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3: 시간

강형구 2016. 4. 17. 07:43

 

3. 시간

 

   우리가 시간의 문제를 공간에 문제와 비교해보면, 우리는 시간이 인간 존재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점을 금세 알게 된다. 시간은 공간에 비해 인간의 내적 정신과 더 긴밀하게 얽혀 있다. 비록 우리가 인간을 시간과 공간 속의 존재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시공간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정신의 흐름은 공간적인 연장 속에 포함되지 않은 채 시간적 질서에 따라서만 흘러간다. 따라서 우리의 내적 삶 전체를 통틀어 우리는 시간의 흐름 한 가운데 서 있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를 관통해서 흘러가는 듯 보이며, 우리는 “~이전에”, “~이후에”, “지금”, “~형성되다와 같은 시간적인 기초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느낀다. 이렇듯 우리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우리 경험 세계에서 발생하는 시간적인 사건들을 즉각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조와 색깔과 같은 임의적인 두 개의 감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우리는 둘 중에 어떤 감각이 먼저 일어났는지, 둘 중 어떤 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때 이 감각에 대한 공간적 판단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은 그것의 흐르는 특성과 방향 지어진 경로로 인해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며, 물리학 즉 객관적 사건들의 세계에서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려는 우리들은, 물리적 시간에서도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시간의 속성들을 다시 찾아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물음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물리학자들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에만 스스로를 붙잡아 두지는 않는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물리학자에게도 시간은 일종의 펼쳐지는 과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해 물리학자들이 탐구하는 문제들은 소박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물리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측정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시간 개념에 대한 모든 비판적인 고려들은 시간의 측정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량적인 것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의 결과, 물리적 시간을 주관적 시간과 구분하려는 바람이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다소 과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시간의 측정 문제는 물리학자가 제기하는 시간에 대한 유일한 물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는 시간의 방향과 시간의 순차적 본성 문제에 대해서도 익숙하다. 다른 한편, 측정의 문제라는 판단 기준은 시간 개념의 실질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것에서 근본적인 진보를 가져다주었다.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우리는 물리-인식론적 방법이 모든 다른 소박한 철학적 반성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물리적 시간의 의의라는 우회로를 통해 우리는, 시간 경험에 대한 단순한 반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시간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개념에 대한 상대론적인 비판이 제시된 이후, 오늘날의 우리는 시간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제 물리학에 의해서 시간 개념이 어떻게 수정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리적 비판은 시간의 측정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물리학자에게 시간은 정확히 균일하게 흘러간다. 시간은 동일한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물리학자는 아주 정확하게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는 특별한 도구를 발명해냈다. 시간 간격에 대한 우리의 주간적인 감각은 매우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도구는 필수적이다. 어떤 것이 우리의 의식을 채우는지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시간의 흐름이 매우 빠르며 어떤 경우에는 시간의 흐름이 매우 느리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따라서 공간에서처럼 시간에서도 객관적 측정의 필요성이 생긴다. 공간에 대한 측정 역시 극도로 변동이 심하며 우리의 심리적 상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시간 측정의 도구는 시계라고 불린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일반적인 시계를 통해서는 시간을 궁극적으로 측정할 수 없고, 시계는 반드시 설정되고 시험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측정의 실질적 기초에 대한 별도의 물리적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천문학은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천문학자들은 천체들의 운동 속에서 선호할 만한 시계를 발견했고, 천체들의 운동에 따라 지상 물체들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천체 시계가 이상적인 시계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천문학자가 천체의 주기적인 현상을 시간 측정을 위해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곧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천문학자는 자신이 참고하는 표준 천체가 태양인지, 달인지, 행성인지, 항성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천문학자는 이러한 가능성들 중 하나인 항성을 선택했고, 항성 시간은 아주 정확한 시계였다.

