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6: 빛의 광선적 특성

강형구 2016. 5. 20. 06:45

 

Ⅱ. 빛과 방사

 

6. 빛의 광선적 특성

 

   과학적 탐구는 항상 일상생활의 견해들 및 물음들과는 특정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매 순간 해야만 했던 일들은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일들을 문제로서가 아니라 궁극적인 사실들로 받아들이며, 과학의 임무란 모든 다른 현상들을 이러한 가장 단순한 사실들로 환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물이 축축한 것, 빛이 밝고 색깔을 띠며 사물들에 그림자를 형성하는 것 등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가장 단순한 사실들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 사실들을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과학적 비판 정신이 어느 정도 성숙해야만 한다.

 

   빛은 자연의 현상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빛에 대한 탐구는 항상 좀 더 광범위한 사람들로부터 인지를 얻기 위해 특정한 종류의 어려움들을 이겨내면서 진행되었다. 일상생활의 명백하고 생생한 세계상과 과학의 추상적이고 차가운 세계상의 차이는 빛 이론의 발전 즉 과학적 광학의 발전에서 아주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들, 화가들, 예술에 대한 철학적 비평가들은 과학 특히 광학에 의해 실재 및 실제 세계와의 모든 연관성이 단절되었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필자는 특별히 괴테에 의해서 제시된 유명한 색 이론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물리학적 원리에 대한 괴테의 반대는 두 종류의 세계상 사이의 다툼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다툼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빛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복잡하게 만드는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간을 통과하는 빛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자연 속의 사물일 뿐만 아니라, 물질사물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빛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감각인 시각에 가져다주는 전령(messenger)이기도 하다. 만약 세계에 대한 모든 정보가 우리의 몸까지 확장되는 인과적인 사슬들의 영향에 의존한다면, 빛은 이 사슬의 끝자락에 위치해서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부터 우리의 감각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지식을 만들어내는 고리 역할을 한다. 물론 우리 눈의 지각과 연관해서만 빛은 이와 같은 특권적인 지위를 갖는다. 우리 귀에는 음파가 그와 같은 마지막 고리 역할을 하며, 촉각과 관련해서는 물질 사물들의 탄성력이 그와 같은 고리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들에서는 우리가 빛의 경우에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 지각은 실천적인 중요성에 있어서 다른 형식의 지각들을 압도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은 특히 빛의 경우에 있어 절실해진다(imminent).
  

