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128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으로의 초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학철학자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를 만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다. 나는 학사,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을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 특히 그의 시공간 철학을 주제로 삼아 썼다. 내가 지금껏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중 대부분은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내가 번역한 8권의 책 중 5권이 라이헨바흐의 책들이다. 라이헨바흐가 1951년에 사망했으니 나와 그 사이에는 별다른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 그야말로 나는 그와 책을 통해 만났다. 그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정우 선생의 번역서 [시간과 공간의 철학](1928년 독일어, 1956년 영어, 1986년 한국어 출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소 간의 우여곡절과 ..

Becoming a Real Reichenbachian

거듭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주 많은 일들은 우연을 계기로 이루어진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한 서점에서 라이헨바흐의 책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계속 공부하여 과학철학 박사 및 교수가 된 것도 우연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지금까지 변두리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변두리란 중심과는 상반되는 개념어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나는 지금껏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일보다는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을 해왔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억지스럽게 블루오션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정말 흥미롭고 진짜인 것을 발견했는데, 단지 그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라이헨바흐도 그렇다. 내 생각에 라이헨바흐는 칸트만큼이나 ..

생애 최초의 학술상 수상 후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중학생 때까지 받았다고 기억한다. 실제로 중학교 때 나는 시험을 보면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에서 ‘공부를 적당히 혹은 잘 못하는 학생’으로 바뀌었다. 주변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변에는 서울대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 나는 평균 혹은 중상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러니 나 스스로 ‘잘한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    당연히 대학에서도 나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물론 나도 장학금이란 것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그건 전액 장학금이 아니라 수업료 면제 장학금이었다. 우등생에게는 졸업장에 “최우등 졸업” 또는 “우..

한 우물만 파기

1982년생인 나의 나이는 42세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높은 확률로 이미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는 나이다. 내가 18살이던 즈음에 나는 부산의 한 서점에서 한스 라이헨바흐가 쓴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발견했다. 이 책을 발견한 후 읽어보니 재밌지만 어려웠고, 이 책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려 했다. 어떤 대학에 가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었고, 그냥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결과를 토대로 내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에 가려 했다.    운이 좋아 서울대학교에 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 서울대학교에 갔으며, 다른 대학교에 갔더라도 크게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에 가도 라이헨바..

역사와 그 교훈

이미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는 작업을 역사라고도,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철학’이라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의미’를 따져 묻는 활동인데, 그 의미를 묻고 탐색하기 위해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곧 철학이냐? 그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철학적 성찰을 위해 역사적 내용이 주요한 참고가 되지만, 역사와 철학은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종류의 학술적 활동이다. 역사와 철학은 다르면서도 서로에게 핵심적이고 중요하다.    사람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곧 정치를 하거나 경제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왜 필요할까? 내 생각에, 역사가들은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탐구..

교수라는 정체성에 적응하기

국립목포대학교로부터 내가 교수가 될 것이란 통보를 받은 이후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 2주 동안 정말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3월 4일인 어제 총장님으로부터 교수 임명장을 받았고, 오늘은 내 연구실(정보전산원 A10동 319호)에 책상과 책장이 들어왔다. 대학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 시스템에는 대략 모두 가입했고 이제 조금씩 시스템을 이용한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오늘 오전에는 목포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강의했다. 오늘의 출근과 퇴근 모두 목포대학교 통학 버스를 이용했다. 학교 내부 건물들의 위치에도 조금 더 적응한 것 같다. 이렇게 조금씩 목포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

교육 공무원인 과학철학자로서의 마음가짐

어제인 2024. 3. 1.부터 나는 대한민국의 교육 공무원으로서 일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마흔 셋(연 나이로는 42세)의 일이다. 물론 나는 국립대학교에 소속된 교수이긴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교수’라는 이름보다는 ‘교육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이다. 우리나라에서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은 초․중․고등학교(중등 교육)가 아닌 대학교이며, 그중에서도 나는 사립대학교가 아닌 국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행정’ 업무가 아닌 ‘교수’ 업무를 하게 된 것이다. 우선 나는 나의 행운에 너무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박사과정을 거쳐 계속 대학에서 강의 및 연구 경력을 이어오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의 ..

그냥 하다 보면 편하게 된다

작년 2월 말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난 뒤 주변 사람들이 나를 ‘강박사님’이라고 불러준다. 아직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참 기분이 좋다. 내 명함에도 ‘이학박사,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이라고 적혀 있다. 내가 박사라니!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박사다! 학위증명서도 있다! 게다가 무려 과학사 및 과학철학 박사다! 오예! 박사학위를 갖게 되니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박사학위가 없으면 강의를 못 한단다. 박사학위를 갖게 되니 이따금 주변에서 강의 혹은 발표 의뢰를 해오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의뢰를 마다하는 법이 없다. 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강의했지만 ..

성실한 과학철학 연구자

내 블로그(blog)의 제목은 “성실한 과학철학 연구자”이다. 오늘은 문득 내 블로그 제목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 글을 쓴다. 예전 블로그 제목은 “凡人日記(범인일기)”였다. ‘평범한 한 사람의 일상적인 기록’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정말 평범한 사람이란 없다. 사람이란 아주 희귀하고 독특한 동물이다. 모든 사람이 독특한 생각과 개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다. 나 또한 한 명의 사람이며 내 고유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 제목을 “성실한 과학철학 연구자”라고 바꿨다. 내 블로그를 몇 번 들어오신 분들은 아마 이 말을 지겹도록 읽으셨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좋아했고 지금까지 계속 공부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의 갈릴레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갈릴레오(1564-1642)가 최초로 망원경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미 갈릴레오보다 먼저 망원경을 만든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왜 오늘날 우리는 망원경 하면 갈릴레오를 떠올릴까? 갈릴레오가 자신의 물리학적, 공학적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서 망원경을 상당히 개량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이 대개 적군의 동태를 관찰하기 위해 혹은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를 보기 위해 망원경을 활용했다면, 갈릴레오는 그런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았다. 그는 달, 금성, 태양, 목성을 보고 그런 천체들이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과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공부하고 있는 요즘, 나는 이와 같은 갈릴레오의 이야기가 21세기인 오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