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4: 운동의 상대성

강형구 2016. 4. 25. 05:54

 

4. 운동의 상대성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그 이름을 본뜬 운동의 상대성 개념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험해 본 다음과 같은 단순하고 생생한 경험을 그 근원으로 갖는다. 모든 사람들은 기차 안에 앉아서 자신이 탄 기차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옆 선로에 있는 기차가 그 때 마침 움직이기 시작해서 마치 자신이 탄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경험은 주변에서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리 위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리가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풀밭 위에 누워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 구름은 멈춰 있고 나뭇가지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우리의 감각에 아주 믿을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다른 사물들을 바라봄으로써 이와 같은 경험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와 다리와 나뭇가지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실제로는다른 기차와 흐르는 물과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분명 이러한 결론은 쉽게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어느 순간엔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렸을 것이 틀림없다. 대체 어떤 근거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착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대체 어떤 근거로 한 사물이 실제로움직이며 다른 사물은 실제로정지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한 번 떠올리게 되면 더 이상 이 질문을 무시할 수 없게 되며, 점점 심각한 강도를 띠는 이 질문을 되풀이해서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 이 질문의 특징이다. 물론 우리가 기차역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탄 기차가 기차역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의 기차가 아닌 다른 기차가 실제로 움직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신빙성 있는 논증일까? 어떻게 우리는 기차역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탄 기차와 기차역 모두 움직이고 있는 계이며, 다른 기차는 진정으로 멈춰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우리의 이전까지의 경험이 기차역은 움직이지 않음을 가르쳐 주었다고 반론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예전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가 좀 더 자세히 확인해보면, 우리는 그 경험 역시도 지금 문제가 되는 경험과 동일한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기차역이 정지해 있고 다른 사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주의를 움직이는물체들에 고정시켰다면 우리는 손쉽게 정 반대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 위에 있는 다리에서의 경험에서 우리는 지구 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는 경험을 한다. 광학적 경험, 즉 눈으로 관측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참된 운동의 상태에 대해서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사례를 관측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경험으로부터는 이 사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추론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논리적인 관점을 도입하여 운동의 정의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되면 이와 같은 고찰은 더욱 더 설득력을 얻는다. 운동은 위치의 변화이다. 그러나 위치는 하나의 물체에 의해서만 고정될 수 있으므로, 운동이란 주어진 한 물체로부터의 거리가 변화하는 것이다. 이제 텅 빈 공간에 AB라는 두 개의 물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두 물체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 두 물체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관측한다. 그러면 이 때 둘 중에 어떤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가? 물체 A정지해 있고 물체 B“A로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하게, 물체 B정지해 있고 물체 A“B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기술(description)의 불확실성이 사실(fact)의 불확실성을 포함하지는 않음을 대번에 알게 된다. 왜냐하면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기술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은 정확하게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 모두 B상대적인 A의 움직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대적인 운동만이 여기서 실제로존재한다고 간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운동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운동은 오직 하나의 물체를 정지해 있다고 선택한 이후 이 물체를 지칭함으로써만, 기준계를 구체화한 이후에만 기술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의 개념은 오른쪽, 왼쪽과 같은 관계적 개념과 논리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 함부르크는 베를린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나 왼쪽에 위치해 있나? 두 도시가 관측되는 기준계에 따라서 두 주장 모두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에 관한 불확실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기준점에 대한 진술을 추가한다면, 이에 대응하는 기술은 객관적인 의미를 얻는다.

  

