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관 이야기

로버트 크리스 지음, [측정의 역사] 발췌

강형구 2017. 9. 5. 15:33

 

 

머리말

- 하지만 척도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조물주는 자도, 저울도 창조하지 않았다. (9)

- 척도는 자의적이다. (9)

- 근대 과학의 태동기인 1600년대와 1700년대에 프랑스 과학자들이 보편적 측정 체계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목표는 모든 나라에 자기네 체계를 보급하는 것, 그리고 자연의 불변 속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었다. (10)

- 현재, 자연 현상에서 도출되지 않은 기본 척도는 질량뿐이다. (10)

1: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 사물의 양을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모르는 사물(모래 위의 낯선 발자국) 속성을 아는 사물(자기 발)의 동일한 속성과 비교하는 것이다. (14)

- 최초의 측정 도구는 인체였다. (14)

- 척도의 요건: 접근성, 적합성, 신뢰성. (15~16)

- 표준을 소유한다는 것은 정치적사회적 권력, 즉 왕의 권위와 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었다. (25)

- 도량형은 신뢰와 전문성을 갖춘 집단을 토대 삼아 사회 제도로 굳게 자리 잡았다. (25)

- 체계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기하학 원리가 삼각형과 사각형을 지배하듯 체계의 규칙이 단위를 지배한다... 측정 방식도 달라진다. 임시방편 척도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구체적 사물을 끌어다 세상에 갖다 댔지만 체화 척도를 받아들인 뒤로는 (대체할 수 있고 오류 가능성이 있는)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 체계를 끌어다 세상에 갖다 댄다. (26)

- 변화가 일어난 것은 21세기 들어서다. 과학자들은 길이, 질량, 시간을 비롯한 모든 기본 단위를, 해가 뜨고 지는 것보다도 훨씬 보편적이고 정확한 절대 표준에 연계하기 시작했다. (31)

2: 고대 중국, 도량형과 음악

- 인체 척도의 기본 단위는 척과 촌이다. 척은 발 길이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6~24센티미터다. 촌은 본디 엄지손가락 굵기였으나 기원전 400년 이전에 척의 10분의 1로 정해졌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가 끝나기도 전에 길이 단위는 진짜 발이 아니라 쉽게 복제할 수 있는 막대기로 체화되었다. (38)

- 황제가 된 진시황은 맨 먼저 제국의 도량형을 통일하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칙령을 도량형에 새기거나 주조하라고 명령했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량형이 통일된 것이다. (42)

- 왕망은 도량형의 정의를 기록으로 남기는 전통을 세웠으며 청동제 측정 기구를 처음 보급했다. (43)

3: 서아프리카, 금분동

- 금분동이란 금으로 만든 저울추가 아니라 금가루 무게를 달 때 쓰는 저울추로, 재질은 놋쇠다. (53)

- 서양에서 교육받은 연구자는 저울과 금속 저울추를 보면 무게 측정- , 어떤 금속의 무게를 딴 금속과 비교하여 결정하는 행위-을 떠올린다. 반면에 아칸족에게 저울, 자갈, 숟가락, 금가루 따위는 모두 화폐 가치를 평가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58)

- 니앙고란-부아는 박사 논문을 증보한 세 권짜리 단행본에서 놋쇠 저울추 체계가 작동하는 과정과 금을 빌리고 갚는 금전 거래의 사례를 통해 저울추의 사회적 맥락, 지금까지의 논의, 무게 측정의 역할 등을 밝혀냈다. (60)

4: 프랑스, 일과 삶의 현실 (중요한 장)

- 국민공회의 명령으로 제작되어 1799년에 정부에 제출되었죠. 미터는 사분 자오선의 1000만 분의 1,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의 무게로 정의되었어요. 자연 표준, 즉 불변의 자연 현상을 체화한 것이죠. (78)

- 에탈롱을 제작한 직접적 계기는 프랑스 혁명이었다. (78)

