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이야기

서양과학사 독서노트 11: 근대 초 의학과 생명과학

강형구 2016. 4. 20. 07:00

제12: 근대 초 의학과 생명과학

 

하비(Harvey),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논고에서 발췌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논고는 피가 인체를 순환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는데, 이는 1천 년을 넘게 정설로 받아들여진 갈레노스(Galenos)의 의학을 근대적 의학으로 대체한 사건이었다. 하비는 맥박이 뛰면서 심장으로부터 방출되는 피의 양을 계산하는 것과 같은 정량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있으며, 결찰사(結紮絲)로 팔을 동여매어 피가 동맥을 통해 몸의 끝부분으로 갔다가 정맥을 통해 돌아옴을 보이는 실험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피는 동맥에서 정맥으로 돌아가서 다시 우심실로 복귀한다. 그래야지만 정맥이 완전히 텅 비워지고 동맥이 파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소화된 음식만으로는 신체의 많은 피를 만들어낼 수 없다. 피는 지속적으로 심장의 맥동에 의해 대정맥에서 동맥으로 전달된다. 정맥은 지속적으로 신체의 각 부분에서 심장으로 피를 돌려보낸다. 정맥을 통해 피가 심장 쪽으로, 말단에서 안쪽으로 흐르지 반대쪽으로는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찰사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낸시 시레이시(Nancy Siraisi), 갈레노스 목적론에 대한 베살리우스의 독법(讀法)

 

   16세기에 그리스의 과학 원전에 대한 활발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탐구가 가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상반된 두 견해가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16세기 전반부에 갈레노스의 해부학 개념들을 수용하기도 하고 변경하기도 했다. 16세기 의학은 지식과 기술적인 측면 둘 다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으며, 베살리우스는 자신의 책을 읽을 독자들이 갈렌의 저서를 자신만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책을 저술했다.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영혼이 잘 기능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목적론적으로 고안되었다는 것이 갈렌의 생각이었으며, 베살리우스는 갈렌이 제시하는 목적론적 개념(ideas)도상(images)논증사례들 중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포기하였으며 일부는 수정하는 등 갈렌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체 기관들 중 목적론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이 손이므로, 갈렌의 저서는 손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한다. 베살리우스의 조직(Fabrica)1권에는 갈렌 해부학의 전체 내용에 대한 조망이 실려 있다. , 근육, 혈관, 신경을 다루는 베살리우스의 책은 갈렌처럼 손을 제일 먼저 다루지는 않았으며 해부학적 사실에 대한 갈렌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베살리우스 또한 (특히 손에 대한 논의에서) 갈렌의 목적론적 개념들을 사용했다. 또한 베살리우스는 신체 기관의 뼈와 근육의 수를 헤아리는 것을 조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그 수치를 파악하여 갈렌의 이론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베살리우스가 신체 기관에 대해서 목적론적인 서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손의 움직임과 손가락손목의 접합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역학적 용어(terms of mechanics)를 사용하려 시도한다.

  

   갈렌은 신체의 기관이 인문학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했고, 신체의 부분들 또한 그러한 정신적 활동을 위해 기능한다고 보았다. 조직에서 베살리우스도 갈렌과 유사한 목적론적 논의를 하지만, 그의 저서에는 키케로(Cicero)의 수사학적 도구도 사용되었으며, 판이 거듭될수록 목적론적 설명의 부분이 줄어들고 베살리우스는 갈렌의 수사학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베살리우스는 기능과 목적을 통한 설명이 아니라 역학적인 용어를 통해 신체의 부분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기본적인 목적론적 틀은 유지했다.

  

   신체의 경이로움을 기독교적인 신 개념과 결부시키는 표현들이 베살리우스의 저서에서 많이 등장한다. 베살리우스는 갈렌이 충분히 자연의 신성함을 표현하지 못했다며 비판하고, 자연의 신성함을 칭송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살리우스 고유의 해부적 방법은 신체의 구조를 더 잘 드러내주었으며, 그는 사실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신체에 대한 이전까지의 수사학을 변경시키려 했다. 또한 베살리우스는 해부적 지식을 얻기 위해 손수 기술을 익히고 연습하는 것을 강조했다.

  

   당시에는 신의 신성함을 연구하기 위해 해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해부가 도덕화되었다.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에는 해부가 신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준다고 생각되었으며, 동시에 해부는 범죄자에 대한 최후의 처벌이라고 부정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해부에 대한 위와 같은 양면적인 호기심을 갖고 있었지만, 베살리우스가 신체 기관을 설명함에 있어 신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데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차별화되는 특별한 측면이 있다. 당시에 등장한 자연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저서들에는 이러한 강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저자는 베살리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개념 및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한다. 플라톤 철학에서의 신성한 장인 개념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어 베살리우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베살리우스는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된 신 개념의 신성함을 인체의 해부 특히 관절학에서 찾으려 했다.

