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02: 공간

강형구 2016. 4. 11. 05:55

 

2. 공간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우리가 갖고 있는 거시 세계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킨 것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보자.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에 따르면, 공간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루어진 발전은 오직 거시 세계에서만 지각 가능한 변화를 일으킨다. 따라서 천문학의 문제들 속에서 공간의 새로운 이론이 경험적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분명 이러한 발전의 개념적 기초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이러한 사고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 이래로 공간의 과학인 기하학은 고전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이는 공간 문제에 대해 이후 이루어진 모든 탐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에 공리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다시 말해, 그는 기하학의 기초를 일련의 진술들-공리들-에 요약하였으며, 모든 다른 기하학적인 정리들이 공리들의 귀결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기하학은 엄격한 과학의 모범이 되었다. 기하학의 증명 방법은 최초로 과학적 증명의 엄격함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이후로 기하학은 모든 과학들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과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공리들 그 자체의 지위는 신비로운 것으로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증명의 기하학적 방법과 논리적 추론 절차가 공리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리들은 증명의 가정으로 여겨졌으며 증명의 결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약 공리들이 증명될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된다고 해도, 공리들에 대한 증명 역시 다른 공리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정당화의 문제는 새롭게 발생한다. 따라서 과학의 공리적 형식화가 등장하고 나서야, 과학의 기초가 갖는 기원에 대한 물음이 정확한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이 물음은 그것에 고유한 복잡한 문제들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 그리스인들이 이 문제의 모든 측면들을 고려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얻은 이러한 관계에 관한 통찰은, 기하학의 공리들 중 오직 하나의 공리에 관련된 특수한 탐구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유클리드의 공리들 중 평행선의 특성을 규정하는 공리였다. 이 공리에 따르면, 한 점이 주어지고 이 점을 통과하지 않는 하나의 직선이 있을 경우에, 해당 점을 통과하면서 주어진 직선과 평행한 직선을 오직 하나만 그을 수 있다. , 주어진 직선과 같은 평면에 있으면서 이 직선을 자르지 않는 다른 직선을 오직 하나만 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리는 평행선 공리라고 불리며, 위에서 기술된 조건을 시각화할 경우에 그 내용이 매우 명백하게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부터 수학자들은 이 공리에 대한 정당화에 물음을 제기했다. 이 공리가 실제로 옳은지의 여부는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수학자들은 이 공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 수학자들은 이 공리를 기하학의 기초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고, 이를 다른 공리들을 사용하여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왜 고대의 수학자들이 평행선 공리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는, 고대의 수학자들이 정확한 직관으로 기하학에서의 공리의 지위 문제를 정확하게 공략했으며, 이러한 연구를 통해 이후에도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유클리드의 시대 이후 2천년 동안 평행선 공리를 증명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시도된 모든 증명들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이 증명들은, 결과적으로는 남은 공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다른 가정을 포함함으로써만 평행선 공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탐구의 과정에서 동등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일련의 가정들이 발견되었으며, 이 가정들 중 그 어떤 것을 골라도 기존의 평행선 공리를 대체할 수 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같다는 가정이나, 서로 다른 크기의 도형이 서로 닮을 수 있다는 가정인 기하학에서의 닮음 법칙을 예로 들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평행선 공리가 옳은지의 여부에서 위와 같은 다수의 동등한 가정들이 옳은지의 여부로 옮겨진 것이 분명하며, 새로운 문제는 이전까지의 문제와 그 본성상 동일하다.

  