- 중세가 시작된 5세기경에 프랑스와 유럽의 도량형은 이미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갈리아 지방에는 나름의 도량형이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이곳을 정복한 뒤에 로마 제국은 길이 단위 페스pes와 무게 단위 리브라libra 등 자신들의 기본 단위를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 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 피정복지에서 쓰이던 단위들은 사라지거나 달라졌다. 프랑스에서는 피에pied가 길이의 기본 단위였으며 1피에가 12푸스pouce, 6피에가 1투아즈toise였다. 무게의 기본 단위는 리브르livre였다. 독일의 푼트Pfund, 네덜란드의 폰트pond, 영국의 파운드pound도 라틴어 `리브라'에서 비롯했다. 로마 이전의 도량형 중에서 땅 넓이를 일컫는 아르팡arpent과 거리를 일컫는 리그ligue 등은 중세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개수를 셀 때 숫자를 쓰는 것은 아랍의 영향을 받았다. 각 나라는, 아니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로마 단위를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으며, 현지의 필요와 여건에 따라, 심지어 측정 대상에 따라 단위의 크기와 이름을 바꾸었다. (79)

- 2세는 길이 표준기와 무게 표준기를 만들었으며 이 표준기는 파리 국립기술공예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79)

- 단위는 나라와 나라뿐 아니라 (프랑스의 경우처럼) 구와 구, 심지어 시와 시가 달랐으며 길드마다 다른 단위를 쓰기도 했다. 착오와 속임수, 오해와 분쟁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과학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단위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은 채 온갖 이름을 붙이고 기본 단위의 배수 단위와 분수 단위가 제각각이어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80)

- 그러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의 측정 체계는 단기간에 급작스러운 변화를 겪는다... 낡은 도량형은 제 구실을 못했다. 아니, 전체 측정 체계가 걸림돌이 되었다. 해결책은 보편적 체계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시계와 인쇄기, 선박 엔진, 대포, 방적기, 증기 기관에 이르기까지 온갖 기계가 산업 생산의 주역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생산 기계를 제작하고 유지보수하려면 정밀도를 높여야 한다. (84)

- 기계가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정밀 가공의 중요성이 점차 거쳤다... 한편 정밀 부품을 제작하려면 정밀 측정 장비가 필요했다... 측정 체계가 확장되고 부품의 익명성(호환성)이 커지면서 개별 측정 행위의 풍부한 의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식품을 사고 건물을 세우고 부품을 교체하는 일은 점차 자동화되고 익명화되었다... 영국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핀 공장이 노동 분업을 시행하면 생산량을 수백 배에서 수천 배 늘릴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밑바탕은 공정 표준화였다. 따라서 측정의 발달은 기술적인 면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위한 경제적정치적 핵심 조건이었다. (85)

- 사회적 서열을 거부하거 공통의 `인류애'를 받아들이면서, 도량형을 공유하고 공정하게 적용해야 하며 도량형을 악용하여 착취하는 중세의 악습을 철폐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인권 선언을 공포하고 봉건적 권리를 일소하고 시장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도량형을 개혁할 수 없다.” (86)

-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일반화에 의한 규칙이 아니라 측정에 의한 법칙이 자연을 규정했다. (87)

- 쿨라는 미터법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법 앞에서 인간의 평등, 상품의 소외,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87)

- 척도가 부실하고 들쑥날쑥하며 각국 과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척도를 썼기에 과학 발전이 지체되자 과학자들은 척도를 개선하고 측정 도구와 측정 방법을 발명개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89)

- 1666년에 루이 14세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를 공인했다. 왕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카데미는 지구의 모양을 연구하는 등 야심찬 계획을 벌였다. 영국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추종자를 중심으로 모인 과학자 집단이 왕립학회로 확대되었다. 왕립학회는 1662년에 찰스 2세에게 공인받았다. (89)

- 영주가 기존 도량형을 악용하여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했다며 격렬하게 성토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사람들은 길이도 하나요, 무게도 하나를 요구했다. (94)

- 17898월에 아카데미 회원 장-바티스트 르 루아는 통일된 도량형 표준의 제정을 국민의회에 청원하자고 제안했다. (95)

- 프랑스의 저명한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물을 모서리 길이가 초진자 길이의 12분의 1인 정육면체로 만들었을 때의 무게로부터 무게 척도를 얻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96)