   따라서 직접적 관측 경험과 같이 논리적인 고찰 역시 운동의 상대성 개념으로 이끌며, 이러한 개념에 따르는 모든 귀결들을 도출해내고자 하는 상대성의 이론은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의 중에서도 18세기가 시작할 무렵에 등장한 논의가 특별히 유명하다. 두 명의 위대한 수리철학자인 라이프니츠와 뉴턴을 따르는 두 집단 사이에서 운동의 상대성에 관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라이프니츠는 상대성 개념의 지지자였다. 그는 뉴턴의 친구였던 신학자 클라크와의 서신교환에서 상대성을 지지했으며, 클라크는 라이프니츠에 대항하여 절대론적인 개념을 유지했다. 둘 사이의 서신교환 내용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등장한 현대적인 논의에서 등장한 많은 논증들을 둘 사이의 서신교환에서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대중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와 뉴턴 지지자 사이의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귀족 여성들이 운영하는 살롱에서도 라이프니츠와 클라크 사이의 서신교환 중 가장 최신의 내용이 대화 주제가 될 정도였다. 그 시절에도 분명 이 논쟁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 더 최근에 일어난 개념적인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절대적인 이론의 지지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 공간 이론의 의의는 이 이론이 상대성의 개념에 반하는 심오한 논증들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게 함으로써, 상대론적 관점의 지지자로 하여금 자신의 관점을 철저하게 파악하게끔 만드는 데 있다. 상대성의 새로운 이론은 라이프니츠의 개념들을 계승한 것에 의해서보다는 뉴턴의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더욱 더 발전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적 이론의 기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탐구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운동을 순수하게 운동학적인 과정으로 논의해왔다. 다시 말해, 운동을 공간적 거리와 시간 간격을 측정함으로써 완전히 특성화될 수 있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물체 AB 사이의 상호 거리의 변화로 운동을 보는 관점은 명백하게 운동학적이다. 그러나 운동의 과정을 보는 아주 상이한 방법도 있다. 우리는 운동학적 관점을 넘어 운동에서 작용하는 에 관해 물을 수 있으며, 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운동을 바라보고자 시도할 수 있다. , 힘에 의해 운동이 일어나며, 이 운동이 다른 힘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운동의 역동적 관점에 이를 수 있다. 절대적 이론은 이와 같이 운동을 역동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기초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동의하는 덜 숙련된 관측자의 경우, 처음에는 오해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힘에 의해 운동이 생성되는 것을 운동의 참된 상태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간주할 것이다. 기차가 움직이고 기차역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이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소박한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입장인데-은 기차를 움직이는 힘이 기차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기차역을 움직이고 싶다면, 기차역에 역을 움직일 수 있는 기계를 달아야 한다. 이와 같은 소박한 관측이 왜 그릇된 추론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지에 따라 하나의 계 혹은 다른 계에 힘을 생성하는 기계의 운동 상태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이블카의 선로는 지구에 단단히 고정된 증기기관에 의해 움직인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근본적인 원리에 따르면, 절대론자들은 케이블카 선로가 아닌 지구가 움직이는 계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절대적 이론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학자인 뉴턴은 이와 같은 단순한 고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유형의 고찰을 통해서 절대적 이론에 이르게 되었다.

  

   뉴턴은 운동을 생성하는 힘에 주된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운동에 의해서 생성된 힘을 강조했다. 이른바 관성력은 운동이 균일하지 않고 가속되었을 경우에만 발생한다. , 관성력은 속도의 변화(가속 혹은 감속)과 관련된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운동은 우선 기차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물체들에 옮겨져야 한다. 때때로 기차의 짐 가방들 중 하나가 관성 때문에가방들 사이에서 떨어지곤 한다. 뉴턴에 따르면 이와 같은 종류의 현상에서 우리는 기차의 참된 움직임에 관한 확실한 표지(indication)를 발견한다. 만약 기차가 가만히 서 있고 기차역과 지구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나는 분명 동일한 광학적 풍경을 볼 것이다. 하지만 앞서와 같이 짐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기차의 짐들에 관성력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짐 가방들 중 일부가 기차에 비해 뒤처지는 일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이와 같은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 회전 운동의 경우에 적용했다. 물리학자들은 등속 회전 운동 역시 가속 운동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운동의 방향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속 운동을 통해 발생하는 힘은 중심력이다. 모든 사람은 이 힘이 무슨 힘인지를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돌에 줄을 감고 빙빙 돌리려면 돌을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 회전목마에 타고 있으면 이 힘을 바깥으로 달아나려는 힘으로 느낀다. 이 힘은 회전하는 물체의 형태 변화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모든 사람은 회전하는 양동이에 있는 물의 중앙이 패이고 양동이 안쪽 부분에는 올라가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극점에서 지구가 평평해지는 것 역시 지구의 탄성적인 부분에 작용하는 중심력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는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여겨진다.