  

   그렇다면 왜 천문학자는 태양 시간이 아닌 항성 시간을 선택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은 태양이 불규칙한 운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가 타원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에 궤도상에서의 지구의 위치에 따라 정오와 정오 사이의 시간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태양 시간을 항성 시간과 비교함으로써 이 사실을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우리는 태양일이 동일한 길이를 가지고 항성일이 변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앞선 장에서 공간의 측정에 관해 고려할 때 마주쳤던 문제들과 비슷한 종류의 문제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위 물음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선분 길이의 동일성에 관한 물음과 이상하리만큼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는 그러한 질문의 실질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에 애초에 질문이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즉 공간 측정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규약의 문제라는 것을 밝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도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시간 간격이 동일한지의 여부는 경험적 방법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에 대한 판단은 궁극적으로 규약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동등화 정의의 개념이 시간 측정의 해결을 위해서도 필요해진다. , 시간 간격 사이의 동등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동등화 정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천문학자들이 임의적 동의를 통해서만 시간 측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왜 그들은 시간을 측정하는 데 그토록 막대한(prodigious) 노력을 기울이는 것일까? 이와 같은 반론은, 비록 시간 측정을 확립한 이후라고 하더라도 천문학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모든 작업들이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 천문학자들이 복잡한 시간 측정으로부터, 천문일과 태양일 및 시간 방정식에 대한 계산으로부터 얻는 것은, 서로 다른 유형의 기간들 사이의 비율(ration)이다. , 지구가 태양 주변을 회전하는 시간, 지구 자체의 회전 시간, 지구 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는 시간 등과 같은 기간들 사이의 비율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기간들 중 하나를 시간의 정의로서 명명하고 이 기간을 균일하다고 부른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이러한 기간들 중 어떤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서 기간들 상호 간의 비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여기서 동등화 정의들의 논리적 적용은 공간의 경우가 동일하다. 정의하는 역할을 하는 규약이 객관적 비율의 결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규약은 이와 같은 결정에 흠잡을 데 없는 기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시간 흐름에 대한 모든 측정은 하나의 비교이다. 그러나 이 비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공허하면서도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모형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실제로 존재하는 간격들 상호간의 비교이다. 상대성의 개념은 측정 문제와 같은 이와 같은 분석으로 우리들을 이끌었다. 절대적 이론이 객관적 균일성이라는 허구에 기초했던 것처럼,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진술 역시 실제로는 달성하기 불가능하다. 시간 간격들 사이의 비교만이 객관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동등화 정의의 개념을 통해서 의미하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천문학자들의 균일성과는 다른 종류의 균일성을 도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탑 위에서 떨어지는 돌이 균일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구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느려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한 정의가 틀린 것은 아니며, 이것은 단지 측정 기준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의가 두 과정이 갖는 속력의 객관적 비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떨어지는 돌이 회전하는 지구와 비교할 때 가속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지구가 균일하게 움직이고 돌이 가속 운동을 한다고 말하거나, 돌이 균일하게 움직이고 지구가 지연된다고 말할 때 모두 타당하다. 동일한 상황을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은 오직 기술의 형식에서만 차이를 가질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동일하다.

  