   그렇다면 이는 대체 어떤 문제들일까? 만약 우리가 지각을 감각의 극단에서 일어나서 이후 망막의 미세한 곁가지들로 퍼져가는 물리적 자극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는 지각의 한 측면만을 특성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동시에 지각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경험된 무엇이고 주관적인 무엇이므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지각을 통해 갖게 되는 직접적인 지식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해서 갖고 있는 논리적으로 연역된 지식과 비교될 수가 없다. 우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가깝게 여기는 우리의 내적 세계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든 내적 경험들은 단어로는 표현될 수 없고 오직 경험될 수밖에 없는, 감각질(qualities)이라는 속성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빛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색깔이다. 우리는 빨강, 파랑, 노랑 등과 같은 단어들을 어떻게 특성화할까? 만약 다른 사람이 스스로 색깔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이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붉은색 공, 노란색 꽃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이 빨강과 노랑이란다.” 따라서, 우리는 색깔을 가진 사물들을 가리킴으로써 아이가 색깔에 대한 내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이름을 알려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색깔에 대해 마치 맹인처럼 이야기한다”는 말이 정당화된다.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빨강과 파랑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살아가는 도중에 맹인이 된 사람은 그의 기억을 통해 이 단어들에 내용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의 과학적 탐구에 대한 반대의 근원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있다. 색깔과 밝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빛이 파동의 과정이며 빛의 색깔은 이 파동의 진동수라는 주장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과학의 가르침을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그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빛에 대한 지각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 근저에 있는 물리적 과정과 관련된다. 감각되기 전의 빛, 즉 우리의 눈에 도달하기 위해 공간을 통과할 때의 빛은 파동이자 진동이다. 밝음과 색깔에 대한 감각 그 자체는 진동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이며, 이는 외부로부터 빛 파동이 도달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물리적 탐구는 오직 빛 파동과만 관련된다. 빛 경험에 대한 탐구는 미학(aesthetics)에 속한다. 예를 들어 미학은 각각의 색깔이 감정적인 고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려주거나(우리는 따뜻한 빨강, 차가운 파랑 등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내적 지각에서는 색깔들이 연속적인 질서 속에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를(예를 들어 주황은 빨강과 노랑 사이에 있다) 알려준다. 따라서 미학은 우리의 경험이 갖는 속성들에 대해서 가르쳐주지만, 이러한 경험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물리적 행위자(agent)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리적 사물들의 경우에는 그와 같은 혼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빛에 대해서와 달리, 아무도 전기를 직접적으로 관측함으로써 전기 현상의 본성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전기에 대해서는 오직 간접적인 효과만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전기가 기계를 움직이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효과들을 일으킴을 확인하는데, 이때도 마지막에는 빛을 통해 이러한 효과들을 확인한다. 빛이 이러한 전달 사슬의 마지막 단계에 있기에 빛은 빈번하게 물리적 대상이 아닌 주관적 경험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혼동은 유지될 수 없다. 물리적 행위자인 빛이 존재하며, 빛의 본성은 물질 혹은 행성들의 본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빛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 역시 존재하지만 이는 객관적인 빛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내적 세계라는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며 빛의 객관적인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물리학자들의 탐구는 물리적 행위자로서의 빛과만 관련된다. 물리학자들은 공간에 있는 빛 광선, 물질 사이의 공간에 있는 빛 파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빛이 인간의 의식에 유발하는 경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빛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면 빛의 본질을 매우 단편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반대가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빛의 물리적 측면이 경험적 측면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받아들여야 하며, 물리적 측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양쪽 측면 모두에 대한 다소 피상적인 관측보다 낫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빛의 두 측면은 너무도 달라서 이를 하나의 단일한 과학으로 통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빛의 물리적 측면에 대한 탐구와 관련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가장 단순하게 여겨지는 사실들이 과학적 설명을 위해서는 단순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해졌다. 더 이상 빛에 관한 사실들을 이미 알려진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들을 특정한 다른 자연 현상들과 결합하여 일반적인 법칙들의 결과로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빛이 광선의 형태로 전파되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기하광학으로 알려진 주제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일상생활을 통해 우리는 빛이 직선으로 퍼져나간다고 알고 있다. 이는 그림자의 윤곽선이 또렷한 것을 통해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인지하기 어려운 빛의 속성은 빛이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전파해나간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지하기 어려운 이유는, 소박한 관찰자에게는 빛을 켰을 때 빛이 순식간에 멀리 있는 사물들을 밝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착각이 빛의 빠른 속도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미터에 달하며, 이는 1초에 지구를 여러 번 돌 수 있는 거리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천문학자인 올래프 뢰머(Olaf Roemer)는 목성 위성들의 움직임이 더디게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목성에서 지구에 빛이 도달하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래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뢰머는 상당한 정확도로 빛의 속도를 계산해냈다. 이후 유리의 굴절(refraction) 현상에 대한 뉴턴의 체계적인 탐구를 통해 광선 광학이 발전했다. 뉴턴은 17세기 초부터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빛의 속성인 회절의 법칙들을 연구했다. 뉴턴은 유리에서의 빛의 회절이 전파 속도의 변화에 기여한다고 보았고 이는 올바른 주장이었다. 물론 뉴턴은 광학적으로 밀도가 높은 매질인 유리에서의 빛의 속도가 더 크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범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에 따르면 광학적으로 밀도가 높은 매질에서는 빛의 속도가 더 느려진다. 그러나 뉴턴의 실험이 갖는 가장 중요한 결과는 백색 빛을 여러 색깔들로 분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뉴턴은 백색 빛이 여러 다른 색깔들의 혼합임을 알아냈고, 그는 프리즘에 빛을 통과시켜서 이를 보여주었다.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빛스펙트럼이 생성되는데, 스펙트럼은 우리가 오늘날 무지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까지 이어진다. 뉴턴은 프리즘의 역할을 올바르게 해석했다. 프리즘은 빛의 속도를 변화시켜 유리를 통과하는 빛이 기울어지게 했다. 빨강 광선은 가장 덜 기울어졌고 보라 광선은 가장 많이 기울어졌다. 이에 따라 원래는 폭이 좁고 흰색이었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색깔을 띤 넓은 띠인 이른바 스펙트럼이 되었다.