  

   위와 같은 고찰은 뉴턴이 제시한 절대 운동 원리의 근원이 되었다. 운동의 다양한 상태들은 오직 운동학적으로만 동등하며, 동역학적으로는 이 운동들 사이의 차이가 드러난다. 운동에 의해 생성된 힘인 관성력이 발생하는지를 판단함으로써, 상대적인 운동을 하는 두 물체들 중 어떤 물체가 진짜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턴의 고찰은 역학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 세기 동안 물리학자들의 머릿속을 사로잡아서 물리학자들은 상대론적인 물리학의 개념을 포기했다. 뉴턴의 절대적 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반대 논증은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했다. 이 논증은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에 의해서 제시되었는데, 그는 뉴턴의 공간 이론에 대한 그의 유명한 비판에서 이 논증을 발전시켰다.

  

   에른스트 마흐는 회전 운동에 대한 뉴턴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중심력이 발생하는 것이 절대적 회전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 간주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물이 양동이 주변을 돌 때 물 중앙이 팬다. 그러나 물을 가만히 두고 양동이를 돌리면 물이 패지 않는다. 이러한 고찰로부터 뉴턴은 물의 패임을 통해 물의 진정한 회전을 연역했다. 그러나 마흐는 양동이가 회전할 때 물이 패지 않는 것을 뉴턴이 어떻게 아는지를 되물었다. 물론 일반적인 양동이가 회전하면 물이 패지 않지만, 일반적인 양동이는 너무 얇다. 하지만 우리가 수 킬로 너비의 벽을 갖고 있는 양동이를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물 중심은 아주 조금 팰 것이다. 이제는 양동이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들, 즉 지구와 별들이 수놓인 하늘 역시도 물 주변을 회전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는 아마 물이 온전한 정도로 팰 것이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이미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실험을 시행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실험은 뉴턴이 설명이 적용되는 물의 회전 사례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움직이는 물을 정지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양동이뿐만 아니라 지구 및 전체 우주는 물 주변을 회전하게 된다. , 나는 관측되는 사실을 이러한 두 번째 방식으로도 기술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에 따른 결과인 물의 패임 역시 동일하다. 이제 우리는 양동이, 지구, 우주가 물 주변을 회전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 지를 안다. 우리가 정지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물에 힘이 작용해서 물 중앙에 패임이 발생할 것이다.

  

   이상이 바로 마흐의 핵심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우리가 힘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상대론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운동의 상대성 이론을 힘의 상대성 이론으로 확장한다면, 우리는 역학에서 운동의 상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뉴턴의 역학에서 중심력과 관성력으로 등장하는 이 힘은, 마흐의 이론에서는 우주에서 회전하는 질량에 의해서 유도되는 중력으로 나타난다. 이제 힘 역시 상대적인 개념이 된다. 물과 우주 사이에는 유일한 힘이 존재하며, 우리는 이 힘을 물 자체의 회전에 의해서 발생하는 관성적인 효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물 주변을 회전하는 우주의 질량에 의한 중력적인 효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기술은 오직 해석에 지나지 않으며, 동일한 역학적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술들일 뿐이다.

  

   갑작스럽게 중력의 역학적 효과에 도달하게 것이 독자에게는 놀라울 수 있겠다. 뉴턴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효과에 대한 설명이 없다. 뉴턴 이론은 오직 중력의 정적인 힘, 즉 물체들이 정지해 있을 경우에 작용하는 힘만을 다룬다. 그러나 질량을 가진 물체가 움직임으로써 다른 물체들에게 다른 종류의 힘을 가한다고 가정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효과를, 뉴턴의 정적 중력에 더해 중력의 동역학적 효과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전기현상을 통해 비슷한 종류의 두 현상에 친숙하게 되었다. 정지해 있는 전하는 힘의 정전기장을 형성하며, 이에 더해 움직이는 전하는 자기 현상을 통해 표현되는 전기동역학적 효과를 나타낸다.

  

   만약 우리가 상대론적인 개념을 일관되게 추구한다면, 우리는 중력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는 데 있어 마흐는 위대한 공헌을 했다. 분명 마흐는 이러한 개념 너머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마흐가 구상한 개념들을 완벽한 수학적 중력 이론으로 번역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성취였다. 오직 아인슈타인만이 마흐의 개념을 완성하는 데 놓여 있던 막대한 개념적·수학적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아인슈타인 역학의 훌륭한 구조를 제시할 것인데, 아인슈타인 역학은 다른 종류의 심오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그러했듯 상대성의 개념에 대해서 끝까지 탐구해야만 할 것이다.