   이 문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해결책이 제시된 것은 오직 100년 전의 일이다. 볼리아이와 로바체프스키라는 두 수학자는 기하학의 논리적 구조에서 평행선 공리를 완전히 제거하고, 평행선 공리의 자리를 이와 상치되는 진술로 대체해도 일관성 있는 기하학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서로에 대해 약간 기울어져 있는 두 개의 직선이 서로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진술은, 수학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직관과 상치되는 것 같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직관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수학자들은 가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물음을 완전히 생략한 채, 기하학적 체계의 자기일관성 여부에만 탐구를 제한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사실이 나타났다. 평행선 공리와 상반되는 공리를 사용해도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동일한 정도로 일관된 기하학인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오직 내적 모순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구분되는 기초적 가정에서 출발하여 단번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결과들과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다르며, 닮음의 법칙 역시도 타당하지 않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수의 기하학들이 오래된 유클리드 기하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상, 볼리아이-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은 오래 지나지 않아 하나의 특수한 경우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평행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들도 구성되었다. 이러한 기하학에서는 위치에 따라 대상의 근본적인 속성들이 달라진다. 수학자 리만은 이와 같은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기하학이 갖는 기초를 창시하였으며, 리만의 업적 이후로 우리는 공간의 일반적인 기하학 유형을 리만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기하학들은 리만 기하학의 특별한 경우들로 간주된다.

  

   리만은 굽은 평면의 여러 형식과 이러한 기하학을 연결하여 자신의 개념을 시각화하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일반적인 유클리드 공간에서의 평면과 곡면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면과 곡면은 단지 2차원적 형태이며, 3차원의 공간에 포함되어 있다. 리만은 3차원 공간의 가능한 두 유형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평면과 곡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유클리드의 3차원 공간은 그 기하학적 속성들에 있어 평면과 대응한다. 따라서 리만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시했다. 우리가 곡면과 평면 사이를 관련짓는 것처럼, 일반화된 공간을 3차원 유클리드 공간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두 개의 3차원 공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곡면의 좁은 영역은 평면과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어, 지구의 곡면 중 우리가 눈으로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영역은 평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리만은 이와 같은 관계를 곡면의 미분 요소는 평면과 같다고 공식화했다. , 곡면의 미소 영역이 평면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평면이란 거시 규모의 구조와 미시 규모의 구조가 동일한 하나의 특수한 면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곡면이란 거시 규모의 구조와 미시 규모의 구조가 상당히 다른, 좀 더 일반적인 특성을 갖는 면이라고 볼 수 있다.

  

   리만은 이와 같은 방식의 추론을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서로 닮은 형태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유클리드 공간에서는 넓은 영역과 좁은 영역이 동일한 속성들을 갖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는 미소 영역에서는 유클리드적 속성들을 가지지만 거시 규모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다른 구조를 드러내는, 곡률을 갖고 있는 기하학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면 리만 유형 공간의 특징은 그것이 유클리드 공간의 조건들을 일반화한 것에 있게 된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구의 영역이 우주 공간의 차원과 비교할 때는 무한히 작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리만 공간이 인간에게 접근 가능한 영역에서는 달라지지 않지만 아주 큰 영역에서는 매우 새로운 기하학적 조건들이 등장하는 일반적인(conventional) 유형의 한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공간 개념에 대한 리만적인 확장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물리적 세계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성적인 과정의 근원(germ)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개념적 유형의 연속적인 확장 과정이다. 이전까지의 경험된 세계가 완전하게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근사적으로만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일상적인 경험의 영역에서는 오래된 개념들이 적용되지만 과학의 영역에서는 좀 더 일반적인 개념들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아주 다른 방향의 접근에서도 이러한 과정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고 능력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자들이 다수의 기하학들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이후, 물리학에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만약 수학이 가능한 것의 과학이라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물리학은 실제적인 것에 대한 과학이기 때문이다. 수학자들이 복수의 서로 다른 공간 유형이 가능함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사는 실재 세계는 이러한 유형들 중 어떤 것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물리학에 등장했다. 이 문제와 더불어 기하학적 공리들의 타당성 문제는 새로운 종류의 해답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더 이상 기하학적 공리들은 단순하게 참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대신 경험과학이 실제 세계에 적용되는 공리들이 어떤 것인지를 판가름해야 한다. 공리의 타당성 문제가 갖는 이러한 단순한 측면은 최초에는 오직 평행선 공리와 관련해서만 인지되었다. 이제는 모든 다른 공리들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실재에 관한 모든 기하학적 공리들은 경험적 진술들이다. 그러나 이제 수학자들은 순수하게 수학적인 기하학들을 구성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기하학들의 공리들이 이들과는 상치되는 공리들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행선 공리와 동일한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평행선 공리가 타당한지의 물음을 시험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놀랄만한 복잡함에 직면하는데, 이 복잡함은 새로운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해보아야 하며, 이를 위해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다음과 같은 장치를 도입하고자 한다. 우리는 3차원의 문제를 보다 단순한 2차원의 문제로 바꾸어 이해해보겠다. 우리는 2차원의 곡면이 3차원의 비유클리드 공간에 대응하는 “2차원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2차원의 형태는 쉽게 시각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3차원보다 단순한 2차원 형식의 인식론적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다.