  

   베살리우스는 비교해부학적 작업을 통해 인체가 다른 포유류와는 다름을 강조하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베살리우스의 책을 통해 인체가 동물의 신체와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신의 독창성과 신성함을 칭송하면서도 갈렌의 수사학을 비판하는 이중적인 전략을 사용하였으며, 베살리우스의 수사학은 맥락에 따라서 갈렌을 비판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베살리우스의 조직은 기존의 전통적 종교에 반하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이 기독교적 믿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의 창조를 강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책은 신의 창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강조점을 두었다. , 그는 신체의 정확한 구조를 이해해야지만 신을 제대로 칭송할 수 있으며 이를 해부학이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베살리우스는 당시의 문화적의학적철학적 맥락 속에서 갈렌의 저서를 꼼꼼히 읽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다.

 

마틴 켐프, 신체와 우주의 사원 : 베살리우스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시각과 시각화

 

   르네상스 시대에 시각적 표상의 수단이 개혁된 것은 과학혁명에 있어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 시각 예술에 있어 체계적 자연주의에 관한 새로운 기법들은 르네상스 과학의 진리 탐구와 분리될 수 없다. 원근법적 표상은 르네상스의 상징적 형식으로 여겨진다. 저자인 켐프는 1543년 경 해부학과 천문학에서 시각적 삽화(illustration)가 어떤 이유에서 사용되었고 어떤 기능을 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자 한다. 베살리우스(Vesalius)의 해부학에서는 시각적 삽화의 사용이 해부학을 개혁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였으나, 천문학에서는 기존의 논증과 표상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다만 과학을 전파하는 데 있어 시각적 삽화가 강력한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본 논문의 요지이다. 해부학에서는 독자가 믿을 수 있도록 상황을 정밀하게 서술하는 것이 중요했다. 반면 천문학에서는 관측 자료가 천문 체계와 정확하게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했으며, 시각적 표상이 곧 천문학 체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를 보면 시각적 삽화가 상당히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97년 베히틀린(Wächtlin)에 의해 출판된, 죄수를 해부한 내용을 담은 시각적 삽화의 경우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삽화에는 해부학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삽화가들이 해부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21, 1522년에 출판된 베렌가리오(Berengario)의 해부학 책은 지식인 및 귀족층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책 속에서 시각적 삽화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에티엔느(Estienne)의 책(1545)에 포함된 삽화에는 저자의 스토아적 믿음이 반영되어 그 표현이 다분히 상징적이었다. 베살리우스는 직접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능숙한 솜씨로 해부한 결과를 자신의 책에 사실적으로 수록했다. 그는 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특별한 개인이 아닌 표준적인 인간의 신체를 표현했으며, 인체 기관의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했다. 베살리우스의 책에서는 이후 16세기에 사용될 모든 종류의 해부학적 삽화가 시험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부분적인 지식만을 갖고서는 우주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주전원을 사용한 옛 천문학자들을 비판했다. ‘완전하게 비율을 갖춘 하나의 신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코페르니쿠스는 우주 전체가 솜씨 좋고 신성한 장인에 의해 조화롭게 만들어졌다는 믿음을 가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 태양은 절대 군주의 중심적 위치를 표현했으며 이는 당시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 되면 관찰자의 위치가 바뀌고 그에 따라 현상도 변화한다. 관찰자의 이동에 따른 현상의 변화에 대한 인식은 르네상스 시대의 핵심적 요소였다. 이에 따라 관찰자 이동과 관련해 대상의 형태, 위치, 이동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 발전되었다.

  

   천문학에서는 보는 것이 곧바로 우주 체계를 대변해주지 못했으므로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우주 체계를 고전적인 도식으로 표현했다. 천문학에서 언어적으로 표현되기 힘든 요소들을 표현하기 위해 도식이 필요했지만, 이 도식에는 당대의 새로운 표현 기법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천문학자들은 도식과 수치를 병행해서 사용하였으며, 그네들은 시각 과학과 그에 관계된 도구들에 친숙해 있었다. 관측된 현상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천문학적 도구가 사용되었으며, 물리학 모형은 주로 시각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정교하고 적합한 천문학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천문학자들은 의심할 수 없는 정확성에 대한 강조에서 실재에 대한 강조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천문학적 관측 도구들을 천문학의 핵심적 부분으로 끌어 올린 인물은 티코 브라헤다. 그는 관측 도구와 관측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관측 자료의 정확함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독자적이고 권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데에도 그의 천문학 도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티코의 우라니보르그(Uraniborg)는 우주의 조화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설계되고 제작되었다. 천문학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케플러에 이르러서 정점에 이른다. 케플러는 천구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해서 우주의 신비로운 조화를 드러내려고 했으며, 행성 운동의 역학적 측면과 플라톤적 기하학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망원경이 등장하기 전까지 천문학에서의 시각화는 천문학적 논증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당시 천문학에서의 표상 과정은 톨레미, 이슬람의 그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앤드루 그레고리, 하비, 아리스토텔레스, 날씨 순환

 

