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1: 들어가며

강형구 2016. 4. 7. 07:07

 

원자와 우주

현대물리학의 세계상

한스 라이헨바흐

 

에드워드 엘런 옮김

 

뉴욕, 조지 브래질러 출판사

1957

 

저작권은 1933년 맥밀런 컴퍼니에 있음

이 책의 독어판 원본인 원자와 우주1930년에 출판되었다. 저자의 도움으로 교정되고 최신화된 영어판의 초판이 1932년에 출판되었다. 뉴욕의 조지 브래질러 출판사가 미국판을 출판했다.

 

저자 서문

 

   이 책에서 제시된 현대물리학에 대한 설명은, 필자가 1929~30년 사이의 겨울 동안 베를린에서 진행한 라디오 방송 강연을 발전시킨 것이다. 필자는 이 강연들을 통해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물리적 지식을 전달하고자 했다. 청중이었던 비전문가들이 물리학의 문제들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필자는 청중들의 여러 요구들에 부응하기 위해서 기꺼이 방송 강연을 책으로 만드는 이 작업에 동참했다.

  

   방송 강연을 책으로 만들면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고, 여러 곳에서 설명이 보강되었으며, 많은 곳에서 삽화나 사진의 도움을 받았다. 말로 한 내용과 글로 쓰인 내용은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이가 말로 한 강연 이후에 쓰이는 글로 된 텍스트를 차별화시킨다. 필자는 가급적이면 이 책에서 방송 강연과 글로 된 텍스트가 갖는 이점들을 모두 취하고자 했다.

  

   이 책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을 전제하지 않고, 그러한 지식을 제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책은 물리학자가 사고하는 방법 및 물리학자의 연구 성과가 함의하는 일반적인 세계상에 대한 통찰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의 물리학 이론들이 어떻게 하나의 세계상 안에 통합되었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한스 라이헨바흐

베를린

19307

 

옮긴이 서문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협력해야 할 시기가 왔다. 이러한 협력이 철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이 시기에, 이 책을 영어권 독자들 앞에 선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과학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 두 분야 모두에서 잘 훈련되었으며, 두 분야의 협력을 통해 그 두 분야를 더욱 더 발전시키려는 중요한 연구자들의 모임 중 한 명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원자와 우주, 비전문가들이 충분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철학과 자연과학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한 책이 아니라 물리학에 대한 책이지만, 이 책의 모든 장들 속에서 철학적 유형의 사유를 살펴볼 수 있다.

  

   라이헨바흐 교수가 서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이 책은 베를린에서 행해진 방송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당시 독일 방송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으며, 그만큼 독일 청중들이 수준 높은 방송을 요구했다는 것에 대한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옮기는 도중에, 나는 원저자로부터 소중하고 기분 좋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 라이헨바흐 교수의 도움으로 원본의 많은 부분을 수정할 수 있었으며, 특히 과학의 최신 발견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만약 나의 번역이 어느 정도 쓸 만하다면, 그것은 번역 전체를 원본과 비교해가며 거의 매 페이지에 대해 소중한 비판을 해준 나의 아내 미니 앨런의 덕택일 것이다.

 

1. 들어가며

 

