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배리 데인튼, [시간과 공간] 요약 정리 15: 공간적 반실재론

강형구 2016. 3. 30. 05:24

15: 공간적 반실재론

(Spatial anti-realism)

 

15.1. 물질과 공간에 대한 포스터(Foster)의 견해

    공간적 반실재론이란, 겉보기에 우리 우주가 공간적인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번 장에서는 이러한 공간적 반실재론을 옹호하는 형이상학적 논증을 살펴본다. 포스터는 그의 1982년 책에서 물리적 세계는 그가 궁극적 실재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가 아님을 보이고자 했다. 그가 실체론적 공간에 대해서 어떤 논박을 제시했는지 살펴보자. 포스터의 존재론적 논증은 푸앵카레의 인식론적 논증과 닮아 있다. 포스터 역시 자연법칙이 근저에 있는 실재의 진짜 구조를 숨기도록 작용하는 사고실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푸앵카레의 규약주의 논증을 아래와 같이 풀어쓰면 이 논증이 어떻게 존재론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쉽게 보여줄 수 있다.

  

   (1) 물리적 공간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물리이론으로 구체화되는 기하를 갖는다.

   (2) 기하는 규약의 문제이다.

   (3) 객관적 실재의 특성은 규약의 문제가 아니다.

   (4) 따라서 물리적 공간의 기하는 객관적 실재에 속하지 않는다.

   (5) 기하의 담지자인 물리적 공간 역시 객관적 실재에 속하지 않는다.

  

   포스터는 공간적 반실재론에서 물리적 반실재론으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행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물리적 사물들만이 공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공간이 없다면 사물들이 연결될 수 없으므로 물리적 세계역시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5.2. 내재적이고 불가사의한(inscrutable)

   포스터는 물리적 내용의 불가사의함 원리를 주장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내용 논제 : 적어도 몇몇 물질적 사물들은 그 고유의 내재적 본성을 가진다.

   (2) 불가사의함 논제

    (i) 우리는 이러한 내재적 본성을 알 수 없다.

    (ii) 내재적 본성은 물리과학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포스터가 말하는 내재적 본성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포스터는 사물들에 시공간적이고 인과적인 속성들을 뛰어넘는 내재적인 특성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내재적인 특성들은 우리가 실제로 사물들에 부여하는 모든 속성들과 다르다. 왜 우리는 이러한 추가적인 속성들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크기, 형태, 운동은 사물의 시공간적 속성 또는 구조적 속성이라 부른다. 사물의 구조적 속성 이외의 속성들은 인과적인 힘이라 볼 수 있다. 단단함, 질량, 색깔 등과 같은 속성들은 다른 사물들에 특정한 종류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과적인 힘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조적 속성, 인과적 속성 이외에 사물들이 갖는 내재적인 속성이 없을까? 포스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물리적 사물들이 갖는 인과적인 잠재성은 분명 잠재성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근거해야 한다고 본다. , 사물들은 인과적, 성향적 속성이 아닌 별도의 내재적 속성을 가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공간에서 두 개의 원자가 움직이고 있다. A1A2를 밀어내고, A2A1을 밀어낸다. 이 세계에서 A1이란 A2를 밀어낼 수 있는 속성일 뿐이라고 가정하면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A2역시 A1을 밀어낼 수 있는 속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A1의 존재를 보장하기 어렵게 된다. , 이 세계에서 A1이나 A2를 단순한 인과적 잠재성(능력)으로만 정의하면 A1A2를 존재하는 무엇인가로 보기 어려워진다. 세계를 좀 더 복잡하게 하거나, 사물들이 갖는 인과적 속성의 수를 늘린다고 해도 상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단순한 인과적 속성들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원자의 존재가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물들이 구조적, 인과적 속성 이외의 내재적 속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포스터는 실체론적 공간은 반드시 이와 같은 별도의 내재적 속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불가사의함 논제에 따라 우리는 이 내재적 속성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포스터는 공간의 이런 내재적 속성들이 물리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물리적 개념은 사물의 내재적 본성에 관한 물음에는 전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이며, 이를 주제 중립성(topic neutrality)’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단일 종류의 원자로 구성된 세계를 생각해보자. 이 세계를 설명하는 두 개의 이론 T1T2가 있다. T1에서는 원자가 내재적 속성 Q1을 갖고 실체론적 공간은 속성 Q2를 갖는다. T2T1과 반대로 공간이 속성 Q1을 갖고 원자는 Q2를 갖는다. T1T2는 원자와 공간에 동일한 인과적 힘을 부여하므로, 실제로 활동하는 과학자들은 T1T2가 구분되는 이론이 아니라 동일한 역할을 하는 동일한 과학이론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15.3. 일탈(deviancy)의 양태(mode)