   이와 같은 논증 속에서 우리는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는 절차에 이르렀다. 실재에 대한 진술들은 오직 이 진술들이 실제 대상들에 대한 진술들로 번역될 수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세계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지칭할 때는 유령적인 성격을 갖는 관념적인 개체, 예를 들어 스스로 지속해나가는 절대 시간 혹은 절대 공간을 지칭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지칭은 원칙적으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시간 측정에 대한 물음의 내적인 본질을 알려주는 최종적인 설명에 이르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간 간격들 사이의 비교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간적 질서에 대한 보다 기초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 시간에는 일련의 이어짐이 있어, 사건들은 보다 이르거나 늦다는 개념에 따라서 한 줄로 늘어설 수 있으며, 이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상대론적 교리에 대한 비판자들 역시 이 물음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실제로 시간 질서의 바탕에 인과성의 개념, 즉 모든 사건들의 인과적 연결 개념이 깔려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이 주장을 좀 더 정확하게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사건들의 연결이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기초적인 사실이며, 아마도 가장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이용하는데, 실제로 시간의 계열을 확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종종 이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거리에서 신문지로 싸인 소포를 하나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 소포가 신문이 출간되기 전에 분실되지는 않았음을 안다. 왜냐하면 우선 신문이 출간된 이후에야 비로소 출간된 신문으로 소포를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는 신문의 생산으로부터 소포의 포장에 이르는 인과적 사슬이 있다. 이 인과적 사슬은 역 방향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화를 건다면, 우리는 숫자판에서 전화번호를 선택하는 행위가 전화보다 먼저 일어났음을 안다. “번호를 선택한다는 사건과 통화음을 듣는다는 사건의 시간적 질서는 오직 전자의 사건이 후자의 원인이 되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결정된다. 우리가 두 사건들 사이의 인과적 질서를 인식할 때마다(, 우리가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지를 알 때마다), 사건들의 시간적 질서는 고정된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상대론적인 교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게 된다. 우리가 시간 계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인과적인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동시성의 물음에 직면해 있고, 이때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동시성 즉 우리의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서 동시성을 판단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인과적 사슬이 우리로부터 그곳의 사건들에로 확장되어야 한다. 시간을 비교하는 일은 이렇게 확장된 인과적 사슬로부터 시간과 사건의 상대적인 위치 및 인과적 사슬 자체에 대해 갖게 된 우리의 지식을 추론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에 대한 예를 제시해보자. 만약 멀리 떨어져 있는 숲에서 대포가 발사되었고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대포가 발사되었음을 알았다. 만약 우리의 귀에 대포 소리가 도달한 시각으로부터 대포가 발사된 시각을 추론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소리의 속도 및 소리가 통과한 경로의 길이가 발사 시간을 알려준다는 지식에 기초해서 계산을 해야 한다. 이는 빛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참이다. 원리상 빛은 전달 신호로서 최상의 것이다. 그러나 빛이 소리 신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빛 역시 전파되기 위해서는 특정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시간은 정밀한 측정 또는 장거리와 관련된 측정에서는 무시될 수 없다. 밤하늘에 갑자기 새로운 별이 밝게 반짝였다면, 우리는 이러한 반짝임이 수백 년 전 또는 수천 년 전과 같이 아주 오래전에 일어났음을 안다. 천문학자는 그 반짝임이 일어난 시각을 계산하기 위해서 별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사용해야 하며, 계산 결과 실제로는 별의 반짝임이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 일어났지만 빛의 제한된 속도 때문에 오늘날에야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의 동시성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결정되어야만 하며, 여기에서 인식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잠시 동안 우리가 화성과 전화로 통신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전화 통신을 위해 우리는 일상적인 무선 전신 파동 또는 빛의 파동을 사용할 것이다. 이 때 우리가 사용하는 전파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후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두 종류의 파동 모두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으며 둘 다 동일한 속도로 전파해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로부터 화성에 있는 시계를 맞추고자 한다. 우리는 화성에 전화를 걸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시각은 12시이다.” 만약 화성에 거주하는 사람이 우리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시계를 맞추는 것처럼 그의 시계를 12시로 맞춘다면 그는 큰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빛이 지구로부터 화성에 도달하는 데는 8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간을 무시할 수가 없다. 지구 위에서는 거리가 짧기 때문에 이 시간을 무시해도 괜찮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화성 거주자가 우리의 메시지를 듣고 그의 시계를 128분으로 맞춘다고 하자.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나는 나의 시계를 128분으로 맞춘다.” 우리가 화성 거주자의 대답을 들을 때 이미 우리의 시계는 1216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화 메시지가 도달했을 때의 시각을 화성 거주자가 128분으로 판단한 것은 올바른 일이었을까? 그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12시부터 1216분까지의 시간 간격 사이에 지구에서 벌어진 사건들 중에서 어떤 사건이 화성에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의 시각에 대응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건이 지구에 있는 우리의 시계가 128분을 가리켰을 때의 사건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에 대해서 우리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128분에 우리가 재빨리 전화를 걸어서 나의 메시지가 지금 당신에게 도착했나?”