회가 실험을 자신을 위한 일종의 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홉스는 실험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해서는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험가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신성한 공동체라고 선언했다. 특히 보일은 개종의 경험 이후 신앙의 합리적인 근거를 찾게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한다. 기하학과 논리적 추론에 감명받은 홉스와는 달리 보일에게 실험철학자들은 자연의 사제들이라 불릴만 했다. 실험가들을 자연의 사제들로 나타냄으로써 실험가들의 작업이 종교를 지지한다고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험실 또한 안정적인 지위를 얻었다.

 

   홉스는 실험철학이 제시하는 사회의 실상이 성경에서 등장하는 어둠의 왕국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 왕국은 그릇된 교의에 의해서 지배된다. 홉스는 실험철학자들의 도당이 너무 배타적임(홉스를 받아들이지 않으므로)과 동시에 너무 개방되어 있다고(누구나 할 수 있는, 지적으로 저급한 실험을 수행하므로) 주장했다. 홉스는 실험적 공간의 사적인 성격을 근거로 실험철학자들이 지적인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보일은 자신을 실험공동체의 대표자로 여기고 홉스의 비판을 공동체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했다. 홉스는 어떤 종류의 독립적인 지식인 집단도 사회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직 사회적 권력 그 자체만이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연역적인 규칙을 추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