   포스터에 따르면, 우리는 실체론적 공간의 내재적 속성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은 추론할 수 있다. 공간의 기하는 공간을 채우는 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며, 서로 다른 질적 유형의 공간들이 동일한 기하학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이제 공간 S가 유클리드적이고 물질은 단일 종류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S가 내재적 속성 P1, 원자 A가 내재적 속성 P2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공간 S의 물리적 공간을 P라 하자. 포스터는 SP가 수적으로 구분되는 별도의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PS가 서로 다를 수 있는 일탈의 가능성에 근거한다. 공간 S에 직사각형의 영역 R이 있고, 원자들이 R을 지날 때마다 속성 P2가 아닌 속성 P3을 갖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또는 영역 R만 속성 P1이 아닌 P4를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 두 경우 모두 물리적으로 보았을 때는 처음의 세계와 동일하다. 따라서 내재적 속성들이 다르므로 서로 구분되는 세계들이 물리적으로 볼 때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 셈이다.

  

   포스터는 위와 같은 질적 특성과 관련된 사례와 더불어 공간의 기하학적 특성과 관련된 사례도 제시한다. 뉴턴적인 3차원 공간 S에 서로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구형 공간 R1R2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R1에 들어가는 사물들은 동일한 속력과 방향으로 R2에서 나타나고, 반대로 R2에 들어가는 사물들은 R1에서 나타난다고 가정해보자. 경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은 R1R2가 교체되어 있는 세계와 교체되어 있지 않은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 서로 다른 기하학적 속성을 가진 두 공간을 물리적으로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15.4. 내재적 기하 대 기능적 기하

   위에서 제시한 가상적 공간 S에서 물리법칙은 균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 공간 S에 적용되는 법칙은 균일하지 않다. 그런데 영역 R1R2를 서로 교체하면 법칙의 균일성은 회복된다. 포스터는 법칙적으로 비균일한 세계가 법칙적으로 일탈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일탈은 세계의 기하에 일정한 변경을 일으켜서 복원할 수 있다.

  

   포스터는 기능적(functional) 기하와 내재적(intrinsic) 기하를 구분한다. 내재적 기하는 내재적 속성을 포함하나, 기능적 기하는 경험적 이론화에 필요한 기하학적 구조만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기능적 기하는 겉보기 기하다. 포스터에 따르면 기능적 기하와 내재적 기하는 서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15.5. 법칙성 논제

   포스터는 물리적 기하는 기능적 기하와 일치하기 때문에 물리적 공간이 법칙적으로 일탈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법칙성 논제라고 부른다. 포스터에 따르면 우리는 물리적 공간이 일탈적이라는 주장을 지지하는 어떤 경험적 근거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적 근거는 오직 기능적 기하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리적 공간이 기능적 기하와 동일하는 가설은 다른 그 어떤 가설보다도 더 단순하다. 포스터는 물리적 공간이 법칙적으로 일탈적이라는 가설 자체가 비정합적이라고 본다.

  

   물리적 세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며, 이 세계의 기하는 기능적 기하 또는 내재적 기하일 것이다. 내재적 기하와 기능적 기하는 서로 일치할 수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도 논리적으로 존재한다. 내재적 기하는 2차원이지만 기능적 기하가 3차원이거나, 기능적 차원에서는 공간의 통합성이 유지되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공간계가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포스터는 내재적 기하와 기능적 기하가 일치하거나 근접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종류의 기하가 원칙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내재적 기하와 기능적 기하가 일치한다고 보는 가설이 더 단순한 가설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불가사의함 논제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물리적 실재의 경험적 속성에 대한 것만 알 수 있으므로,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내재적 기하와 관련해서는 단순성의 기준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증거와 양립가능한 복수의 기하들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내재적 기하가 이러한 복수의 기하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원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포스터의 입장이다.