   그레고리에 의하면 하비가 심장을 펌프로 비유하는 것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하비는 피가 순환하는 것과 날씨가 순환하는 것을 연관지으면서 대우주/소우주 유비를 사용했다. 하비가 사상적인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혈액순환에 관한 그의 정량적 탐구는 혁신적이었다는 것이 기존의 견해다. 하지만 저자는 하비의 양적 탐구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심장에 대한 펌프의 비유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하비는 르네상스 자연마술의 영향을 받아 대우주/소우주 유비를 사용하였으며 혈액 순환을 날씨 순환에 비유하면서 정맥혈과 동맥혈의 상호 변환을 설명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문학에 수학을 적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이 역학에서의 운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므로 기꺼이 수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질적 변화를 다루는 데 수학이 적용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의 변화와 질적 변화의 차이이지 현상계와 지상계의 차이가 아니다. 그는 지상계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는 비율 관계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천문학에 있어 기하학과 실제 감각하는 현상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면서도 그 차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것처럼, 그는 지상계에도 수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이 기하학보다, 기하학이 물리학보다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정확성은 단순성을 의미했으므로 이로부터 자연 운동 및 강제 운동에 수학을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지상계의 특정 현상에 대해 수학 및 정량화가 적용될 수 있었다.

  

   하비는 혈액의 순환에 대해서 정량적인 실험을 했다. 이러한 하비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는 논의가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비의 실험에서는 정확성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복잡한 계산 또한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하비가 제시하는 대부분의 수치들이 근사값이다. 하비가 신체 내부의 질적 특성을 탐구하는 경우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양적 측정에 있어서는 그러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에서 그의 태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와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지질학에서 강물의 공급이 겨울 동안에 축적된 지하 저장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양적 근거를 들어 반박하고 날씨의 순환을 통해 강물의 공급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하비의 주장과 상당히 흡사하다. 하비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작으로부터 관련된 실험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레고리는 주장한다.

  

   하비는 동맥혈과 정맥혈이 어떻게 상호교환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므로, 르네상스 자연 마술의 전통과 대우주/소우주 유비에 의존해야 했다. 그는 심장과 혈액의 순환을 태양과 날씨의 순환과 연계지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동맥혈과 정맥혈의 상호교환 또한 비가 강이 되는 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존하고 있다. 하비에게 있어 날씨의 순환과 대우주/소우주 유비는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기 위한 핵심적 요소였다. 하비는 심장을 물을 끌어올리는 두 가닥의 풀무에 비유하는데, 풀무의 비유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며, 하비는 이를 단지 비유로써만 사용했지 이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생리학에서의 정량적 실험은 갈렌과 에라시스트라투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므로 과학혁명의 핵심적 요소라 하기 힘들다. 특히 하비는 갈릴레오처럼 체계적인 정량적 탐구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에는 큰 유사성이 없다. 질적 특성을 양적 특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과학혁명의 핵심이라면, 하비 또한 심장과 혈액에 대해 그러한 양화의 시도를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비의 정량적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돈 베이츠, 원 닫기 : 하비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어떻게 진실 게임을 했는가

 

   베이츠는 하비의 혈액 순환 발견에 대한 지성적 요소와 미시사회적 이유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하비의 동시대인들은 하비의 순환 논제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순환 논제는 그 내용이 급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이내에 완전하게 받아들여졌다. 또한 이후 이 논제는 350년 동안 안정적으로 지지된다. 저자는 하비의 순환 논제가 받아들여진 과정을 구성된 정합성’, ‘지성적 요소개념을 통해서 분석함으로써 발견발명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다.

  

   하비는 3단계에 걸쳐서 순환 논제를 주장한다. 첫째(x), 심장은 강하게 수축한다. 둘째(y), 심장은 상당한 양의 혈액을 방출한다. 셋째(z), 그러한 많은 양의 혈액은 정맥을 통해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순환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강제적이지도 않다. 얼핏 생각하면 하비의 논증은 합당하다고 여겨지지만, 왜 하비는 순환을 깨닫기 위해서 자신이 제시하는 논리적 필연성과는 별개인 결정적인 통찰을 필요로 했을까? 하비가 순환을 믿게 된 것과 논리적 필연성은 별개였으며, 순환성에 대한 믿음 이후 논리적 필연성이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하비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혈액 순환이 합리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여겨지게 한 것일까?

  

   그의 논의에 따르면 ‘y이면 z’이다. 하지만 왜 하비는 추가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려 했으며, 왜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을까? 동맥에 피와 혼이 섞여 있다는 기존의 갈렌적 견해에서는 동맥혈이 물보다 훨씬 묽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갈렌 이론에 따르면 심장이 세차게 수축한다는 표현도 애매해진다. 고전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하비의 생각은 정신 나간 것으로 생각되었다. x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동맥혈이 물과 유사한 물리적 성질을 갖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하비의 숨겨진 전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비와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이론을 제시했던 호프만(Hofmann)은 죽는 날까지 혈액 순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동맥 체계를 혈액의 거대한 저장소라고 생각했으며 동맥혈이 유동한다는 하비의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프만의 모형에 따르면 유동 혈액의 총합이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파리지아노(Parigiano)는 동맥혈이 동맥을 타고 심장으로부터 신체 사이를 왔다갔다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파리지아노의 경우에도 유동 혈류의 합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파리지아노의 이론은 갈렌의 생리학을 더 정교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하비는 위와 같은 대안적 설명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경험과 실험 결과에 호소해야 했다. 하비의 논증은 동어반복적이며 필연적으로 하비가 주장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논증을 통해서는 어째서 동시대인들이 하비의 주장을 거부했는지, 그가 어떻게 혈액 순환을 믿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당시의 지적 사조에 비추어본다면 하비의 명제는 대담한 추측이었다.