라고 묻는다고 해도, 화성 거주자는 이 질문을 한참이나 늦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물음에서 지금이라는 단어는 큰 의미가 없어진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가 12시보다 늦게 도착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전에 들었던 예에서 전화번호의 선택이 전화의 도착에 앞선다는 것을 살펴본 것과 같이, 원인과 결과의 원리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 우리의 메시지가 화성에 도착했고 화성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출발한 시각은 1216분 이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메시지가 화성에 도착한 순간에 12시와 1216분 사이의 시간 중 어떤 시각을 할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빛이 지구로부터 화성까지 이동하는 시간과 화성에서 지구로 돌아오는 시간은 동일하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빛의 화성 도착 시각을 128분으로 명명해야 하지 않는가? 만약 우리가 빛이 전파되고 돌아오는 동안의 속도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그와 같은 방식으로의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속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 전파될 때는 돌아올 때의 속도보다 2배 더 빨랐다고도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빛의 화성 도착 시각은 128분이 아니라 12520초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빛이 전파되고 돌아올 때의 속도를 측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화성의 시계가 우리의 시계에 의해서 이미 맞춰져 있고, 화성에 전화를 걸어 우리의 메시지가 화성에 도착했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속도는 두 점에서의 동시성이 이미 정의된 상황에서만 측정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동시성 그 자체는 속도의 측정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가 화성에 도착하는 시각이 12시와 1216분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 밖에 알 수 없다. 이 시간 간격에 어떤 순간들이 할당되어야 하는지는 미결정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논증으로부터 상대성이론은 12시와 1216분 사이의 그 어떤 순간도 빛의 도착 시간으로 임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을 연역했다. 이는 특정한 사건들이 갖는 객관적인 의미의 시간 순서가 결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지구의 시계가 1210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지구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사건이 우리의 메시지가 화성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을까 후에 일어났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메시지가 화성에 도착하는 시각을 128분으로 설정한다면 이 사건은 화성 도착 이후에 일어난 것이고, 메시지의 화성 도착 시각을 1212분으로 설정한다면 이 사건은 화성 도착 이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우리는 동시성의 상대성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양상의 추론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제기되어 세상의 주목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추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시간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의 이와 같은 임의성이 우리의 직접적인 관측 경험과 상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선택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시간에 대한 모든 종류의 객관적 측정은 불가능해지며 과학적 이해와 지식의 진정한 의미는 훼손될 것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개념들이 갖는 불완전함에 의해, 전통적인 개념들 역시도 상대론적 시간 이론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에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은, 마치 우리가 우리 근처에 있는 사건들에 즉각적으로 시간 순서를 부여할 수 있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에게도 즉각적으로 시간 순서를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들의 시간을 비교하기 위해 우리는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시간 개념을 사용하며, 이러한 새로운 시간 개념은 시간과 공간의 상대론적 이론이 인과적 질서 위에 시간을 수립했을 때야 비로소 밝혀졌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동시적이라고 특성화할 때, 사실 우리는 시간의 인과적 이론을 통해서만 정확하게 공식화할 수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우리는 그와 같은 두 개의 사건들 사이에 그 어떤 인과적 관계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을 했고, 동일한 순간에 자신의 집에 있던 그 친구 역시 나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각자의 집에서 출발했고, 이러한 출발의 동시성은 출발 이후 우리의 행위가 더 이상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만나러 갈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건다고 해도, 집을 떠난 그는 더 이상 집에 없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나에게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성은 인과적 관계의 배제를 의미한다. 이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과적 정의와 정확하게 대응하는데, 이 정의에 따르면 시간적 연속(temporal succession)은 정확히 (그 반대인) 인과적 사슬(causal concatenation)을 의미한다. 지구와 화성에 있는 것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사건들을 비교하고자 할 때는 일종의 불확실성이 발생한다. 화성에 메시지가 도착하는 사건은 지구 위에서 12시와 1216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 어떤 인과적인 연관도 맺을 수 없다. 따라서 화성에 메시지가 도착하는 사건에는 이 간격 동안에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의 그 어떤 객관적인 순서도 할당되지 못한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인과적 이론을 통해서야 비로소 동시성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는 절대적 시간 이론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상대론적 이론의 발전은, 어떻게 자연과학의 점진적인 인지적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이성의 구조에 대한 사변(speculation)과 관조(contemplation)를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개념적인 발견에 이르도록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 시간적 연속, 균일성, 동시성 등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직 자연에 대해 구체적인 탐구를 할 때야 비로소 그는 그의 개념들을 실제로 적용하는 임무에 당면하며, 그는 그가 이전에 가졌던 개념들의 불충분함을 확인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학습 능력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패를 하더라도 멈춰 서지 않고, 스스로의 학습 능력을 발휘하여 집요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실패한 근거들을 밝혀낸 후, 최종적으로 자연에 부합하는 좀 더 새롭고 분명한 개념들의 세계를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러한 개념 세계를 충분히 숙고한 후 이 세계에 진정으로 익숙해졌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세계가 이상하며, 추상적이고, 시각화하기 어렵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집요한 사고가 우리에게 완전한 이해라고 부르는 궁극적인 이해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