   이 책은 현재 인류가 갖고 있는 물리적 세계관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선 이 책의 목적과 의도 및 책의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일선에서 직접적으로 성과를 얻고 있는 과학자 본인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연구 성과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을 특별히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매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직장에서 일하다가 고작 몇 시간만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직장에서의 업무와 휴가 기간 동안의 휴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적 연구 성과들이 당연하다고 여겨질까?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일들을 하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데 익숙해져 있고, 과학적 원리들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현대 과학의 성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현대 물리학처럼 복잡한 수식과 굉장히 전문적인 지식들로 가득 차 있어, 비전문가로서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 과학의 성과들을, 과연 직접 과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일반인들도 현대 과학의 성과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 책을 통해서 모든 자연과학들 중에 가장 접근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물리학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해보려 한다. 필자는 자연과학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에게는 복잡한 수학 공식이나 실험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과학적 성과의 최종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굳이 그러한 정교한 도구들이 필요하지 않다. 더 나아가 필자는 비전문가들이 과학의 성과에 대해서 성찰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관점의 폭을 놀라울 만큼 증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도 현대 과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필자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는, 여러분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며 확인해주기를 바란다. 다만 과학에 대한 성찰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는 필자의 두 번째 생각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인간에게는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며,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들 중 하나다. 물론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 중요한 행위들 중 대부분은 가치 판단과 관련되어 있으며, 과학은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태도와 과학 사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삶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심리적인 상호 관계가 있다. 실재에 대해 지식을 얻고 그에 관한 법칙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게 되며 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인식론자들 뿐만 아니라 윤리학자와 도덕론자들도, 세계를 기술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 이론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이론 체계를 전개해나간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를 한 번 생각해보자. 그는 종교를 통해 세계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태도를 확립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인식론적인 체계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체계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들은 실체나 법칙 등과 같은 자연철학적인 개념들이었다. 씩씩한 웅변가이자 설교자였던 피히테는 어떤가? 그는 그의 철학을 “AA이다라는 자명한 명제로부터 순수하게 논리적으로만 전개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좀 더 위대한 인간을 예언했던 니체를 떠올려보자. 그의 철학이 매우 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 또한 순수하게 인식론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토대란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발전하며 세계의 모든 것은 영원히 회귀한다는 인식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사상 체계들 모두가, 그 인식론적 바탕과 윤리적 상부구조 사이에서의 훌륭한 합치를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그와는 상반되게, 실재의 본성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만으로는 세계에서의 우리의 실천적 행동이나, 가치 혹은 태도에 대한 결론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다만 그 둘 사이에는 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연관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스피노자가 감동적으로 천명하는 것처럼, 자연법칙의 결정론적 성격으로부터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법칙을 찬양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요구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등 동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화해왔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근거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더 나은 인간(초인)을 탄생시키는 데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도 심리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자연과학에서의 위대한 발견이 그 시작에서부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입지를 해석하는 토대를 제공해왔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정신적 혁명의 상징으로서 남아 있다. 철학 일반에 코페르니쿠스적 위기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바로 그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그다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발견은,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도는지 아니면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지를 문제 삼는 천문학에만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발표된 최초의 시기부터, 이 발견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지구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발견에 의하면 이제 더 이상 지구는 유일한 세계가 아니었으며, 지구는 수많은 항성계들 중 하나에 속한 작은 행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인간의 입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인간이 외부 세계를 대하는 반응과 과학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학이 다양한 종류의 실제적 지식들을 하나의 거대한 관점으로 통합할 때마다, 과학은 인간이 삶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적 태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런 까닭에 일반인들은 항상 과학적 연구 성과에 큰 관심을 가져 왔다. 