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와 20세기 경험주의 과학철학(1/2)

강형구 2024. 2. 14. 16:53

 

   과학철학은 현재 시점에서 인간 공동체가 수립한 과학지식 체계가 갖는 여러 측면들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학문이다. 인간 공동체가 강력한 과학지식 체계를 수립하여 자연의 여러 현상들을 예측하고, 설명하고, 조작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과학지식 체계의 ‘의미’ 혹은 ‘가치’이다. ‘의미’와 ‘가치’는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제시될 수 있으며, 우리가 과학지식의 어떤 ‘의미’ 혹은 ‘가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지에 따라 과학지식에 관련된 우리의 실천 양식 또한 변한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는 뛰어는 기술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 두 문명은 정교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고, 계절과 천체 현상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동방에 비할 때 고대 그리스는 기술 발전 수준으로 보면 후진국이었다. 하지만 탈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동방의 발달된 문명을 창조적으로 변환시켰다. 연역적 증명의 개념을 도입하여 동방의 실용적 기하학을 연역적 기하학으로 둔갑시켰다. 더 나아가 플라톤은 기하학에 관한 환상적인 해석을 도입했다. 기하학적 도형으로 대표되는 완전한 개념적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모사물이라는 해석이었다.

 

   서양철학사 전체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 달기라고 한 철학자가 이야기했듯, 그리스가 발명한 연역기하학에 대해 플라톤이 제시한 이 해석은 이후의 과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의 해석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제시한 사람은 바로 플라톤 아래에서 20년 동안 수학했던 그의 수제자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를 가리키는 스승 플라톤을 바라보며 우리가 자세히 살펴봐야 할 곳은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지상의 세계, 경험의 세계라고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때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의 세계는 우리가 그 속에 존재하며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와 별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은 별개의 세계가 아닌 바로 경험세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수학적 지식을 포함한 과학 지식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크게 과학 지식에 대한 이성주의적 해석과 경험주의적 해석을 대표한다. 이성주의적 해석을 채택하는 사람은, 과학 지식의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성적 직관 및 사고 능력에 의해서 파악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경험적 요소가 과학 지식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부차적인 것이며 이성적 요소에 종속된다고 본다. 이에 반해 경험주의적 해석을 채택하는 사람은, 과학 지식의 핵심적인 내용은 궁극적으로 감각 경험을 통해 파악된 이 세계 속 다양한 정보로부터 추출 및 일반화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이성적 요소가 과학 지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세계의 참됨과는 관련이 없는 도구적 역할을 하는 것에 머무른다고 본다.

 

   서양과학의 역사를 보면, 과학 지식에 대한 이상과 같은 2가지 종류의 해석은 늘 엎치락뒤치락하며 과학 탐구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적 해석이 강세를 띠었다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수학적 단순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다양한 자연 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길을 열었다. 뉴턴 이래로 자연에 대한 수학적 분석이 포기된 적은 결코 없었지만, 과학자마다 어떤 사람은 수학적 직관과 논리에 더 강조점을 둔 반면 다른 사람은 수학을 그저 일반화와 형식화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중시하며 여러 자연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