  

   마흐의 개념은 이미 상대성원리의 중요한 물리적 귀결을 이끌어냈다. 이미 우리는 양동이가 매우 두꺼울 때 양동이 속에 있는 물이 약간 팰 것임을 살펴보았다. 원리상으로 보면 이에 대응하는 실험이 약간 다른 형태로나마 실제로 수행될 수 있다. 거대한 증기기관의 플라이휠은 그와 같은 회전하는 질량이라 할 수 있으며, 아마도 플라이휠 축 중심 부근에 중력과 유사한 역학적 효과를 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이휠 자체에 작용하는 중심력의 영향, 즉 휠을 구성하는 물질에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장력(tension)의 형태로 작용하는 영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향은 이미 공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이 영향과 관련해서 플라이휠은 우주의 막대한 질량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아주 작은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우리의 고찰은 플라이휠 그 자체를 회전하는 거대한 질량으로 간주하게끔 요구한다. 그렇다면 축 근처로 옮겨졌지만 플라이휠과 함께 회전하지 않는 물체는 축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끌어당김을 경험해야 하는데, 아마 아주 쉽게 움직이는 시험 물체에 대한 이 힘의 영향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마흐의 시대에 임마누엘 프리드랜더는 회전 풍차의 플라이휠을 이용하여 그와 같은 실험을 수행했지만, 오차의 범위를 벗어나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아는 바에 따르면, 이 효과는 너무나 미약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관측할 수가 없다.

  

   역동적인 상대성 개념의 귀결로서 물리적 효과가 드러난다면, 우리는 동일한 효과가 더 높은 정도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일어남을 확인한다.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움직이는 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 현상들이 다른 움직이는 계들에서와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원리를 선언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빛이 거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도록 빛을 쬐거나, 콘덴서에 작용하는 전기장의 비틀림 힘을 관측하거나, 열을 가진 물체들의 열역학적 법칙들을 연구할 때, 이 현상들은 계의 운동 상태와는 독립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원리를 상대성원리라고 불렀다. 이 원리가 갖는 중요성과 일반성은 모든 자연 과정들에 적용되는 에너지 보존의 원리와 유사하다. 상대성원리가 이와 같이 일반적인 형태로 표현되면, 이 원리는 자동적으로 중력 이론을 포함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력장이 서로 다른 운동 상태에 있는 계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중력장만을 고려한다면, 물리적 과정들이 그와 유사할 것이라는 것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는 운동과 중력을 좀 더 높은 통일성 아래에서 결합한다. 바로 이것이 이 원리가 갖는 물리적 의의의 기초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지점에서 상대성이론으로부터 중력 이론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인식론적인 개념이 물리적인 개념으로 귀결되었다. 감각의 세계에서 경험을 통해 최초로 제안되었던 운동의 상대성은, 논리적 비판을 통해 정지해 있는 것으로 선택된 계에 관한 동등화의 정의의 요구로 변형되었고, 그 결과 물리적인 이론으로 발전되었다. 이 이론의 전체적인 범위는 오직 이 이론이 발전된 이후에야 비로소 확인될 수 있었다. 물리학적 연구의 현대적인 방법이 갖는 가장 독특한 특성은 철학적인 것으로부터 물리학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경향인데, 이러한 경향이 이처럼 분명하게 표현된 사례는 없다. 물리학자는 철학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극복해야만 하는 난관들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난관들을 극복해야만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정복할 수 있다. 철학자가 개념적인 영역에서의 발견을 자신의 가장 높은 목표로 두고 그와 같은 발견을 일반화시키고 심오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물리학자는 이 지점에서 탐구의 방향을 되돌린다. 물리학자는 철학으로부터 물리학으로 돌아와,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서 이미 알려져 있는 현상들을 설명하고 새로운 현상들을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수학적 이론을 창조해낸다.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이와 같은 의존은 물리학적 연구의 힘과 매력의 기초가 된다. 이제 다음 장에서 우리는 천체 역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