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경험주의 과학철학(3/3)

강형구 2024. 4. 9. 16:13

   특정 시대의 과학기술이 보인 성공을 조직의 권력 체계와 분리하여 탐구한 것은 그리스인의 큰 공헌이었고,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것 또한 그리스만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실용적 수리과학의 연역적 재구성이 성공했다는 실제 현상에 신화적이라 할 수 있는 환상적인 해석을 부여했다.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수학은 실제 세계의 다양한 측면들에 잘 적용이 되는데, 실제 세계에서는 수학적 개념(원, 삼각형, 사각형 등)들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대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수학적 개념의 세계가 실제 세계와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해석이었다.

 

   이러한 해석의 위안과 매력은 너무도 강력하여, 소크라테스는 육체가 죽어도 정신이 불멸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기꺼이 독배를 마시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실로 그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불멸하는 ‘철학의 화신’이 되었다. 플라톤이 “대화편”을 통해 그리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플라톤의 사상이 상당 부분 투영된 소크라테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이 고안해 내는 추상적 개념들에 대한 이러한 매혹적인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지성적인 인간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실로 우리는 동시대의 수학자와 이론물리학자 중에서 상당한 수의 플라톤주의자를 찾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이성주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체계화되었다. 과학기술 특히 연역적 수학의 성공이라는 ‘현상’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을 제공한 것이다. 사실 굳이 이러한 해석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수학자들은 이러한 해석 없이도 수학적 탐구를 잘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단순한 부산물이고 별 유용성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왜냐하면 수학을 포함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성주의적 해석은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교육받고 훈련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의미와 사명감을 강력하게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체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와 이성적 사고를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의 세계를 분리하고, 후자의 세계(개념의 세계)는 전자의 세계(경험의 세계)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관점을 ‘이성주의적 관점’이라 한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관점, 즉 경험의 세계와 개념의 세계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세계는 분리되지 않으며 경험의 세계로부터 개념의 세계가 도출된다(유도된다)는 관점을 취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성주의적 관점을 대표하는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곧바로 자신의 스승에 대해 반대하여 ‘경험주의적 관점’을 제안했다. 의사의 아들이자 그 자신이 유능한 생물학자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로 다양한 형태의 생물들을 관찰하고 분류하고 해부하며 세계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을 익혔을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는 수학자와 과학기술자들이 자신들의 탐구 과정에서 이성주의적 관점 또는 경험주의적 관점을 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전혀 취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철저하게 실용적인 차원에서 과학기술에 접근했다면, 그러한 관점 역시 일종의 경험주의적 관점이라 분류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해 특정한 철학적 관점은 인간 공동체가 과학기술 탐구를 통해 자연과 상호작용을 해 나가는 중요한 추진력을 제공했다. 어떤 관점을 취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과학기술을 탐구하거나 성찰하는 개인의 몫이겠지만, 나는 주로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의 과학기술을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문제를 따져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