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상대성이론과 시공간(1/3)

강형구 2024. 4. 16. 20:32

   라이헨바흐는 1915년에 에를랑겐 대학에서 수학 교수와 철학 교수의 공동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물리적 실재를 수학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어 확률 개념이 하는 역할”이었다. 라이헨바흐는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칸트가 말했던 ‘선험적 종합 원리’(예를 들면, 시간, 공간, 인과성의 원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지식의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칸트 철학의 형식을 빌려 제시한 것이다.

 

   박사 학위 취득 직후 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 참전했다. 그는 통신부대에서 일했는데, 아마 뛰어난 공학적 계산 및 추론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병에 걸려 도중에 전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통신업무의 경험을 살려 전쟁 이후에 베를린에 있는 전기통신 회사에서 일했고 공학자로서 제법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과 철학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마침 베를린 대학에서 열렸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세미나에 청강생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게 아마도 1918-1919년 겨울 학기였을 것이다.

 

   독일이 자랑하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자신의 비판 철학을 통해 진, 선, 미의 문제를 모두 다루는 이성주의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 윤리적 법칙에 관한 지식,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판단 모두를 다룬 셈이다. 라이헨바흐의 박사 논문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라보는 칸트적 관점을 계속 확장 및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런 라이헨바흐에게 상대성이론은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선험적 종합 원리’라고 평가했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이 이론에 의해서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헨바흐가 추구한 철학의 특성상 독일 대학의 철학과에 임용되어 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수학과 자연과학 지식을 분석함으로써 그 인식적 함의를 도출하는 철학은 전통적인 철학과 교수들이 수용하기 힘들었고, 그렇다고 수학과나 물리학과에서 그러한 철학을 전공한 학자를 채용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통신공학을 업으로 삼으며 살려 했던 라이헨바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 세미나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다시 철학으로 복귀했다. 그는 교수가 되기 위해 1920년에 교수자격 취득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에게 헌정되었으며 그 제목이 「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지식」이다.

 

   칸트가 뉴턴 역학의 눈부신 성공을 일종의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였듯, 라이헨바흐 역시 상대론의 경험적 성공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서의 논의를 진행했다. 우선 라이헨바흐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전제’가 되어 그 지식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라고 여겨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상대론에 의해서 반박되었다면, 과연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다음으로, 물리적 지식의 기초가 되어 물리학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동등화(coordinative) 원리’라 한다면, 이 동등화 원리 역시 물리적 지식의 발전 과정에서 ‘연속적 근사의 과정’을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만약 선험적 종합 원리가 존재한다면, 철학자는 인간의 인식 능력 중 하나인 순수이성을 분석하여 그 원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면 될 터이다. 하지만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의 발전은 그와 같은 선험적 종합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의 과학 지식 근저에 있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마저도 이후의 과학 발전에 따라 다른 원리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음을 보였다. 이렇듯 진리에 대한 칸트의 인식적 기획이 실패한 상황에서, 과연 철학 특히 자연과학의 인식론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이헨바흐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그 자신에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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