  

   ‘x이면 y이고, y이면 z이어야 한다필연성의 직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y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yz 사이의 연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다. 1628년 이후 파리지아노는 혈액 순환을 반대했는데, 그는 심장이 수축할 때 피가 아닌 혼이 심장을 떠난다고 주장했다. , 그는 동맥으로 피가 돌아온다는 자신의 이전 주장을 포기한 셈이다. 파리지아노 등 하비의 반대자들은 하비가 주장하는 사실을 거부한 것이지 그의 추론 단계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x이면 z이다라는 것은 하비가 고안해 낸 합리성이자 필연성이었다. 하비의 반대자들은 그 추론의 전제를 문제 삼았지 그 추론 과정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x를 받아들였지만 z를 무시한 리드(Read)의 경우 그에게 하비의 명제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는 심장의 강한 수축이 혈액 이동에 대한 갈렌의 모형과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비는 그의 추론 과정을 합리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해부학자들은 동일한 현상을 확인하고도 갈렌의 이론을 유지했으며, 굳이 하비와 같은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호프만의 경우도 동맥을 통해 상당한 양의 피가 몸으로 공급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혈액 순환과는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당시에는 생기론적인 신의 작용에 호소해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따라서 y에서 z로의 추론 과정은 그 자체로 명백하고 당연하다고 볼 수 없다. 하비는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하고 그것에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통속 물리학에 의존했다. z는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유체동역학에 호소하고 있으며 이는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의 추론에 의존한다. 따라서 yz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인 것이 아닌 유비적인 것이었으며 일상적 직관에 의존했으므로 x, y, z 사이의 추론 관계가 명백하게 생각되었을 뿐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합성은 규약화되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고안된 실재의 일부분을 규약적 혹은 규약화된 것이라 부르기로 한다면, 저자는 실재와 규약이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주목한다. ‘x이면 y이고, y이면 z이다는 혈액 순환을 규약화하는 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하비의 주장이 제시되었던 당시에는 이 주장이 합리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비의 정합성 전략은 크게 세 가지(재해석, 실험, 정량화)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의사들은 결찰사로 동여맸을 때 정맥의 반응을 갈렌의 이론 범위 내에서 해석하고 있었지만 하비는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또한 하비는 통속 물리학에 근거해서 결찰사 실험이 혈액 순환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전략을 사용했다. 셋째로 하비의 가장 잘 알려진 정합성 생성 전략은 그의 정량적 논변인데, 그는 산술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논변의 타당성을 보장하려고 시도했다. 오차 범위를 감안하더라도 방출되는 전체 피의 양이 일정 부피에 들어 있는 피의 양보다 확연하게 많았으므로 그의 논변은 정량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의 의사들은 하비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존에 갖고 있던 문제없는 배경지식을 희생하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하비의 논제가 믿을 만한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어떻게 해서 그의 논제가 기존의 지식에 반하면서까지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고 수용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플렘프(Plemp)는 처음에 순환 이론을 거부했다 이후 이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는 생체 해부 등과 같은 경험적 증거에 의해서 자신의 견해를 바꾸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비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자 그는 하비 주장에 반하는 실험 결과를 무시하고 하비 주장에 부합하도록 실험 결과를 해석하게 되었다. , 진리는 양날을 가진 검으로써 플렘프는 특정한 정합성의 규약을 따름으로써 동시에 그에 따른 제약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기계적 철학에 근거해서 심장 고동에 대한 오컬트적 설명을 거부했고, 켐프가 제시하는 반례에 대해서도 기계적 설명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와 켐프 모두 심장의 부분이 고동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했으며, 두 사람의 이론적 신념이 추구하는 바가 달랐으므로 같은 사실을 두고도 그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 것이다. , 두 사람이 선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달랐고, 그에 따라 두 사람은 실험 결과도 다르게 해석했다. 호프만은 하비의 산술적 논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증의 방법이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비의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 각자가 주장하는 정합성으로 인해 그들은 존재론적이고 방법론적인 선험성의 원리들에 제약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하비 논제에 대해 가지각색의 반론들이 있었고 순환 현상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방법론적인 동의가 부재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순환 논제가 받아들여졌을까? 당시 전문 의학자들 사이에서 한 의학자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알려진 배경지식을 갖고 그 지식의 전제 위에서 활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또한 하비의 논제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으며 상당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까닭에 큰 주목을 받았다. 하비는 자신 고유의 정합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논증을 펼쳤으며, 하비의 주장이 제시된 이후로 심장의 강한 수축, 심장이 일종의 펌프라는 사실이 의학자 사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실험이 수용되고 적극적으로 추구되는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하비의 주장을 보편화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추측이다.