- 위원회에서 지지한 것은 파리 사분 자오선의 1000만 분의 1을 기본 길이 단위로 지정하는 세 번째 방안이었다. (97)

- 또한 길이 단위의 세제곱을 부피 단위로 정하고, 부피 단위에 해당하는 증류수 무게를 무게 단위로 정했다. (98)

- 라부아지에가 속한 세 번째 위원회의 임무는 무게 표준을 정할 수 있도록 어는 점에서 증류수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98)

- 그램(어는점의 증류수 1세제곱센티미터의 무게) (102)

- 회의 참석자들은 1799430일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또한 증류수 무게를 측정해서 킬로그램 표준으로 정했다... 1799622일에 미터 표준기와 킬로그램 표준기가 공식적으로 입법부에 제출되었다... 지금까지는 각국의 도량형이 자의적이었으나 아카데미의 노고 덕분에 전 세계는 지구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자연 자체를 기준으로 삼은 도량형을 얻었다... 그는 아카데미가 외국 과학자를 많이 초청하여 도량형 제정에 참여시켰음을 지적하며 도량형의 국제적 성격을 한껏 부각시켰다. (104)

- 파리에 있는 초진자 길이를 또 다른 표준으로 삼았기에 지금 내놓은 이 표준기- “자연을 측정하기 위해 자연에서 얻은 미터와 그로부터 도출한 진짜 키로그램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04)

5: 보편 측정을 향한 첫걸음

- 1794117일에 프랑스의 의사이자 식물학자 조제프 돔비가... 돔비의 임무는 구리로 만든 임시 길이 표준기(‘메트르로 명명되었다)와 무게 표준기(아직은 킬로그램이라는 공식 명칭이 부여되지 않았다)를 미국 의회에 전달하여 미국의 도량형 개혁에 일조하는 것이었다. (109)

- 결국 미국 의회는 표준기를 받아보지 못했다. (111)

- 중국과 서아프리카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은 영국은 곧 현지 도량형을 뽑아내고 자국의 도량형을 심었다. (111)

- 하지만 깊이 뿌리박힌 옛 도량형을 일소하는 길에는 숱한 장애물이 있었다. 도량형 개혁이 성공하려면 새 도량형의 필요성, 지도자의 열정, 정치적 분위기가 맞아떨어져야 했다. 십자군을 방불케 하는 사명감이 필요했다. 1790년대에 미터법 개혁은 일종의 십자군 운동이었다. (112)

- 영국에서 도량형 개혁을 옹호한 인물로는 하원의원 존 리그스 밀러가 있다. 17897월과 17902월의 하원 연설에서 밀러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똑같은 불변의 자연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며 미터법을 열렬히 옹호했다. (113)

- 영국의 개혁가들은 프랑스 동료들과 달리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가지 이유는 정부 관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영국에는 탈레랑도, 개혁안에 정서적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혁명 세력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무역과 경제는 프랑스와 달리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115)

- 에어리 위원회는 오랫동안 꼼꼼한 논의를 거쳐 18411221일에 초진자 방식이 길이 표준으로 삼을 만큼 정확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117)

- (미국) 도량형이 제각각이어서 일어나는 혼란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영국식 도량형을 채택했으며, 토지 측량을 의무화한 1785년 토지법 덕에 영국식 도량형이 널리 보급되었다. (118)

- 워싱턴은 179018일 첫 국정 연설에서 미국의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적절하게 처리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19)

- 제퍼슨은 1790415일에 도량형 개혁안을 작성하는 임무를 받고 520일에 초안을 완성했으며 미국 자오선 상의 위도 38도에 위치한 초진자를 표준으로 삼는 십진법 체계를 제안했다. (120)

- 애덤스는 영국과 프랑스의 도량형을 조목조목 비교한 뒤에, 영국 도량형은 실패했고 그 명칭은 혼란스럽고 불합리하기 그지없다며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고는 만국이 프랑스 도량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큰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라고 말했다. (129)

