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배리 데인튼, [시간과 공간] 요약 정리 14: 만질 수 있는 공간

강형구 2016. 3. 29. 05:48

 

14: 만질 수 있는 공간

(Tangible space)

 

14.1. 곡률의 드러남(Manifestations of curvature)

    앞서 편평한 공간과 굽은 공간은 서로 구분되며, 공간 곡률은 식별 가능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두 가지 근거를 들어 실체론적 입장을 논박한 바 있다. 첫째는 공간의 무해함(innocuousness)이다. 우주 전체가 공간 내의 다른 위치에 있거나 특정 속도로 등속 운동을 해도 변하기 전의 우주와 식별가능한 차이가 없다. 둘째는 갑작스런(nocturnal) 크기 증가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사물들이 두 배로 커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러한 크기 증가가 일어났는지의 여부를 식별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논박은 편평한 유클리드 공간을 전제해야만 타당하다. 하지만 양의 곡률을 갖는 2차원 비유클리드 공간인 구면의 경우, 삼각형의 크기가 커질수록 내각의 합이 180도와 더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삼각형의 크기가 2배로 커진다면 내각의 합을 측정함으로써 크기가 커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곡선은 다각형으로 근사될 수 있고, 모든 다각형은 삼각형으로 분할될 수 있으므로, 어떤 종류의 형태에 대해서도 그 크기가 커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2차원 구형 공간에서 물체가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에는, 물체가 2배로 증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만약 공간이 내부에 다양한 곡률을 갖고 있다면, 물체의 크기 증가는 앞서의 예보다 더 다양한 효과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라이프니츠의 정적 이동 논증과 운동학적 이동 논증에도 적용된다. 공간의 위치에 따라서 곡률이 달라질 것이며, 어떤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는지에 따라서도 곡률이 달라질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공간 곡률에 의한 형태의 변화를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다. 편평한 공간 안에 축구공만한 구형의 굽은 공간이 있다고 하자. 이 구멍에 빛을 쏘면 빛 선들은 수렴했다가 흩어질 것이다. 굽은 공간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면 사물이 왜곡되어 보일 것이다.

  

   공간 주변을 돌아다니며 유심히 관찰하면 굽은 공간의 크기와 형태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굽은 공간 그 자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굽은 공간을 만질 수도 있다. 공간 안으로 물체를 이동시키려 하거나 실제로 직접 공간 안에서 이동하고자 한다면 일종의 탄성과 같은 저항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2. 분리 논제(The detachment thesis)

    라이프니츠의 확장된 실재성 기준은 다음과 같다. 사물들의 관측가능한 행동을 예측하거나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체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원리에 의존한다. ‘분리 논제 :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적 관계는 사물과 공간 사이의 관계에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와 같은 관계론자는 거리적 관계가 공간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네어리히(Nerlich)에 따르면 분리 논제는 오직 유클리드 공간에만 적용되며 비유클리드 공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관계론자는, 유클리드 공간에 대해서 분리 논제는 여전히 타당하며 만약 우리의 공간이 편평하다면 라이프니츠의 논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대응할 것이다. 그러나 네어리히가 보기에 이러한 관계론자의 대응은 적절하지 않다.

  

   크기를 2배 증가시켜도 식별가능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바로 공간이 유클리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공간이 편평하기 때문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며 이는 실체론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유클리드 공간 특유의 대칭성으로 인해서 식별가능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유클리드 공간의 대칭성은 왜 정지 운동과 등속 운동 사이의 차이가 관측되지 않는지, 크기를 2배로 증가시켜도 왜 그 효과를 관측할 수 없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이는 관계론자에 비해서 실체론자의 입장을 더 굳건하게 한다.

 

14.3. 설명을 요구하는 도전(The explanatory challenge)