  

   물론 끝내 하비의 견해를 반대한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하비에게 승리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공동체의 승인을 얻지 못했으므로 결국 하비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실험 및 기계주의의 성행, 아리스토텔레스 및 갈렌에 대한 불신, 출판의 보편화 등은 하비의 주장이 보편화되도록 기여한 또 다른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혈액 순환 논제의 정합성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보강되었고, 끝내 하비 생전에 다른 이론들을 제쳤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하비의 논제는 안정적인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피터 디어, 기계적 소우주 : 신체의 정념, 좋은 예절, 데카르트적 기계론

 

   1669년에는 젊은 신사들에게 수학적 기예를 지도하기 위한 책인 실용 기하학이 발간되었다. 데카르트의 정념론17세기 자연철학에서 신체 행동의 규준과 이해 가능성 기준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었다. 데카르트에게 인간 행동은 인간 생리학의 일부였고, 그에게 있어 생리학은 기계적인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고위층 귀족 신사로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는 법학 학위를 받은 후 군대에 지원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반대했다. 결국 데카르트는 파리를 떠나 군 복무를 했고,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편이었다. 그는 고전적인 철학자의 삶을 살았으며, 스스로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로 갔다. 당시 신사는 대개 자신에 걸맞는 방문자들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고, 데카르트는 그러한 관습적 예의를 깨트렸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스스로를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자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독립성과 고독을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철저히 고립되지는 않았으며 명사들과 꾸준히 교류했다. 데카르트는 보헤미아의 공주 엘리자베스와 서신 교환 및 교류를 했으며, 그는 엘리자베스의 철학 교사이자 대화자였으며 의학적 문제에 관한 조언자였다. 데카르트는 중요 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겨한 것과 유사하게 한산한 변두리에 가는 것 또한 좋아했다. 그는 1618년 비크만과 만났고, 미시 입자들 간의 역학적 상호작용을 통해 물리적 설명을 설명하고자 한 비크만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는 이후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대학의 표준 교과 과정에 포함되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군 복무 시절 독일 왕정의 자동 기계를 접한 것이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자신의 방법서설5번째 부분에서 심장의 작용을 설명함에 있어 시계의 비유를 든다. 데카르트는 기계의 비유를 생명체에 국한해서 적용했으며 17세기에는 인간의 이해 가능한 행동을 기계와 비교하는 것이 흔했다. 1618년에 데카르트는 독일에서 마치 기계처럼 잘 규율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는 철학을 통해 우리의 도덕성과 행위를 규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의학, 역학, 도덕학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그는 한 국가의 문명도와 세련됨은 그 국가에서 실천되는 철학에 의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에게 있어 좋은 철학은 좋은 행위를 이끌고 좋은 행위는 문명화된 행위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개인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규율하고 그 규율을 체화하는 것, 새로운 형식의 규율화된 행위를 사회적으로 전파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귀족상류층에서는 독특한 자기 규율의 형식을 필요로 했다. 당시의 자기 절제와 공손함은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고 행위의 양식을 규제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데카르트의 철학은 시민층의 자기 규제와 부합했으므로 특히 독일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그는 기계와 유사한 인간 행위의 개념과 범위를 형식화하기 위해서 영혼의 개념을 재구성해서 수립해야 했다.

  

   데카르트의 저술 전략은 그가 호소하고자 했던 문화적 청중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는 인간의 신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를 밝히려고 했으며, 그는 인간의 신체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자동 기계로 여겼지만, 인간에게는 언어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기계와는 차별화했다. 또한 그에게 있어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적 능력 또한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자동 기계는 정형화된 행동만을 할 수 있을 뿐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기계는 삶의 형식에 동화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달랐다.

  

   엘리자베스 공주를 위해 쓴 영혼의 정념에 대한 논고는 철학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한 저작이었다. 그는 이성을 통해 정념을 올바로 다스려야지만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신체는 일종의 기계였으나, 그는 기계적 신체와 마음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그 결과 행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서는 마음과 신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곧 인간의 정념이다. 그는 몸짓과 얼굴 표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념 또한 규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마음/신체 구분과 유사하게 이성과 정념을 구분했으며, 그는 정념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함에 있어 성별 차이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기계주의자인 데카르트에게 있어 자연은 역학적 작용 개념을 통해 이해 가능했으며, 그에게 있어 이성이란 곧 사회화의 형식을 의미했다.

  

   데카르트는 외모를 치장하는 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속과는 떨어져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철학자로 스스로를 묘사했으며, 은둔에 대한 그의 선호 때문에 로시크루시안(Rosicrucian)으로 의심받았던 그는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비치기 위해 거리를 걸어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은둔적이고 검소한 철학자로서의 데카르트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그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 인간의 완벽함이 있다고 보았으며, 오직 자유로운 행위자의 행위만이 칭찬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마음의 두 가지 주요 특성이 판단과 의지인데, 판단이 이성을 사용하는 능력이라면 의지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다. 데카르트는 완벽한 결정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자유로움의 여지를 남겨두려 했다. 그가 기계의 비유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는 기계의 최종 목적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왜 우리가 칼을 가지고 싸우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칼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커니즘의 중요성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측면이 아닌 방법론적인 측면에 있다. 사회적 형식으로서의 인간의 정념은 규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인간을 일종의 자동 기계와 같이 다룰 수 있도록 했다.

