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 우물만 파기

강형구 2024. 5. 24. 09:29

   1982년생인 나의 나이는 42세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높은 확률로 이미 삶을 마감했을 수도 있는 나이다. 내가 18살이던 즈음에 나는 부산의 한 서점에서 한스 라이헨바흐가 쓴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발견했다. 이 책을 발견한 후 읽어보니 재밌지만 어려웠고, 이 책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려 했다. 어떤 대학에 가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었고, 그냥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결과를 토대로 내가 진학할 수 있는 대학에 가려 했다.

 

   운이 좋아 서울대학교에 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말 운이 좋아서 서울대학교에 갔으며, 다른 대학교에 갔더라도 크게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에 가도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과 공간의 철학]은 이정우 선생이 박사과정 학생일 때 번역한 책이었고, 이 책의 번역 이후 이정우 선생은 철학의 다른 영역을 연구했다. 서울대 철학과에는 조인래 교수님이 계셨지만, 교수님은 논리경험주의 특히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깊이 연구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혼자 공부했다. 나는 서울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이 대학만의 특별한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학부 4학년 때 라이헨바흐의 교수자격 취득논문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을 직접 번역했다. 그리고 그 번역의 결과를 토대로 졸업논문을 썼다. 왜 번역하느냐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번역한다. 출판을 목적으로 번역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출판되면 더 좋겠지만, 일차적 목적은 이해이지 출판이 아니다. 다행히 고전번역을 출판해주는 출판사를 만나 지금까지 번역한 라이헨바흐의 저서들은 계속 출판되고 있다. 그러면 꼭 번역해야 정확하게 이해하나? 전혀 아니다. 그냥 내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과학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나는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을 연구해서 석사학위,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금까지 그의 책 4권을 번역했고, 또 다른 한 권의 책 [경험과 예측]이 조만간 출판된다. 대구과학관에 남아 있었다면 거기서 일하면서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했을 것이다. 지금은 목포대학교에 와 있으므로, 여기에서 일하면서 계속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한다. 라이헨바흐는 1891년에 태어나 1953년에 죽었다. 나는 1982년에 태어났고, 아마도 2047년 즈음에 퇴임할 것이다. 라이헨바흐와 나 사이에는 10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는 한국의 과학철학자로서 100년 전의 과학철학을 따라잡아 우리(한국)의 것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내가 공부할 때는 라이헨바흐 연구자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교수가 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정식 라이헨바흐 연구자가 생긴 셈이다. 나는 한국 최초로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해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라이헨바흐의 주요 저술을 번역하고 이를 토대로 논문을 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작업만으로도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내가 평생을 할 일이 차고도 넘친다. 그리고 이 일이 나에게는 가족 다음으로 중요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것,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런저런 직장을 갖게 된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내가 진정 나의 의지로 한 일은 과학철학, 특히 한스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한 것과 지금의 아내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이룬 것이다. 그게 나에게는 본질적이며 가장 중요하다. 다른 모든 일은 그에 비하면 부수적이며 그저 편안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