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역사와 그 교훈

강형구 2024. 5. 20. 17:10

   이미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는 작업을 역사라고도,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철학’이라는 것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의미’를 따져 묻는 활동인데, 그 의미를 묻고 탐색하기 위해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곧 철학이냐? 그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철학적 성찰을 위해 역사적 내용이 주요한 참고가 되지만, 역사와 철학은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종류의 학술적 활동이다. 역사와 철학은 다르면서도 서로에게 핵심적이고 중요하다.

 

   사람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곧 정치를 하거나 경제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왜 필요할까? 내 생각에, 역사가들은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탐구하여 그 일들의 의미를 서술함으로써 우리가 과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그것이 역사가들의 존재 이유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는 ‘역사적 이해’가 필요할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이해는 어떤 대상의 개괄적 모습을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잘 파악하게 해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심지어 그 대상이 자신을 파악하는데도 역사는 제법 유용한 역할을 한다.

 

   과학자들에게 왜 과학의 역사가 필요한가? 과학의 역사는 과학자들 및 미래에 과학자가 될 사람들을 위해 과학의 변천 과정을 나름의 합리성을 갖추어 일목요연하게 서술함으로써, 과학이라는 인간적인 활동의 목적과 의의에 대해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까닭에 과학자들은 과학의 역사가를 존중하며 그 고유의 가치를 인정한다. 물론, 과학자들은 과학적 실천의 측면에서 자신들이 과학의 역사가보다 우월하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문제를 풀고, 실험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며 과학의 역사 속에 채워질 내용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과학의 역사가가 아닌 과학자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자 스스로가 과학의 역사가가 되고 과학의 철학자가 되는 일이 바람직할 수 있다. 실제로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는 그러한 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 1849-1925)은 그 자신이 수학자이자, 수학 역사가이자, 수학 철학자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1879-1955)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였지만, 그 자신의 방식으로 물리학의 역사를 서술했고(질점의 물리학에서 장의 물리학으로),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과학과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철학이 분리된 것은 학문의 전문화 과정의 결과다. 이러한 결과의 긍정적 효과가 부정적 효과보다 더 클까? 어쨌든 나의 경우 이러한 분리가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내가 볼 때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철학은 동시대의 과학을 기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직접 과학의 과거를 들여다보거나 과학의 의미를 천천히 따져 묻는 작업을 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작업을 위한 훈련 역시 잘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과학의 역사와 과학의 철학은 과학을 더 잘 혹은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과학의 역사와 철학이 존재한다.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과학과는 별도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반대할 것이다. 이는 삶을 위해 철학이 있는 것이지 철학을 위해 삶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유사하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해 나는 과학철학을 과학사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으며, 과학철학을 동시대의 과학적 실천과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이 예전에 어떠했고 지금 어떠한지를 계속 살펴봐야 과학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정치를 하는 활동과 정치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활동이 다르듯,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는 활동은 실제로 과학적으로 실천하는 활동과는 다르지만, 서로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실로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