 

해롤드 쿡, 혁명의 최전선? 북해 연안 지역의 의학과 자연사

 

   진보사관 하에서 근대 초기의 과학을 탐구했던 역사적 연구들이 의학이나 자연사에 훨씬 더 중심적인 지위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40년대 후반 이래로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자연사가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에 공헌한 바를 간과해왔다. 스스로를 플라톤주의자라고 천명했던 코이레는 어떤 식으로든 순수한 과학적 관념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진정한 과학이란 자연의 수학화로부터 출현한다는 이러한 생각에서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옹호하기 위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설명틀을 발견해 냈다. 하지만 이는 16세기, 17세기의 동물학자들과 식물학자들의 놀라운 성취는 무시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이 이른바 과학혁명이라 불러온 역사적 사건 내에서 자연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재평가해 볼 적절한 시기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사는 하늘과 땅에 대한 모든 서술들, 땅에 사는 생명체들 및 그것들의 존재이유를 포함한다. 이는 백과사전적 전통과 일치하며, 자연사와 자연철학 사이에 분명하고 견고한 경계를 긋기는 힘들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사적인 경험과 실험의 수집을 토대로 삼아 자신의 과학철학을 구축했다. 베이컨은 사실이라는 것은 지식의 정수 그 자체라고 했으며, 자연사에 관한 지식이란 사실이라는 것에 대한 관찰에 다름 아니며 이는 대부분의 것들보다 확실하고, 추리(reasonings), 가설, 추론(deductions)보다도 실수에 종속되는 정도가 덜하다고 생각했다. 17세기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실을 발견하고 세세한 항목들을 분류해 내는 일은 대단히 신선하고 새로운 것으로 보였다. 자연사는 왕립학회에 있어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진기한 것들, 생리학과 해부학, 식물학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는 왕립학회에 있어 전형적이었다.

  

   스왐메르담의 사례는 17세기 자연사적인 탐구의 범위와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는 지역학당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요하네스 후더로부터 현미경용 렌즈를 만드는 법을 배웠고, 곤충에 관한 몇 가지 굉장히 놀라운 해부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법들을 개발했고, 곤충의 일반사를 출판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해부학자이자 생리학적 기계론자로서 살아 있는 개와 개구리를 자신의 방이나 반 호르너의 집에서 해부했다. 그는 신체 부위를 저장하는 새로운 기법(‘발삼처리), 몸 도관에 밀랍을 주사하는 새로운 기법을 발전시켰다. 스왐메르담과 같은 이들의 연구를 확실히 전위적이라고 생각했던 학자들과 후원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연구가 수행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시간, 자금, 기술과 학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는 것, 이러한 활동이 종교-철학적인 관심과 하나로 얽혀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유럽의 식물원은 당대의 가장 거대한 연구 실험실이었다. 당시 많은 사설 정원들이 있었으며, 해부학 강당에서의 이미지들은 도덕적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자연에 관한 연구는 엄청난 노력과 세세한 항목들에 대한 관심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혼란스러움 아래에 하느님의 섭리가 깔려 있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이 교화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왐메르담은 해부체 속에서 경이로움이 경이로움 위에 쌓여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의 미세한 입자 속에도 하느님의 지혜가 분명히 드러나 있음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 외과의 길드의 수장이자 조산원 감독자였던 라위스의 진열실에는 건조시킨 정맥과 동맥으로 만든 나무에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태아의 해골이 올려져 있었고, 이는 삶의 무상함을 표현했다. 또한 하루살이 또한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는 성체로 사는 날이 단지 하루뿐이라는 추정된 사실에 근거하여 주로 도덕적 논증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열품들은 세세한 항목들에 관한 엄격한 관심, 주의 깊은 세심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자연사적 탐구가 인문주의적이고 문예적인 목적, 즉 교화라는 목적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근대 초기의 학자들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연사적 탐구에 바쳤다. 자연사를 당대의 거대과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시기의 노력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유한 자들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후원, 법적 보호와 허가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자연사 탐구에 필요했다. 자연적인 것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공식적, 비공식적 과학 아카데미들이 많이 조직되었으며, 자연사적 작업을 위해 왕, 주요 대학들, 일반인들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자연사적 연구는 당대의 진짜 과학에 주변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연사학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실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사실 탐구의 더 중요한 목적은 도덕적 교화였다. 교화는 세세한 항목들에 정통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었으며,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새로운 모험이었다. 과학혁명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러한 거대과학, 당대의 최전선의 연구를 포함해야만 한다.

 

윌리엄 애쉬워스, 자연사와 상징적 세계관

 

   자연사는 1530~60년 사이 성행했다 그 이후 정체되었으며, 1560~1660년 사이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 기존 과학사가들의 견해다. 자연사는 과학혁명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왜 자연사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었나? 후기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 자연과학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정들을 재점검해보지 않았다. 현대의 자연사학자들은 여전히 초기 자연사학자들의 자연사 탐구 전제들을 갖고 있다. 애쉬워스는 이러한 정체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르네상스 학자들은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을 수립해서 출판했나? 그런 출판물들은 어떤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왜 그러한 내용을 담았나? 그러한 출판이 목표로 한 독자는 누구였나? 그러한 출판에 담긴 지식이 어떻게 쓰이기를 의도했나? 이러한 출판이 후원자 또는 왕정으로부터 지지받았나?