  

   평면의 형태를 띤 표면을 상상하되, 그 중간에 반구 형태의 혹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림 2는 그와 같은 표면의 단면도인 APBQRC이다. 이제 이 표면이 세계 전체를 나타낸다고 가정해보자. 다시 말해, 모든 종류의 물리적 사건들이 이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이 표면에서 거주하는 생명체 역시 2차원적 존재이며,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형태가 어떠한지 알고 싶어 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이 생명체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표면의 형태를 인지할 수 있을까?

  

   표면 위의 2차원 생명체들이 표면에 있는 혹을 볼 수는 없다. 3차원적 존재인 우리가 평면에서 툭 튀어나온 부분을 볼 수 있는 것은, 빛 광선이 3차원 공간을 통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까닭에 돌출된 언덕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덕 때문에 우리는 언덕 뒤에 있는 세계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2차원적 세계에서 빛 광선은 굽어진 평면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의 언덕이 가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덕 뒤의 물체를 C라고 할 때, CB를 통과하는 광선에 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생명체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2차원 세계의 곡률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기하학적 측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가 평면으로부터 얼마만큼 벗어나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세계의 생명체들이 B에 세운 막대에 줄을 연결해서 팽팽하게 당긴 다음, 줄의 끝 부분을 돌려서 원을 그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 결과로 PQ를 통과하는 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생명체들은 우선 측정 막대를 가지고 원의 지름을 측정할 것이고, 지름이 줄 길이의 2배임을 확인한다. 그런 다음 이들은 단계적으로 측정 막대로 원의 둘레를 측정한다. 측정 결과, 원의 지름과 둘레의 비율은 평면에서의 비율인 π=3.14보다 더 작은 값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동안만 논증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 번째 차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PBQ는 원의 진짜지름을 표현한다고 보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원의 진짜 지름은 언덕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2차원의 생명체들은 이러한 진짜지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할 것이며, 원주율인 π3.14보다 작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표면이 굽어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표면 세계인 abc를 상상해보자. 이 세계는 처음의 세계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모든 부분이 평평한 평면이다. 이 세계에서도 공간을 측정할 수 있는 2차원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세계에서 우리는 약간 신비로운 가정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 세계에서는 신비로운 힘이 작동하는데, 이 힘은 측정 막대를 비롯한 평면 위의 모든 사물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이 변형의 본성을 기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 번째 면 위에서 아래로 빛을 내리쬐어 첫 번째 면 위의 모든 사물들의 그림자가 첫 번째 면을 통과하여 두 번째 평면에 비치도록 해보자. 물론 이러한 빛에 대해서 두 세계의 거주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빛은 세 번째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특정한 기하학적 관계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만 이 빛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면 abc의 모든 사물들이, 앞서 언급한 신비로운 힘에 의해 처음 세계인 ABC의 사물들에 의해 생기는 그림자 크기와 정확하게 똑같은 크기로 대응된다고 가정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주목할 만한 귀결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세계 abc의 생명체들이 기하학적 측정을 하면, 이들은 항상 세계 ABC에서 이에 대응하는 측정과 정확하게 동일한 횟수로 측정 막대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이들이 b를 중심으로 pq를 통과하는 원을 그릴 경우, 이 원의 지름과 둘레의 비율을 측정했을 때 세계 ABC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숫자를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abc에 사는 생명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들은 신비로운 힘을 관측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힘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측정 막대를 이동시킴에 따라서 막대의 크기가 변한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신체를 비롯한 모든 다른 사물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계 ABC의 생명체들이 그러했듯, 자신들이 중앙에 혹이 하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이 생명체들이 갖게 된 이와 같은 세계 개념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권리가 있을까? 물론 우리는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례에서 세계 abc를 평면이라고 제시하였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를 평면으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어디서 얻었는지의 문제를 무심코 지나쳤다. 어찌되었든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물리적 사건들을 감안한다면 이 세계의 형태가 세계 ABC와 동일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론만이 우리가 지금껏 기술한 측정의 결과와 직접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한번 이러한 관계들에 대해 명료화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불편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혀 감지되지 않으면서 모든 사물들을 변형시키는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 얘기했다. 만약 그러한 힘이 가능하다고 하면, 과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그러한 힘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역시도 측정 막대를 가지고 기하학적 관계들을 측정한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측정 막대가 변형되지 않는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믿는 것일까? 우리는 두 개의 측정 막대를 나란히 놓은 다음 두 막대의 길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후, 둘 중 하나의 막대를 멀리 있는 장소에 가져간다. 이 때 두 측정 막대는 여전히 길이가 같을까? 만약 우리가 신비로운 힘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두 번째 측정 막대를 새로운 위치로 옮겨져 있는 첫 번째 막대 곁으로 옮겨서 길이를 비교한다고 해도, 이러한 비교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번째 막대 역시 첫 번째 막대처럼 옮겨지는 도중에 변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옮겨진 두 측정 막대를 최초의 장소로 돌려놓은 후 다시 두 막대를 최초 장소에 있는 사물들과 비교한다고 해도, 막대들이 돌아오면서 최초의 크기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아무런 변화도 관측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신비로운 힘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대체 우리는 세계에서 어떤 것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측정 막대의 길이 비교는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시험될 수 없으며, 오직 규약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특정한 측정 막대들의 크기가 같다고 명명하며, 그러한 명명만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지(recognition)가 아니라 규약(convention)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합의를 동등화 정의(coordinative definition)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 정의는 공간적 동일성의 개념과 실제의 막대 사이를 동등화(연결, 조율)하기 때문이다. 오직 규약을 통해서만 공간적 동일성 개념은 실재에서 해석될 수 있으며, 실재에 있는 것과 대응한다. 규약을 통해 물리적 측정이 가능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공간적 동일성 개념은 그 내용을 얻는다.

