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Becoming a Real Reichenbachian

강형구 2024. 5. 31. 10:07

   거듭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아주 많은 일들은 우연을 계기로 이루어진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한 서점에서 라이헨바흐의 책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계속 공부하여 과학철학 박사 및 교수가 된 것도 우연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지금까지 변두리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변두리란 중심과는 상반되는 개념어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나는 지금껏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일보다는 남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을 해왔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억지스럽게 블루오션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정말 흥미롭고 진짜인 것을 발견했는데, 단지 그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라이헨바흐도 그렇다. 내 생각에 라이헨바흐는 칸트만큼이나 흥미로운 철학자이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리나라에 라이헨바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아야 한다. 그런데 주변에서 찾아봐도 라이헨바흐 연구자는 별로 없다. 이 점이 내게는 상당히 기묘하게 여겨진다.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왜 마땅히 관심을 받아야 하는 철학자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과학철학 연구자로서 나의 목표는 라이헨바흐와 같은 과학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팀 모들린(Tim Maudlin) 수준으로 과학철학을 하는 것인데, 그래도 나에게 더 귀감이 되는 철학자는 라이헨바흐다. 내가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말하면, 주변의 많은 사람이 ‘라이헨바흐를 뛰어넘는 더 훌륭한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말이 나를 위한 것임은 아주 잘 알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는 극히 비현실적인 바람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철학자가 흄이나 칸트를 넘어서는 철학자가 되기 쉽겠는가?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할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다. 올해 내 나이가 42세인데 나 자신의 역량을 내가 아직 잘 모르겠는가?

 

   이제 국립대학교의 과학철학 전공 교수가 되었으니, 더 철저하게 라이헨바흐를 연구할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연구하려면 다른 저자들도 들여다봐야 한다. 예를 들어, 라이헨바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경쟁했던 바일(Weyl), 카르납(Carnap), 슐리크(Schlick), 아인슈타인(Einstein), 러셀(Russell)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이게 쉬운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평생을 연구해도 모자랄 인물들이다. 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 괜히 헛된 욕심을 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라이헨바흐를 넘어서는 철학자? 사실 나는 언감생심 그런 바람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라이헨바흐를 연구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라이헨바흐를 연구하는 데 100시간을 투자했다면, 나 이후의 다른 연구자들은 나의 연구를 바탕으로 라이헨바흐 연구에 10시간만 투자하면 되게끔 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목표가 너무 소박한가? 그런데 나의 능력이 그 정도인데 어쩌란 말인가?

 

   지금 나의 목표는 내가 교수직에서 퇴임하기 전까지 라이헨바흐가 다다랐던 수준까지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설정한 나의 역할은 르네상스 시기의 학자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라이헨바흐의 철학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 그의 철학을 넘어서서 극복하는 것은,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나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한 과학철학 연구자가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꼭 필요하며 나는 그런 사람이 나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한다.

 

   나의 목표는 Becoming a Real Reichenbachian이다. 진정한 라이헨바흐주의자 과학철학자가 되는 것. 그 정도로 제대로 된 과학철학을 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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