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지조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것

강형구 2024. 7. 16. 17:47

   뜻이 확고하다면 갈 길은 분명해진다. 라이헨바흐의 [경험과 예측]을 번역했고, 지금은 [시간의 방향]을 번역하고 있다. 나는 꼭 번역되어야 하지만 누구도 번역하지 않았던 책을 번역한다. 혹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번역할 시간에 논문을 써라.” 그런데 내 경험상, 번역을 하면서 꼼꼼하게 읽어야 무엇이 흥미로운 지점이며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지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고, 이러한 파악을 통해 논문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나로서는 번역함으로써 논문의 소재가 나온다. 그러므로 나는 논문을 쓰기 위해 번역한다. 중요한 과학철학 원전의 경우, 한 권을 번역하면 그 책에 관하여 최소한 1편 이상의 논문을 쓸 수 있다.
 
   내 생각에 내가 걷는 길은 너무 안전한 길이다.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중요 과학철학자들의 원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것은 최소한 본전은 보장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 1884-1966)를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필립 프랑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고, 당연히 그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필립 프랑크는 아인슈타인의 동료 물리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빈 학단의 중요 구성원인 논리경험주의 과학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빈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활발하게 학술 활동을 펼쳤다. 그러므로 과학철학 분야에서 프랑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다면 아주 풍성한 결과를 얻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필립 프랑크를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
 
   필립 프랑크 뿐인가?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토머스 쿤(Thomas Kuhn), 위슬리 새먼(Wesley Salmon) 등등 연구할 사람은 너무 많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과학철학을 하는 것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주제 혹은 누구를 연구할 것인지를 확고하게 정해서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 주제 혹은 연구 대상을 계속 바꾸면 제대로 된 성과를 얻어낼 수 없다. 나는 여전히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옳다고 믿는다. 당연히 경직된 태도보다는 유연한 태도를 갖춰야 하는 여러 사안이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주제에 관해서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불도저처럼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비록 나는 라이헨바흐를 집중해서 연구하고 있지만, 라이헨바흐 말고도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많은 과학철학자가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내가 라이헨바흐를 연구하는 것처럼 루돌프 카르납이나 필립 프랑크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연구하는 과학철학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나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도 있다. 대체 뭐가 두려운가? 요즘 인기 있는 학자 혹은 주제에 관해서만 연구하라는 법이 있는가? 내가 정말 가치 있다고 믿는 학자 혹은 주제라면, 그에 대해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지조 있게 계속 연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오늘날 중요한 과학철학 주제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에 대해서도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자신에게 고유한 연구 분야를 확고하게 설정하고 이를 계속 꾸준하게 추진해 나가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A가 유행이면 A를 연구하고, 그 이후에 A가 아니라 B가 유행이면 또다시 B를 연구하는 행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사람의 삶의 행보가 이후의 세대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으려면, 일관되고 꾸준하게 하나의 길을 걸어가서 결과적으로는 길고 선명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유명해지는 것, 인기를 얻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실제로 내게는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오로지 나는 내게 주어진 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