  

   모든 측정은 그와 같은 동등화 정의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정의 중 가장 단순한 규약은 길이의 단위에 관한 것이고, 길이 단위의 규약적 특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지되었다. 모든 이들이 아는 것처럼 미터는 파리에 있는 표준 미터 막대를 지칭함으로써 정의된다. 길이를 정의하는 다른 가능한 방법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파리에 있는 막대가 정말로 1미터인지를 묻는 것은 전적으로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길이 비교가 동등화 정의를 가정한다는 발견에 지나지 않으며, 그에 따라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미터 막대가 정말로 동일한 길이를 갖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이다. 인간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할만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 물음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한 번 인식하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평생 떠나지 않을 철학적 통찰을 얻게 된 셈이다. 파리에 위치한 미터 막대가 정말로 표준 미터인지의 물음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이 불행한 사람의 추론을 쉽게 웃으면서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측정 막대를 비교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자의 추론 역시 이 불행한 사람의 추론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표면의 형태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앞서, 표면의 형태는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측정 막대들의 길이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지 결정하는지에 의존함을 살펴보았다. 만약 표면 abc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이 자신들의 측정 막대를 동일하다고 부른다면, 진정 그들이 사는 표면은 평면이 아니라 중간에 혹이 있는 표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그들이 합동에 관한 다른 종류의 정의를 선호하고, 그들의 측정 막대가 움직임에 따라서 변형된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표면은 평면이 된다. 두 진술들 모두 동등하게 참되면서도 이 두 진술들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표면의 형태는 합동의 동등화 정의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의 형태에 절대적인 의의를 부여하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표면의 형태에 대한 그 어떤 진술도 크기 비교의 사전 동의에 대한 지칭을 빠뜨릴 수 없다. 이와 대응하는 특성을 지닌 많은 수의 다른 물리적 진술들도 오래 전부터 인지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전에 온도 단위를 결정하지 않고서는 온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오래 전부터 알려졌으며, 우리가 온도의 단위로 섭씨를 사용하거나 화씨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값을 갖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표면의 형태 역시 규약의 일종인 합동의 동등화 정의에 상대적으로만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하학적 관계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논의를 2차원 공간에서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해보자. 3차원 공간에서도 우리는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확정하기 위해서 측정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집 정도의 크기를 가진, 철판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구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구에 올라갈 수 있으며, 철제 빔으로 만들어진 구의 지름 역시도 측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철제 구 위의 모든 대원, 다시 말해 지구로 따지면 적도나 자오선의 지름과 둘레의 비율을 원주율인 3.14로 얻을 수 있을까? 철제 구의 제작자들은 그들이 3.14라는 값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측정 막대와 우리의 강체가 움직일 때 이러한 비율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견해를 정당화한다. 