 

15.6. 법칙적 우연성

   포스터는 공간 S S의 사물들을 관장하는 물리적 법칙들이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이라고 가정한다. 이를 법칙적 우연성가정이라고 부르자. 과연 사물들의 내재적 본성과 인과적 힘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을까? 하지만 불가사의함 논제로 인해 우리는 그 어떤 필연적인 연관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법칙적 우연성 가정은 받아들일 만한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15.7. 실재론에 대한 거부

   이제, 물리적 공간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는 포스터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물리적 세계 S, 물리적 공간 P가 있다. P의 기하는 S의 기능적 기하다. 포스터에 따르면 PS는 수적으로 구분되는 별도의 개체들이다.

  

   공간 S의 위상관계 T는 공간 S에게 본질적이라고 가정하자. 또한 공간의 점이 갖는 개체성은 그 점이 속하는 공간에 의존한다고 가정하자. 포스터에 따르면, 모든 측면에서 서로 같지만 SP가 구분되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들이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SP의 위상관계는 서로 다르다. SP가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이 경우에서조차도 SP의 양상(modal) 속성은 다르다.

  

   P가 물리적 공간이고 T라는 위상관계를 갖는다고 하자. 이때 세계 S 역시 위상관계 T를 공유하지만, T를 필연적으로 갖는 것은 아니다. 이는 법칙적 우연성 가정에 의한다. 법칙적 우연성에 따라, 세계 ST가 아닌 T'을 자신의 위상관계로 가질 수 있다. 동일자의 식별불가능성 원리를 가정하면, P는 필연적으로 T를 갖지만 S는 필연적으로 T를 갖는 것은 아니므로 PS는 서로 같지 않다. 유사한 예로, 동상 S와 그 동상의 구성물질 M은 물리적으로는 서로 구분되지 않지만 양상적으로는 서로 분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 공간 P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 P는 외부 실재에 적용되는 우연적인 법칙들에 의해 존재하므로, P는 독립적이지 않고 의존적이다. 따라서 실체론적인 물리적 공간인 P는 존재론적으로 실재의 기초적인 구성성분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포스터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포스터는 물리적 개체들과 사실들이 비물리적인 실재에 논리적으로 의존한다고 본다.

 

15.8. 기하학적 다원주의

   포스터의 논증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박할 수 있다. 포스터는 동일성의 필연성과 기하학적 본질주의를 전제하는데, 이 두 전제들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또한 포스터는 기하학적 일원론, 즉 진정한 물리적 공간은 오직 하나의 기하학적 구조만을 가져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와 달리 기하학의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 실재론을 유지할 수 있다고 데인턴은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공간의 종류에 따라 내재적 거리 관계와 가우스 거리 관계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공간 C가 있을 경우, 내재적 기하학과 물리적 기하학(가우스 기하학)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두 기하학을 공통된 C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표현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내재적 측지선과 물리적 측지선을 구분해보자. 물리적 측지선은 특정한 물리적 과정에 의해 측정된 가정 짧은 거리이며, 내재적 측지선은 공간 그 자체의 구조와 구성에 의해서 정의된 선이다. 소박한 실체론자와 달리 신중한(circumspect) 실체론자는 내재적 측지선과 물질적 측지선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인다. 어떤 공간 영역에서 물체가 측지선을 따라 운동하지 않을 때, 소박한 실체론자는 그 공간 영역이 비유클리드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 신중한 실체론자는 그 영역에서만 법칙적 구성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심함으로써 해당 영역에서도 유클리드적인 내재적 측지선을 유지할 수 있다.

  

   데인턴은 내재적 측지선과 물질적 측지선을 모두 받아들이면 기하학적 다원주의는 불가피해진다고 본다. 만약 포스터가 제시하는 것처럼 실제의 공간 구조와 겉보기 공간 구조 사이의 간극이 큰 경우라면 여전히 포스터의 반실재론이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이 세계라면,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내재적 측지선과 물질적 측지선 사이의 차이가 작거나 없다면, 우리는 기하학적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물리적 공간의 실재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데인턴은 본다. 만약 물리적 공간이 내재적 측지선과 물질적 측지선 두 개에 대한 지칭을 통해서만 개별화된다고 선택한다면, 그리고 실제의 사실에서 두 측지선 사이에 차이가 없고 두 선이 일치한다면, 두 기하학이 분기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데인턴의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