일반인들이 과학적 지식 그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각 운동량의 발견과 곤충의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이 물리학자와 동물학자를 흥분시킬지도 모르겠으나, 과학의 세세한 내용은 일반인에게는 그의 일상생활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과학에 의해 밝혀진 전체적인 세계상이며, 그러한 세계상에 대한 체험이 일반인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최근 들어 과학적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열망이 예전보다 강해진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과학적 사유 방식에 있어서 어떤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했다는 소문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으며,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조차도 과학에 무엇인가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세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상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과학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들의 과학적 성과가 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전형으로 취급되는 것을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말이다. 과학자들이 현재 자신의 분야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굳이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의 수학적 혹은 실험적 성과들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상이 현재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앎을 상식적인 세계상이라고 한다면, 이 세계상은 무게가 있으며 특정한 운동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물질들에 관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그러한 물질에 관한 법칙을 토대로 나무, , 돌 등을 가지고 여러 가지 도구나 기계들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라는 세 가지 상태를 가질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토대로 뜨거움과 차가움, , 색깔, 소리 등을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에 덧붙여 우리는 전기 현상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전기 현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이 현상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우리는 전기 현상의 추상적인 성격을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전기는 발전기에서부터 생성되어 도선을 따라 흐르며 방을 밝히는 데 사용된다. 우리는 또한 상식적인 세계상을 통해 우주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다. 우리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에는 별자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전체 우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행되고 있는데 이 시간과 공간의 특성은 물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우리는 역학과 기하학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서술하는 기본적인 법칙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소박한 관점에서부터 과학에 의해서 밝혀진 새로운 세계상을 접하게 되면, 마치 마술에 놀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들이 우리의 상식과는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계상에서는 기존의 세계상에서처럼 균일하게 채워져 있는 물질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서로의 주위를 격렬하게 회전하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있을 뿐이다. 겉보기에는 아주 고요하고 깨끗한 호수의 표면도, 과학자들이 제시한 세계상에 따른다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수많은 입자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명료하게 구분되는 호수의 표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공기 사이에 경계가 모호한 변경지대가 있을 뿐이며, 그 영역에서는 물 입자들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공기 중에서 물 입자들이 호수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강 또는 바다 위에 세워져 튼튼하게 떠받치는 안정된 철제 교각마저도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매가 많은 나뭇가지가 숱한 곁가지들과 함께 떨리는 것처럼, 그 구조를 이루는 입자들이 혼란스럽게 흔들리며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입자들은 서로 확고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일정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하는 상호 인력에 의해서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차가 철제 교각 위를 지날 때에는 바퀴와 철로가 서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하는 입자들로 이루어진 두 계가 상호간의 반발력 때문에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접근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듯 요동하는 입자들의 다발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는 빛이나 색깔, 소리 등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빛이나 색깔, 소리는 서로 다른 진동수로 진동하는 입자들의 다발일 뿐이며,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전기적인 현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에너지와 물질 사이의 구분도 의문시되고 있다. 실제로 에너지와 물질은 본질적으로 같으며, 깊이 따져보면 질량은 전기적 현상의 복합체일 뿐이므로, 이 모든 세계가 전기적 현상들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요동하는 입자들의 세계를 기술하는 법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들에 적용되는 법칙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일상 세계의 법칙은 본질적으로 더욱 복잡한 입자 세계의 법칙을 평준화 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며, 아주 많은 개별 입자들이 집합해 있는 까닭에 일상 세계의 법칙이 그렇듯 단순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간과 시간의 법칙을 살펴보면, 이 법칙은 세계에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법칙이면서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공간은 휘어있고,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다르며, 직선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며, 서로 동떨어진 두 공간 사이에서 시각을 비교할 경우에는 판단의 불확정성이라는 이상한 특성이 발생한다.