우리는 강체를 통한 측정이 다른 비율을 제시하는 세계 역시도 상상(conceive)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세계에서 우리는 공간을 비유클리드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세계가 실제로는 유클리드적이며 측정 막대가 움직일 때 변형을 겪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기술한 조건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실용적일 것이다. 그러한 세계를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도움을 빌려 기술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 세계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측정 막대와 강체가 유클리드적인 관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통해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물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길들여졌으며,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편애(predilection)에 익숙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학자들은 오직 유클리드 기하학만이 시각화가 가능한 기하학이라는 그릇된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 지점에서 오직 관습만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또 다른 세계에서는 우리의 지각 능력이 해당 세계에 맞게 변형되어, 지금 우리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시각화 할 수 있듯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시각화 할 수 있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공간의 진정한 본성에 관한 통찰을 얻기까지는 수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발전이 필요했다. 수학은 공간의 비유클리드적 형태가 가능함을 보여주었고, 인식론적인 탐구로부터 실재에 공간적인 형태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합동에 대한 동등화 정의가 필요함을 가르쳐주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물리학에서 적용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종류의 기여 모두 필요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공간의 형태에 관한 객관적인 탐구가 이제야 비로소 가능해졌음을 인식한다. 만약 동등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간의 형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예를 들어 강체 측정 막대를 통해 동등화 정의가 주어진다면, 공간의 형태에 대한 물음은 객관적 지식의 문제가 된다. 동등화 정의가 임의적이라고 해서 공간 형태를 구체화하는 것이 불확실성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반대로, 동등화 정의와의 관계 속에서만 공간에 형태가 부여될 수 있다는 인식이, 공간의 객관적 속성들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자연과학의 위대한 근본 문제들 중의 하나인 공간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탐구 결과이다. 이를 통해 물리학과 자연과학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영역이 의미심장하게 확장되었다. 공간에 대한 교리는 더 이상 순수한 사고의 영역, 즉 인지적 이성이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매체로서의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공간에 대한 교리는, 다른 모든 물리 이론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것이 물리적으로 적용될 때 우주의 객관적인 상태인 실제 사물들의 조건을 고려한다. 실재하는 공간에 대한 교리로서의 기하학이 존재하며, 이 기하학의 내용은 열 이론 또는 전기 이론과 같이 물리학에 속한다. 실재에 대한 기하학은 오직 일반적인 개념적 틀의 도움을 받아서 수행될 수 있다. 이 때의 일반적인 개념적 틀이란 지금까지 알려진 유클리드 기하학보다도 실질적으로 더 광범위한 함축을 갖는 개념적 틀을 말한다. 따라서 기하학의 문제에 대한 이와 같은 발전은, 사실에 대한 탐구와, 우리가 지금껏 지적한 우리 시대의 물리학이 가진 일반적인 특징인 개념적 사고의 확장이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재는 사고의 전통적인 체계적 분류를 통해서는 충족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우리의 탐구 시작에서도 나타났던 다음과 같은 추측이 등장한다. 인간 사고의 사색적 힘은 자연 변이의 폭을 넘어서지 못한다. 따라서 사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방법들 중 자연이 제공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