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으로의 초대

강형구 2024. 6. 8. 06:55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학철학자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를 만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다. 나는 학사, 석사, 박사 학위 논문을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 특히 그의 시공간 철학을 주제로 삼아 썼다. 내가 지금껏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 중 대부분은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내가 번역한 8권의 책 중 5권이 라이헨바흐의 책들이다. 라이헨바흐가 1951년에 사망했으니 나와 그 사이에는 별다른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 그야말로 나는 그와 책을 통해 만났다. 그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정우 선생의 번역서 [시간과 공간의 철학](1928년 독일어, 1956년 영어, 1986년 한국어 출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소 간의 우여곡절과 순전한 행운이 거듭되어 나는 국립목포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내가 국립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가장 좋은 점은, 이제 더 마음 편하게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나 자신이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제대로 연구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을 통해 학위를 받은 것에도,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실제로 제대로 된 라이헨바흐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한 상당한 전문적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라이헨바흐 과학철학 연구는 나 이전에 전두하 선생, 이정우 선생, 우정규 선생, 김회빈 선생, 최현철 선생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재로서는 내가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다른 과학철학 연구자가 연구 중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 다수의 흄 연구자와 칸트 연구자가 있듯, 나는 진심으로 나보다 더 뛰어난 라이헨바흐 연구자가 나오기를 기원한다.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이제 나는 학술계에서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에 관한 연구가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므로, 내가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에 관한 번역서, 연구서, 연구논문을 계속 출간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대학교수로서 경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그런 상황이니 더 욕심 없이 라이헨바흐 과학철학 연구를 이어갈 수 있다. 먼저, 나는 나의 역할이 라이헨바흐 과학철학 원전에 대한 번역 및 이를 토대로 한 기초적인 연구라고 본다. 실로 라이헨바흐 철학의 잠재성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확인한 것은, 라이헨바흐가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제시한 다이어그램을 굉장히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극히 일부의 사례일 뿐이다. 그의 기호논리학과 확률 이론 및 인과 이론은 계속해서 과학철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아이디어들을 재발굴하여 오늘날의 물리학 철학 논의에 활용할 수 있을 것임은 거의 분명하다.

 

   나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대학에서 수학 또는 물리학 또는 통계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복수전공 또는 부전공한 우수 인재가, 석사 혹은 박사과정에서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를 바란다. 특히 나는 그 인재가 대학원 수업에서는 여러 과학철학 논의를 두루 습득하되, 수업 이외에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 연구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기묘하게도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면서도 아직 그 철학의 제대로 된 진가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과학철학 연구자가 라이헨바흐 과학철학을 제대로 깊이 연구한다면, 나는 그 연구자가 분명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하는 작업은 그러한 우수한 연구자를 위한 참고 자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전혀 나 스스로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