- 미터법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메생과 들랑브르의 측량값과 자오선 길이 계산에서 오류가 발견된 것이다. 기록원 미터는 파리 사분 자오선의 1000만 분의 1’이라는 정의보다 몇 라인(0.2밀리미터) 짧았다. 기록원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보다 약간 가벼웠다. 정확히 1세제곱데시미터의 용기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기록원 미터와 기록원 킬로미터를 단위 표준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단위의 정의를 바꾸는 것이 무척 번거로울뿐더러 그 차이라는 것이 아주 미미했기 때문이다. (133)

- 1827년에 파리에서 열린 학술 회의에서 일부 과학자들은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부딪쳐 지구의 모양과 자전축이 바뀌면 자오선과 초진자의 길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미터를 대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134)

-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는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자크 바비네는 빛의 파장을 기본 길이 표준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1830년에 프랑스 왕이 된 루이 필리프는 1837년에 미터법을 재검토하여 복원시켰다... 미터법이 태어난 나라에서도 미터법이 자리 잡는 데는 이렇듯 반 세기 가까운 기간이 걸렸다. (134)

6: 현대 문명의 위대한 업적

- 185151일에 제국의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가 열렸다. 런던 시민이 모조리 하이드 파크에 쏟아져 나와 세계 최초의 산업 박람회인 만국산업박람회 개막을 축하했다. (139)

- ...그리하여 만국박람회에서는 측정 체계를 개혁하려는 노력이 시동을 걸었다. 이 노력은 거의 사반세기가 지난 뒤에, 전 세계 도량형을 감독할 국제 기구의 설립에 관한 국제 협약이 체결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141)

- ...하지만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국제 사회는 미터법을 받아들이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된다.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각국의 기계를 관람한 사람들은 공학 정밀도를 높여야 하고 국제 협력을 통해 측정 단위와 표준을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41)

- 표준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는 철학적 관점에서 미터법에 반대했다. (143)

- 미국에서는 국립과학아카데미가 1863년에 미터법 찬성 입장을 정하고 의회에 미터법 채택을 건의했다. (144)

- 국제측지학회의 제1차 대회는 1864년에, 2차 대회는 1867년에 열렸으며 둘 다 장소는 베를린이었다. 2차 대회 참석자들은 정확도를 높인 미터 표준을 제정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146)

- 미터법이 승리한 비결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많은 나라가 상용하는 국제 단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미터가 보편화된 이유는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147)

- 프랑스 과학자들은 백금 90퍼센트와 이리듐 10퍼센트로 만든 합금을 미터 표준기와 킬로그램 표준기의 재료로 삼기로 결정했다. (148)

- 1872년 회의 참석자들은 진정한 국제 조직을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국제도량형국으로 명칭을 정했으며... 국제도량형국의 임무는 새 표준기를 제작관리하고 타국의 표준기를 검증하고 측정 관련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전해졌다. (149)

- ‘세계 측정학의 날로 불리는 1875520일에 미국을 비롯한 17개국이 국제미터위원회를 창설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149)

- 미터 협약은 자연 표준을 포기하고 인공물 표준기를 기준으로 삼았다. 자연 표준의 꿈보다는 전 세계의 합의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생각이었다. (150)

- 1870년대에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독일, 포르투갈,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스위스,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모리셔스, 세이셸 등 여남은 나라가 미터법을 채택했다. 영국도 마침내 국내의 반대를 극복하고 1884년에 협약에 서명했다. (150)

- 18899월에 국제도량형국의 상위 기구인 국제도량형총회가 처음 열렸다. 총회에서는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를 공식적인 국제 표준으로 승인했으며 몇 년 전부터 암묵적으로 통하던 사실을 추인했다. 미터의 정의가 파리를 지나는 사분 자오선의 1000만 분의 1이 아니라 미터원기의 길이라는 사실 말이다. (152)

- 하지만 19세기 후반이 되자 미터법이 측정 체계의 자리를 굳혔다. 1897년에 영국마저도 교역에서의 미터법 사용을 합법화했다. (154)

- 이에 반해 미터법의 배수 단위와 분수 단위는 단순하고 쉽게 확장할 수 있었으며, 십진법과 접두어를 채택한 덕에 적합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고 산업 설비와 기계를 미터법을 대체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 미터법 보급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56)

