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경험주의 과학철학(1/3)

강형구 2024. 4. 2. 13:50

   생명체인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다양한 현상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살아왔다. 주로 인간의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체계화된 지식을 축적해 왔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의 축적, 개선, 전파를 위해 언어의 발명 및 정교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세계의 여러 현상을 본뜨고 세계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단순한 형태의 서사(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 개인 혹은 인간 공동체에 중요하게 떠오른 것은 ‘해석’과 ‘의미’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집단을 이루어야 했고 개체들 사이에서의 정보 교환과 의사소통이 중요하게 되었다. 인간 조직 내에서 소통 수단인 언어가 정교화되고 서사가 형성될 수 있게 되면, 조직의 구성원들을 결속하고 앞으로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 세계 속 우리 조직의 의의와 가치는 무엇인지, 우리 조직의 지도자는 어떤 특별한 의미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 부여가 이루어진다. 이런 이야기를 세계를 해석하는 일종의 서사적 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서사적 체계 중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체계를 오늘날의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신화(myth)’라고 부른다. 이러한 신화적 서사 구조 아래에서 인간은 거대하고 복잡한 조직을 만들었고, 조직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정교한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 조직이 커짐에 따라서 인간 집단 안에서도 그 분화가 심화하기 시작했다. 계급적 분화와 직업적 분화가 이루어졌고, 조직 내의 세분화에 병행하여 각종 예절과 의복 문화 등도 발전했다. ‘신화’ 시대의 문명은 신화라는 서사를 조직적으로 체화한 가운데 자연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연에 대한 인간 조직의 통제 능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제 나는 서술의 시선을 서양의 유럽 쪽으로 조금 더 밀착한다. 다만 동양의 과학기술이 적어도 14-15세기 정도까지 서양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는 것, 동양과 서양은 분리되지 않고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서로 적지 않게 교류하며 상호작용했다는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나는 그리스와 동방의 문화를 함께 생각한다. 기원전 10세기 무렵(대략 3천 년 전) 이집트,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의 왕조는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지식 및 응용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에 비해 서방의 그리스는 변방에 있었고, 문명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발전된 문명의 산물을 소비하는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해’와 ‘해석’이다. 흔히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과 과학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할 때 그것의 의미는, 이미 발전되어 있던 동방 과학기술 문명의 성과들에 대해 그리스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음을 뜻한다. 강력한 전제 정권 아래에서는 그와 같은 다른 방식의 이해와 해석이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대안적인 이해와 해석은 곧 기존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취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의 등장이 새로운 권력을 의미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자치 국가들의 연합체였던 그리스, 이미 발전한 문명의 성과와 산물을 누릴 수 있던 그리스, 변방에 있어 강력한 왕조의 큰 위협이 되지 못했던 그리스에서는, 소수지만 지역 곳곳에서 언어적 서술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들을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탈레스(Thales)는 바로 그와 같은 새로운 그리스의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마 동방의 전제 국가 아래에서도 그와 같은 새로운 사고의 시도가 있었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