  

   저자는 1550~1650년 사이의 자연사의 동물학적 측면에 집중한다. 동물이 상징적 언어의 한 측면으로 취급된 세계상인 상징적 세계상은 르네상스 자연사의 내용과 범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상징적 자연사의 종말은 과학혁명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게스너의 동물의 역사에서 공작에 대한 부분을 보면, 여러 언어에서 공작이 어떻게 불리는지, 공작과 관련된 형용사 표현들과 그 기원은 무엇인지, 공작과 여신 주노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 공작에 관한 신화, 속담, 전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가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다. , 공작이 역사, 신화, 어원학 및 기타 세계와 맺고 있는 방식이 전반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게스너는 공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머지 창조적 질서들과 얼마나 유사하고 닮았으며 비슷한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니우스, 플루타르크, 테오프라스투스, 배로 등 다양한 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다.

  

   상징적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첫 번째 요소는 상형문자학이다. 호라폴로의 상형문자학에서는 돼지가 사악한 사람을, 족제비가 약한 사람을 상징했다. 상형문자학은 언어의 매개 없이 사물들을 이해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뒤러의 경우 제복을 입은 개와 사자를 통해 왕의 판단과 두려움을 표상했으며, 뒤러가 막시밀리안 1세를 위해 고안한 아치에는 상징적 의미를 띤 개, 두루미, 황소 등이 왕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족제비, 두루미, 사자 등은 시각 언어의 일부가 되었으며, 상징이자 플라톤적 이데아로써 창조자의 언어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문자였으며, 자연주의자는 그러한 문자를 이해해야만 자연 세계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고대의 메달과 동전에 대한 르네상스인들의 관심은 상형문자학과 관련이 있었다. 르네상스인들은 메달과 동전을 만드는 데 있어 상형문자학을 적용했으며, 고대 동전에 동물들이 빈번하게 등장했으므로 자연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고대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6세기 인문주의적 자연주의자들이 동물들의 상징적 의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솝 우화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우화는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고전적 신화학 또한 자연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신들은 고유의 동물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도상학에서는 베일로 가려진 여성과 그 곁의 코끼리가 종교를, 긴 귀의 여자가 공작을 잡은 채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은 거만함을 표상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동물의 비유를 많이 포함한 속담집을 출판, 16세기 내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상징은 후기 르네상스에 창조되었으며 매우 영향력이 강했다. 상징과 시각 이미지가 결합했으며, 상징은 주로 시각 이미지, 짧은 모토, 경구가 결합되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기에 사람들은 속담적 지혜를 애호했으며, 이러한 전체적 모습을 우리는 상징적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상징적 세계관은 자연세계에 대한 르네상스인의 태도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우주의 모든 사물들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고, 그에 대한 지식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데로 많은 연관관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인들에게 벨런과 롱들레의 동물학은 해부학, 생리학, 분류학과 같이 협소한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불완전하게 생각되었다. 게스너는 중세의 영향보다는 고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게스너의 세계관은 마술적 세계관이 아니었다. 마술적 세계관은 그의 상징적 세계관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기존의 과학사에서는 알드로반디를 환생한 게스너 정도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지만, 알드로반디와 게스너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알드로반디는 공작을 서술하기 위해 31페이지나 할애하고 있다. 알드로반디의 관계의 그물망은 게스너의 그것보다 더 복잡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게스너의 시대에는 상징적 세계관을 뒷받침해주는 중요 저작들이 출간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이후 점점 동물에 대한 상징이 풍부하졌다. 알드로반디의 저서 양이 게스너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두 사람의 시대 사이에 상형문자학, 상징학, 속담 문화 등이 상당히 발전했기 때문이다. 고슴도치에 대한 알드로반디의 논의는 게스너의 그것보다 더욱 더 광범위했으며, 그의 저술에서는 그 이전의 저자들이 고슴도치에 대해 저술한 모든 사항들에 대한 참고를 찾을 수 있다. 17세기 전반에 자연에 대한 상징적 관점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존스톤의 작업은 상징적 세계관의 종말을 의미했다. 존스톤의 저작(1650년에 출판)은 이전과 상당히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공작에 대한 설명에서 관련된 상징, 속담, 상형문자 등의 내용이 없어졌고 이전까지의 저자들에 대한 언급도 없어진다. 이는 상징적 세계관이 쇠퇴했음을 의미한다. 존스톤의 백과사전은 초기 르네상스 자연사에 있어 상징적 세계관의 붕괴를 보여준다고 미셸 푸코는 지적했으며, 더 이상 생명체들은 유비, 유사성,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맨 몸 그대로 객관화되었다. 이를 자연의 탈맥락화, 탈상징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대륙에서 발견한 전혀 낯선 동물들은 이전까지의 상징적 관계망 속에 편입될 수 없었고, 이 동물들에 대해서는 겉보기, 서식지, 먹는 음식 등 제한된 기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옛 세계의 동물들이 유사성의 옷을 입고 있었다면 새로운 세계의 동물들에게서는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토머스 브라운은 이전의 저작들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옳은지를 의심하고, 이성시험권위라는 세 기준을 근거로 기존의 잘못된 믿음들을 비판했다. 그는 공작에 관해 널리 알려진 두 가지 사실들을 실제로 실험해보고, 이에 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했다. 브라운의 회의주의적 시각은 17세기의 골동품 연구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추측이다.