- 각국은 길이와 무게를 잴 때 자국의 도량형으로 환산할 것을 중국에 강요했다. 이들 도량형은 세관에서 쓰는 자세관에서 쓰는 저울로 불렸으며 중국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158)

- “1874년에 영국군이 쿠마시를 약탈하면서 무게추 제작과 사용이 종언을 고했으며 금가루는 아칸족의 공용 화폐 자격을 잃었다.” ...영국은 금분동 사용을 금지하고 야드파운드법을 시행했다. 인류가 고안한 가장 진기한 측정 체계의 명맥이 끊겼다. (161)

 

7: 메트로필리아 대 메트로포비아

- 공학자와 제조업자는 미터법의 취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미국이 미터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금전적 부담을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반대로 돌아섰다... 1876년에 보스턴 토목학회는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에 의뢰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청회를 열도록 했다. 결론은 미터법 반대였다. (166)

- 1902년에 스트래턴은 미터법을 입안하는 데 큰 몫을 했다... 미터법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역풍이 일었다. 이번에는 미국기계공학회의 새뮤얼 S. 데일과 프레더릭 A. 홀시가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176)

-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범아메리카주의라는 이름으로 국제 협력과 연대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기운을 회복한 미터법 진영은- 이때는 남아메리카 나라들이 미터법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1916년에 또 다른 미터법인 애슈브룩 법안을 발의했다. (177)

- 1921년과 1926년에 의회에서 미터법 공청회가 열렸지만 그뿐이었다. 1930년대에도 입법 조치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179)

- 케널리는 데일과 홀시가 틀렸다고 결론 내렸다. 미터법은 유럽에 단단히 뿌리내렸으며 꾸준히 성장했다. 옛 단위는 여전히 쓰이기는 했지만 드물었으며 그것도 옛 건물, 사람들의 정서, 지역의 임시방편 척도에나 남아 있었다. (182)

8: 뒤샹씨, 농담이죠?

- 푸앵카레가 1902년에 쓴 과학과 가설은 최근의 과학적 성과가 어떻게 뉴턴 역학의 토대를 뒤흔들고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던졌는가를 유려한 필치로 서술하여 1912년에 12판을 찍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87)

- ...(뒤샹) 세계를 구성하는 은밀한 규약과 체계를 작품 속에서 까발려 이들이 영구적 고정물이 아니라 약속에 불과함을 폭로하기도 했다... 두 작품은, 적절한 규약이 주어지면 종잇조각이 교환 수단으로 둔갑하는 현상을 폭로하고 패러디한다. (191)

- 정지한 세 표준은 유쾌한 태도로 과학을 바라보고, 규약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엄숙한 정확성을 패러디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사회적 약속을 깔보려는 뒤샹의 여러 충동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192)

- 단위는 필요해서 만든 것이며, 인간의 삶은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한다. 우스꽝스러운 단위는 측정 행위가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풍자하고 조롱하고 드러내는 나름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측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측정 체계가 주목받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뿐이다. (199)

9: 최종 표준의 꿈

- 퍼스는 자연 표준(스펙트럼의 파장)을 미터 단위의 기준으로 삼는 실험을 처음으로 수행한 인물이다. 자연 표준은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 과학자들의 꿈이었다. 프랑스는 지구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으려 했고 영국은 초진자를 이용하려 했다. 두 나라의 시도는 실패했다. 이제 희망을 걸 곳은 퍼스 뿐이었다. (204)

- 젊은 시절에 논리학에 푹 빠진 퍼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논리학자로 여겼으며 논리학에서 일자리를 얻고 싶어 했다. (206)

- 전기가 실생활에 응용되는 일이 많아지고 모든 분야에 전기가 도입되면서 이론적현실적으로 전기에 관심이 쏠렸으며 과학자와 공학자가 전기 단위와 표준을 논의하는 국제 회의가 속속 생겨났다. (209)