    관계론자의 입장에서는 편평하지 않은 공간에서 물체들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아무런 힘이 작용하지 않았는데도 특정 지점에서 물체들이 모이거나 흩어지고, 특정 지점에서 물체 내부의 긴장이 발생하는 것 등)에 대해서 별도의 설명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반면 실체론자는 굽은 공간, 물체가 공간의 측지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자연법칙 등을 이용하여 물체들의 움직임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관계론자는 이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과 같은 아주 단순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우주에는 항성이 하나 있고, 항성 주변을 타원궤도를 따라 도는 행성이 하나 있으며, 행성은 매년 주기적으로 비유클리드적인 구멍 중심을 통과한다. 관계론자는 행성이 매년 구멍을 통과할 때 보이는 이상한 행동들을 물체들 사이의 관계만으로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다. 관계론자는 행성이 매년 일정한 시간에 구멍 중심을 통과하므로 구멍 통과 시 발생하는 효과를 시간과 연관짓는 법칙을 제시할 수 있으나, 이 효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왜 이 효과가 행성에게만 나타나고 항성에게는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상황을 좀 더 복잡하게 가정해보자. 우주에 항성이 하나 있고, 항성 주변을 두 개의 행성이 돌고 있는데 두 행성의 궤도 평면은 서로 다르다. 두 행성은 서로 중력과 자기력을 주고받고 있으며, 행성들은 비주기적으로 비유클리드적인 구멍을 통과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계론자는 궤도의 위치와 구멍 통과의 효과를 연결하는 법칙({C1-E1, C2-E2, ...})을 도입해서 행성들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내용이 길고 복잡하며 때려 맞추는 식의 설명을 제시하는 셈이다. 이에 반해 실체론자는 비유클리드적인 구멍을 상정함으로써 단순하고 강력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런데 세 개의 점 입자가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등속운동하여 서로 멀어지고 있는 단순한 상황에서는 관계론자가 실체론자보다 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공간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도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유클리드 공간 자체의 특성을 적용하여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둘째, 실체론적 공간을 사용해서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많은 경우에 관계론자는 그와 같은 단순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론자가 실체론자에 비해서 더 단순하고 경제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도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한다.

  

   이제는 칸트가 제시한, 공간적 실체론을 옹호하는 선험적 논변을 살펴보자.

 

14.4. 고독한 손(A solitary hand)

    철학자 칸트(Kant)1768년의 에세이 공간 영역의 차별화의 궁극적 토대에 관하여에서 공간에 대한 관계론적 개념을 논박하기 위해서 합동하지 않는 대응물(incongruent counterparts)”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칸트는 공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사물과는 독립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거울상체(enantiomorph)는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으나 미끄러지거나 회전(연속 병진 운동, continuous rigid motion)을 통해 합동이 되지 않는 두 사물을 말한다. 반면 준동형체(homomorphic)란 연속 병진 운동을 통해 합동이 되는 두 사물을 말한다. 칸트는 거울상체의 존재가 관계론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텅 빈 우주에 오직 손만 하나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손은 오른손일까 왼손일까?

  

   오직 손 하나만 있을 경우, 이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두 손은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고, 손의 각 부분들 사이의 거리관계는 두 손 모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한 짝의 장갑을 손으로 가져가서 맞춰보면, 손은 분명 오른쪽 또는 왼쪽 장갑 중 하나에만 들어맞을 것이다. 이는 장갑을 가져가기 전에 이미 손이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하게 관계론적인 관점에서는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실체론적 공간과 손 사이의 관계 때문에 손이 이미 오른손 또는 왼손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14.5. 전체적 구조(Global structures)

    이와 같은 칸트의 논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다. 관찰자가 없어도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관찰자가 해당 공간보다 1차원 더 높은 차원에서 어떻게 해당 공간에 등장하는지에 따라서 손이 오른손인지 왼손인지가 결정된다. 이런 답변에 대해 실체론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 것이다. 거울상체가 가능하려면 공간 그 자체의 속성들에 의존해야 한다. , 거울상체는 그 자신의 형태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의 차원성에도 의존한다.

  

   거울상체와 관련 있는 공간의 또다른 일반적인 위상적 속성은 정향성(방향성, orientability)이다. 예를 들어보자. 2차원 평면에서는 bd를 합동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bd로 되게 해서 합동으로 만들 수 있다. 이 경우, 2차원 평면은 방향 설정이 가능하다고 하고 뫼비우스 띠는 방향 설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방향 설정이 불가능한 공간에서는, 국소적으로는 거울상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거울상체가 아닌 사물들이 존재한다.

  

   실체론자는 사물이 거울상체인지 준동형체인지는 공간의 차원, 정향성과 같은 공간 자체의 전체적 속성들에 의존한다고 본다. 반면 관계론자는 공간의 차원성 및 정향성 역시도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법칙으로도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관계론자는 공간의 정향성을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거울상체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앞서와 같은 교훈을 얻는다. 많은 경우 실체론자는 관계론자와 비교해서 단순하고 강력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 반면, 관계론자는 그러한 단순하고 강력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소수의 경우에서 관계론자는 실체론자에 비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시할 수 있기는 하다. 또한 관계론자는 복잡한 방식으로라도 여전히 사물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관계론이 완벽하게 논박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