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헨바흐는 최종적으로는 에를랑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사실 그는 처음에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공학을 공부했었고, 대학 입학 직전까지도 그의 장래 희망은 ‘기술자’였다. 교수자격 취득논문 제출 이후 그가 1920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은 슈투트가르트 공대였다. 그곳에서 그는 공학, 수학, 물리학, 철학과 같은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면서, 학술적으로는 상대성이론 속 시간과 공간에 초점을 맞춰 이에 대한 상세한 ‘철학적 분석’을 진행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분석 작업이 1928년까지 이어졌고, 그 결실이 『시간과 공간의 철학(Philosophie der Raum-Zeit Lehre)』으로 맺어졌다.
1920년에서 1924년 사이에 라이헨바흐는 ‘상대론의 철학자’로 부상했다. 상대론에 관련된 다양한 기고문을 쓰고 물리학 학술지에 상대론을 비판하는 논문에 대한 재반박 논문을 다수 게재함으로써 명실공히 아인슈타인의 ‘철학적 변론자’가 된 것이다. 라이헨바흐 이전에 상대론의 철학적 의의를 논한 대표적인 학자로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1882-1936)를 들 수 있다. 라이헨바흐가 상대론과 시공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전면으로 들어서면서 일종의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라이헨바흐와 같은 나이였던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1891-1970) 역시 박사 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그 경력 초기에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다수의 논문을 집필한 바 있었다.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주로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력했던 카르납은 1926년 정도에 이르러 그 철학적 역량을 인정받고 슐리크가 있던 빈(Wien) 대학으로 갔다. 비슷한 시기인 1926년 즈음에 라이헨바흐는 상대론과 시공간 철학 전문가로 부상하여 막스 플랑크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부름을 받아 베를린 대학 ‘물리학부’에 부임했다. 또한 흥미롭게도 빈에 있던 카르납은 『세계의 논리적 구조(Aufbau라고 부름)』를, 베를린에 있던 라이헨바흐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을 같은 해인 1928년에 출판했다. 전문적인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니면서도 수학과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새로운 세대의 철학자들이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 시기에 라이헨바흐와 카르납의 철학적 행보를 역사철학적으로 비교 및 대조하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것이고 나 역시 이와 관련한 초보적 연구를 한 바 있다. 간략하게 나의 견해를 요약하자면, 라이헨바흐는 상대론적 시공간에 관한 경험주의적이고 실재론적인 관점을 취했고, 카르납은 좀 더 과학 언어의 구문론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이론을 바라보는 규약주의적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두 사람의 철학적 입장 혹은 스타일의 차이가 이후에도 상당히 일관되게 이어진다고 본다. 어쨌든, 라이헨바흐 시공간 철학의 핵심은 규약주의가 아니라 경험주의이자 실재론적 관점이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1924년 저작 『상대성이론의 공리화』이다.
뉴턴(Newton, 1642-1727)은 별도의 수학적이고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 존재(실재)한다고 했다. 칸트(Kant, 1724-1804)는 시간과 공간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형식이라고 했다. 가우스(Gauss, 1777-1855)와 리만(Riemann, 1826-1866)은 공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 실제로 세계의 물리적 공간이 어떤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는지는 구체적인 물리적 과정을 통해 측정해야 한다는 관점과 함께 물리적 공간을 ‘국소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헬름홀츠(Helmholtz, 1821-1894)가 가우스와 리만이 제시한 관점의 경험적 측면을 부각했다면, 푸앵카레(Poincare, 1854-1912)는 물리적 기하학의 경험적 결정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함을 보였다. 구체적인 물리적 과정을 통제하는 물리학의 법칙을 조정하면, 늘 우리가 원하는 물리적 기하학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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