 

   이 현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뉴턴은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스펙트럼 중에서의 단일 색깔, 예를 들어 노랑 색깔은 더 이상 분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뉴턴은 틈새를 이용해서 스펙트럼의 노랑 부분을 분리한 다음 이 부분을 다시 프리즘에 통과시켰다. 그랬더니 더 이상의 색깔 분해가 관측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뉴턴은 기발한 배열을 이용하여 스펙트럼의 단일한 색깔들을 모으면 최초의 흰색 빛이 형성됨을 보일 수 있었다. 그는 렌즈를 이용해서 여러 색깔들을 모은 다음 모아진 빛이 흰색 빛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까지도 뉴턴의 실험은 색깔 분산(dispersion)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괴테가 조장했던(fomented) 논쟁인 빛의 분산 이론에 대한 논쟁을 다시금 언급하고자 한다. 괴테는 자신의 색깔 이론에서 흰색 빛이 여러 색깔들의 혼합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뉴턴은 흰색 빛이 색깔과 굴절성이 다른 여러 색깔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결코 증명하지 못했다.” 그는 뉴턴의 이론이 “꾸며낸 가설이며, 정확한 관측과 예리한 추론 앞에서 사라져버릴 가설”이라고 선언했다. 분명 이러한 논증의 심리적인 근원은, 앞서 우리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물리적 행위자로서의 빛을 감각으로서의 빛과 혼동한 것에 있다. 사실 흰색에 대한 감각은 노랑 혹은 파랑에 대한 감각처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흰색이 다른 기초적인 색깔 감각들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괴테의 그릇된 추론은 그가 과학적 사고에 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괴테는 심리학적으로 단순한 것이 아주 복잡한 물리적 대상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괴테의 견해는 유지될 수 없다. 만약 괴테가 그의 색깔 이론에서, 자신의 논의를 우아함과 기분 좋은 건조함을 사용하여 논할 수 있는 심리학으로만 한정시켰다면 그의 가르침에는 반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괴테는 자신의 방법론이 갖는 한계를 깨닫지 못했다. 괴테는 아주 신랄하게(asperity) 물리 이론을 공격했고, 과학적 논의에서 크게 벗어난 논의를 갖고 뉴턴과 대적했다. 괴테가 사용한 폭력적 언어 표현-그는 뉴턴 이론을 오류로 범벅된 구성물이며 쥐와 올빼미의 소굴(nest)이라고 불렀다-은 그의 입장이 유지될 수 없음을 더 분명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왜 괴테와 같은 위대한 천재가 이성과 과학을 경멸했는지는 하나의 심리학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역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아직까지 이 수수께끼를 풀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빛의 내재적 본성에 대한 물음을 이어나가기 전에, 빛의 방사 이론이 실제적으로 적용된 것과 관련한 보충 설명을 해보자. 유리에서 빛이 경로의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망원경, 현미경 및 각종 사진 기구들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유리 렌즈를 통과하는 빛의 굴절에 기초한 도구들이다. 이 도구들의 내부 구성을 보면 겉보기에는 서로 비슷해 보인다. 이 도구들이 실제적으로 적용되면 우리 시야를 더 정교하고 미세하게 강화시키며, 이는 우리의 시각 기관을 확장시켜 우리의 생물학적 경계를 넘어서게 함을 의미한다. 망원경은 맨눈으로 보았을 때는 단일하고 구조가 없어 보이는 먼 거리의 물체를 분해한다. 현미경은 맨눈으로 보았을 때는 흐릿하게 보이는 물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여준다. 카메라는 인간의 자연적인 눈과 흡사한 인공 눈과 같지만, 자연적인 눈과 달리 그것이 찍은 상을 영원히 유지한다. 따라서 광학 도구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화가 독특하게 확장되었음을 상징한다. 