- 1832년에 독일에서는 수학자이자 과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모든 단위를, 심지어 전기 단위까지 세 개로 통합하는 독창적 방안을 내놓았다... 가우스는 자기와 전기에 별도의 단위가 필요하지 않으며 힘, 질량, 거리라는 세 가지 역학적 단위에서 유도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1860년대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윌리엄 톰슨(켈빈)은 이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기본단위와 유도단위를 조합하여 효율적이고 일관된 체계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210)

- 맥스웰.. “현재의 과학 수준에서 우리가 구상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길이 표준은 나트륨같이 넓게 산란하는 물질에서 방출되는 특정한 빛의 진공 속 파장일 것이다.” (210)

- 세월이 흐르면서 표준기의 치수가 달라진 것에서 보듯, 인공물 표준의 취약성과 불확도는 잘 알려져 있었다. 이것이 퍼스가 자연 표준을 추구한 동기였다. 퍼스는 표준 길이를 태양 스펙트럼의 선으로 나타나는 빛 파동의 길이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15)

- 퍼스는 홈을 매우 가늘게 새기면 회절 스펙트럼선의 파장과 평행선 간격의 관계를 알아낼 수 있고 이를 통해 파장을 길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16)

- 퍼스의 아이디어는 표준을 정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스펙트럼선의 파장을 미터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면 역으로 이 파장을 이용하여 미터를 새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1)

- 마이컬슨은 에드워드 몰리와 함께 간섭계를 개발하여 에테르의 흔적을 찾고 있었는데, 이 간섭계를 이용하면 빛의 파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224)

- 18876월에 빛의 속력에 대한 실험에서 첫 결과를 얻은 마이컬슨과 몰리는 예비 측정을 수행했다. 둘은 나트륨광의 파장을 실질적실용적 길이 표준으로 삼는 방법에 대하여에서 나트륨광의 파장을 길이 표준으로 삼으려고 실제로 시도한 것은 퍼스가 처음이다라며 퍼스에게 공을 돌리면서도 퍼스의 측정 결과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며- 결국 발표되지 못했다- 구조적 오류가 많다고 덧붙였다. (225)

- 마이컬슨-몰리 간섭계는 두 개로 분리된 광선이 서로 다른 경로로 진행하여 거울에 반사된 뒤 합쳐져 간섭무늬를 나타내도록 함으로써 퍼스의 오류를 해결했다. (225)

- 정밀 측정의 현실적 중요성이 커졌을 뿐 아니라 많은 연구자들은 정확성을 추구하면서 희열을 느꼈으며- 심지어 빅토리아 시대에는 정확성을 윤리적 선과 동일시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진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28)

- 19세기 후반, 정확성의 추구는 현실적 요구, 국익, 군사적 필요, 이론적 의미, 도덕적 가치와 연결되었다. (228)

- 원자를 충분히 모을 수 있다면 무게 표준을 정할 수 있다. 원자는 두 가지 자연 표준이 될 수 있다. 첫째, 특정한 원자의 질량을 질량 표준으로 삼을 수 있다. 둘째, 특정한 원자의 전자가 이 에너지 준위에서 저 에너지 준위로 건너뛸 때 방출되는 빛의 파장을 길이 표준으로 삼을 수 있다... 퍼스와 마이컬슨 덕에 길이 표준을 자연에서 구할 실마리가 풀렸으나, 무게 표준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230)

 

10: 국제단위계

- 퍼스의 구상은 80년이 지난 1960년에 미터의 새 정의로 결실을 맺는다. (234)

- 이듬해에 마이컬슨은 퍼스가 측정한 노란색 나트륨 선보다 훨씬 선명한 빨간색 카드뮴 선을 1000만 분의 1의 정확도로 측정하여 1미터에 들어 있는 카드뮴 선 개수가 1,553,164개임을 알아냈다. (235)

- 1950년대에도 많은 나라가 미터법으로 전환하거나 전환을 준비했다. 쿨라는, 미터법이 모든 것을 정복하며 승승장구한 비결은 무력이었다고 말한다. (239)

- 아프리카 나라들은 1960년대 초에 대부분 미터법을 받아들였다... 서아프리카 나라들은 1960년에 독립하면서 미터법으로 전환했다. (239)

- “문제는 중국 국민의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미터법으로 전환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 격변, 끊임없는 전쟁과 혁명 때문이었습니다.”(240)