  

   물론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을 일반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믿기란 힘든 일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관찰 속에서는 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이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과학은 어떻게 그토록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일까? 과학자들의 그런 결론은 어쩌면, 쉬운 일을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려고 하는 사색적인 악취미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대체 과학은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에 대한 상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상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실제로 과학자들은 사색에 대한 열광 때문에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과학자들은, 길거리에 걸어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토록 복잡한 세계상을 얻게 되었다면, 그 까닭은 그들이 세계를 소박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들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상적인 현상들에 관해서만 이해하고자 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만 그 현상들에 대해 이해하려고 한다. 반면 과학자들은 현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현대 물리학적 지식과 사고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과학자들만의 정보원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로, 과학자들은 단순한 감각 지각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 정확한 관찰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냥 눈으로 볼 때에는 균일하며 특별한 구조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물질도, 현미경을 사용하면 아주 미세한 구조까지 파악할 수가 있다. 맨눈으로는 그저 점처럼 보이는 천체들도, 망원경을 사용하면 그 형태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현대의 측정 기술은 25백만 분의 1인치의 길이와 수 천 분의 1초의 시간을 식별할 수 있으며, 현대의 검류계는 백열등을 통해 흐르는 전류의 25백만분의 1에 해당하는 전류를 감지할 수 있다. 이렇듯 관찰기구의 정확도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우리의 감각기관 만으로 인식하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과학적 지식의 두 번째 원천은 실험이다. 과학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와는 반대로, 과학자들은 인위적인 간섭을 통해 자연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환경 속에 노출시킨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강철 막대를 비비꼬고 구부려 봄으로써 강철 막대의 강도를 파악하게 된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얼핏 보면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물속에 전류를 흘려 넣어, 물을 그 구성 요소들로 분해한다. 또한 그들은 진공관 속에서 전류를 흘려 봄으로써 전류의 진정한 특성을 발견한다. 그들은 특정한 영양 성분이 결여된 토양 속에 식물 한 종을 심어서 그 식물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관찰하기도 한다. , 자연적인 조건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엄청나게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저 기다리고 있기만 한다면 전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법한 많은 사실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의 세 번째 원천은 관찰된 결과들에 대한 수학적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기체를 좁은 공간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에 따라 압력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는 더 나아가, 부피와 압력 사이에 어떤 수치적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만약 이런 관계를 발견했다면, 과학자는 온도를 추가적인 변수로 활용하여 기체에 관한 좀 더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문학자들은 천체의 운동을 수치적이고 수학적인 공식을 통해 표현하려고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전파 수신을 위한 증폭관에서 전류와 전기저항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는 수학적인 측면에서 연구된다. 자연에 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양적 이해는 우리의 지식을 더 정확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을 법한 새로운 관계들을 밝혀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대표적인 예로, 현대 화학에서 원자 이론을 도입하게 된 것이 원소들의 질량을 양적으로 측정한 데에서부터 그 주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원천은, 현대 자연과학이 훌륭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사실들 전체를 꿰뚫는 이성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단순히 특수한 법칙들이 많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특수한 법칙들의 수를 줄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전제들을 토대로 사실들의 복합체를 최대한 많이 파악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설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과정이다. 설명 또는 이해는 결론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원리를 통해서 현상들을 통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아주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예를 들자면, 뉴턴의 보편중력법칙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케플러의 법칙들을 하나의 단일한 공식으로 통합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위에서 기술했던 수학적인 방법이 없다면 이러한 과정이 가능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사실들 전체를 이성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연구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직 이 과정만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세계상을 종합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원천에 근거한 과학적 지식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조잡한 세계상과는 다른 세계상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과학적 지식과 일상적 상식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우주에 대한 과학적 상과 일상적 상 사이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존의 상식적 세계상과 과학에 의해 밝혀진 새로운 세계상 사이의 차이가 단지 지난 세기에만 적용되었던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20세기에도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 사이에서 아주 높은 수준의 충돌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소박한 세계상과 과학적 세계상 사이에서 강력하고 놀랄만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인간의 지식 개념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자연 이해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해볼 수 있다.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일상적 차원의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를 가진다는 사실을 현재의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다. 거시적 우주 차원에서 자연법칙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이론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우주가 비유클리드적인 구조를 가지며, 우주적 차원에서의 동시성 개념은 임의적 규약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지상에서 사용하는 데 익숙한 측량도구나 시계를 그대로 우주적 공간에서 사용하게 되면, 기존에 알고 있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간-공간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시적 세계에 대한 기술은 무엇보다도 양자이론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미시적 세계에서는 거시적 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연속성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것을, 더 나아가 일상적 차원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자연법칙의 엄격한 인과율이 미시적 세계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세계상의 변화를, 기존에 우리가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념들에 단순히 새로운 내용들을 덧붙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비교적 하찮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 주변을 조밀하게 채우고 있는 물질들과는 달리 거시세계에서는 넓은 공간에 비해 물질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미시세계는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큰 물체들의 연속적인 특성은 그저 겉보기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점 등은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사실 지구 곳곳의 먼 나라들에서 들려오는 사람과 사물들에 대한 소식들은 이상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이상한 소식들이 그럴 듯하게 설명된다면 그 사실들을 믿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그 여행자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친숙하게 여겨지며, 인간 본성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어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들과는 상반되는 내용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로서는 그 이야기를 쉽게 믿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먼 나라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소식들이 수많은 증인들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는다면, 원시 민족의 성적 관습이나 원시 민족의 소유에 대한 규제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현대 물리학의 발견은 기존에 존재하던 개념들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것뿐만 아니라, 그 개념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개념들을 재구성했다. 우리가 가진 개념들 자체가 일상적(혹은 중간적) 차원에만 적합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개념들도 거시 세계로 확장되면서 변형을 겪어야 했으며, 물질과 자연법칙에 대한 개념 또한 미시 세계로 확장되면서 변형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우리가 중간적 차원에서 발전시켜왔던 개념들은 단지 근사적일 뿐이며, 그 개념들은 오직 일상적 차원의 크기 영역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이제는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가져온 위기와 비견될 만한 엄청난 충격을 준다.

  

   이전까지의 자연과학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개념들은 오직 중간차원에서만 유효하다는 인식은, 우리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적 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지구 또한 그와 유사한 많은 천체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면, 현대 물리학은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세계에 대한 이전 시대의 개념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초적인 개념들과 기초적인 범주들의 세계는,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이 소속된 차원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아주 협소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미시세계와 중간세계 및 거시세계 모두를 포괄하는 과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좀 더 일반적이고 심오한 근본적인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물리학의 이러한 측면들을 염두에 두면서, 뒤따라 이어지는 장들에서 현대 물리학에 대한 일반적인 윤곽을 그려보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과학이 비전문가에게 줄 수 있는 장점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현대 물리학에 함축되어 있는 일반적인 경향이 무엇인지를, 우리 세대가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가지는 데 현대 물리학이 얼마나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으며, 오직 이러한 요소만이 비전문가들에게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의 물리학은, 뒤따르는 모든 논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중요성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