  

   16세기까지는 골동품 연구가 본격적인 역사적 탐구가 되지는 않았다. 16세기 말 무렵부터 북부 국가들에서는 골동품 연구가 매우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정통적 역사 전통이 없었던 북부에서는 고대의 유물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골동품 연구에 영향을 받은 자연사학자들은 자연을 알드로반디와는 매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토마스 브라운은 당대의 골동품 연구에 친숙했고 관심이 있었으며 골동품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도출해 내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문헌적 전통을 의심하고 상징적 전통이 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베이컨은 기존의 자연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는 상징적 세계관 전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우주는 신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 세계 전체가 신성한 언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단어와 사물을 구분하고, 대상과 관련된 단어들은 임의적이고 규약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사에 대한 베이컨주의의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베이컨주의와 데카르트 기계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에 상징적 세계관이 쇠퇴했고, 이는 앞서 살펴본 다른 이유들 때문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골동품 연구의 전통이 서술된 것보다 더 강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측하는데, 왜냐하면 과학혁명 또한 일종의 역사적 혁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혁명으로 인해 과학을 재해석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열게 되었다.

 

알렌 데부스, 화학자, 의학자, 과학혁명에 대한 변화하는 관점들

 

   화학적 철학자들은 화학과 화학적 유비에 기반해서 새로운 철학을 제공했으며, 화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및 갈렌주의자, 기계주의자들과 논쟁한 것이 근대 과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데부스의 논지이다. 기존 역사에서는 과학혁명에 있어 수리과학이 중심을 차지하며, 이는 과학사의 선구자들이 물리학자, 수학자로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과학사에서 화학을 다루더라도, 상대적으로 라부아지에가 중점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보일이나 파라켈수스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연금술은 사이비 과학으로 다루어지며, 연금술은 역사에서 다루어져야 하지 과학사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팽배하다.

  

   마술적인 사이비과학에 대한 연구의 진전은 예이츠와 페이겔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이츠의 논의는 화학과 연금술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사변적인 성격이 강했다. 의학박사이자 의학사에 관심을 가졌던 페이겔은 파라셀수스, 반 헬몬트, 하비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현재의 관점에서는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학문들도 해당 시대의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화학과 의학에 주목했다.

  

   화학적 철학은 고대/근대 구분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화학적 철학에 대한 연구는 근대 과학 형성을 이해하는 데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파라셀수스는 기존의 논리, 수학적 추상화,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렌의 이론을 거부했으며, 창조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와 자연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학철학은 종교와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창조자는 신성한 화학자로 묘사되었다. 화학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부정했으며, 대우주/소우주 유비를 사용하여 광물 형성을 신체의 질병 형성과 비유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파라셀수스 주의자들은 의학자였으며, 그들의 의학은 화학에서 연유했다. 그들은 질병 유발 물질이 공기나 음식을 통해 몸에 들어와서 신체 기관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으며, 갈렌의 체액 이론을 거부했다. 그들은 질병 치료제 연구를 위해 증류보다는 침전, 잔류물 연구에 주목했으며(이는 화학 반응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온천수 성분을 식별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분 분석 체계로 발전하여 이후 보일의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화학적 의학철학자들이 갈렌주의자들과 벌인 광범위한 논쟁은 화학을 의학에 도입하는 데 있어 중심적 역할을 했다. 안티몬을 하제로 사용해도 되는지의 여부에 대해 파리 의학자들과 화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플루드는 소우주/대우주 사이의 조화를 믿었고, 그는 자연 이해에 있어 수학의 역할에 대해 케플러와 논쟁을 벌였다. 그는 메르센느와도 논쟁을 벌였으며, 새로운 연금술은 종교적, 철학적, 신학적 문제들을 다루지 않아야 한다는 메르센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가상디와도 논쟁했는데, 가상디가 갈렌의 혈액 이론을 믿었던 반면 플루드는 가상디가 갈렌의 체계를 증명하지 못했다고 대응했다. 플루드와 케플러, 메르센느, 가상디 사이의 논쟁이 17세기 과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는 것이 데부스의 생각이다.

  

   파라셀수스주의자들은 제도권 교육의 개혁을 주창했으며,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데 화학적 지식은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시도한 교육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화학의 의학적 가치가 널리 인정되었고, 유럽 대학의 의학부에 화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화학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이 진정한 기독교적 철학이라 주장하며 아리스토텔레스, 갈렌의 철학과 대비시켰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티즘과 관련이 되었으며, 1632년에 파라셀수스의 대부분의 저작들은 금서 목록에 포함된다. 연금술은 화학 자체가 발전하는 데에도 특별한 기여를 했다. 화학이 당대의 종교적정치적 측면과 맺었던 관계, 화학철학자들의 저작이 보일과 뉴턴에게 미친 영향, 18세기 전반기까지 과학에 파라셀수스와 연금술적 전통이 미친 영향 등을 지적하며 저자는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