측정을 위한 전기 도구와 같은 다른 과학적 도구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좀 더 새롭고 정확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고 하더라도, 이 도구들은 단지 우리가 신성하고 근저에 있으며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탐구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광학 도구들은 시각적 통찰 그 자체를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특히 소박한 사람에게 이 도구들은 가장 멋진 과학적 업적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도구들을 가지고 자연의 내부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광학적 발견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감정을 가장 강하게 느꼈다. 위에서 언급한 세 도구들 중 가장 강력한 도구인 망원경은 가장 처음에 발명되었다. 망원경은 한 네덜란드 사람에 의해서 1600년경에 발명된 후 개선되었으며, 갈릴레오에 의해서 다시 발명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망원경의 발명에 대해 몹시 경이로워 했다. 이탈리아인 시르투러스(Sirturus)는 네덜란드 망원경을 구해서 산 마르코의 탑 위에 올라갔다. 시르투러스는 이후 진행한 관찰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광장 아래에 있던 한 사람이 내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음을 알아채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지적했더니, 곧 호기심에 사로잡힌 귀족 청년들이 다급하게 내 주변을 둘러쌌고 급기야는 나를 넘어뜨릴 뻔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고 정중하게 나에게 요청하여 나의 망원경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돌아가며 망원경을 보았고, 대략 두 시간쯤 지나자 그들은 배가 고파졌는지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 수가 줄어들자 비로소 나는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흰색 금속 원통으로 되어 있었고 원통 바깥은 붉은색 양털로 덮여있었다고 하며, 그 길이는 60센티미터 정도 되었다고 기술된다. 당시의 목격자는 이렇게 전한다. “망원경을 잡은 채 한쪽 눈을 감고 다른 한쪽 눈으로 망원경을 보면, 리자(Liza), 푸시나(Fusina), 말게라(Marghera), 치오자(Chioza), 트레비소(Treviso), 코넬리아노(Conegliano) 너머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으며, 파두아(Padua)의 산타 기우스티나(Santa Giustina) 교회의 종탑, 돔 지붕 및 정면 역시 선명하게 보였다. 또한 무라노(Murano)의 산 지아코모(San Giacomo) 교회에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리오 드베리에리(Rio de'Verieri)의 하단에 있는 콜로냐 연락선의 곤돌라에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도시와 개펄(lagoon)의 세세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더 이상 망원경의 그와 같은 성취에 대해서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놀라움은 좀 더 고차원적인 수준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우리가 천문학 망원경이 이룬 놀라운 업적들에 대해서 들으면, 우리는 갈릴레오 동시대의 사람들처럼 경이로운 감정을 느낀다. 인간의 눈은 망원경에 의해서 연장되었으며 우주의 깊은 곳을 꿰뚫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성취이며, 인간의 생물학적인 경계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망원경에 의해서 보이는 별들의 숫자는 수백만 개다. 만약 지름 75미터 정도의 망원경을 만들 수 있다면 우주 전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여전히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이러한 일이 가능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일상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벗어난 과학적 광학은 기술적인 업적을 이루어내었으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을 높은 수준으로 풍성하게 만들었다. 일상적 삶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삶으로 돌아와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은 과학적 연구의 아름다운 운명인 것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