-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도 도량형을 통일하고 미터법으로 완전히 전환하고자 했으며 1959년에 1단계 조치를 완수했다... 하지만 1970년대 문화혁명의 정치적 격동으로 완전한 전환이 미루어지다 1985년에 계량법이 통과되고서야 미터법이 확립되었다. (241)

- 그런데 1950년대 들어서자 10만 분의 1에서 심지어 100만 분의 1의 정확도를 요구하는 첨단 기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주 시대가 개막하면서 허용 오차는 1000만 분의 1 내지 1억 분의 1까지 줄었다. (243)

- 국제도량형국의 설립 목적은 측정에서만큼은 국가 간 경쟁을 자제하자는 것이었으며 이 목적은 훌륭하게 완수되었다. (244)

- 1954년 제10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미터(길이), 킬로그램(무게)과 더불어 암페어(전류), 켈빈도(온도), 칸델라(광도)를 채택했다. 암페어는 무한히 길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원형 단면적을 가진 두 개의 평행한 직선 도체가 진공 중에서 1미터의 간격으로 유지될 때, 두 도체 사이에 매 미터당 2×10-7뉴턴의 힘을 생기게 하는 일정한 전류로 공식 정의되었다. 열역학적 온도의 단위인 켈빈도는 물의 삼중점의 열역학적 온도의 1/273.16’으로 정의되었다. 칸델라는 백금 응고점에서 복사체의 전체 광도를 1제곱센티미터당 60칸델라라 한다라고 정의되었다. (246)

- 19601014일에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 참석한 32명의 대표는 현행 미터가 오늘날의 측정 요구를 충족할 만큼 정밀하게 정의되지 않았으며 불멸의 자연 표준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 내리고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터는 크립통 86 원자의 2p105d5 준위 간의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의 진공 중에서의 파장의 1,650,763.73배와 같은 길이다.” 마침내 미터를 자연 표준에 연계한 것이다. (미터는 1983년에 빛이 진공에서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다시 정의되었다.) (246)

- 1889년 이래 전 세계 길이 척도의 기준으로 쓰인 국제 미터원기 백금-이리듐 막대는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보편적이며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새 표준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246)

- 초는 하루 길이의 1/86400’이라는 천문학 개념으로 정의되었다가 1960년이 되기 전에 ‘19001012시를 기준으로 한 태양년의 1/315,569,25.9747’로 다시 정의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측정하는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1955년에 영국의 국가 측정학 연구소인 국립 물리원에서 최초의 원자시계를 제작했다. 1967년 제13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초의 정의를 세슘 133 원자의 바닥상태에 있는 두 초미세 준위 사이의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의 9 192 631 770 주기의 지속 시간으로 또다시 개정했다. (248)

- 1960년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는 새로 개편되고 확대된 척도 체계를.. ‘국제단위계international system of units)’로 명명되었으며 약어는 프랑스어 머리글자를 따 ‘SI’로 정해졌다. (249)

11: 현대 측정경관

- 측정에서 지역과 상품과 시간의 흔적을 지우고 척도를 다른 척도로부터 또한 모든 국지적 조건으로부터 추상화함으로써 세계를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고 인류에게 보편적인 장소로 바꾸어 인류의 손에 쥐어주고자 하는 철저한 기획에는 깊은 사회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54)

- 드라이푸스는 인체를 측정하여 효율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었다. (255)

-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경제적 조건에서 농업이 분업화되기 위해서는 표준 척도가 제정되고 이를 관리할 기구가 조직되어야 했다. 애덤 스미스의 핀 공장은 수많은 작업장의 전형이었다. 측정 체계는 제품을, 노동자를, 시장을, 산업을 형성했으며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역학 관계를 반영하고 강화했다. 한마디로 측정경관은 자본주의 출현의 핵심 조건이었다. (258)

- 컴퓨터가 대량 생산되어 값이 싸지고 측정 성능이 향상되면서 물리학의 첨단 분야가 일상에 파고들었듯 신체 스캐닝도 맞춤복 제작을 넘어서 빠른 속도로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 (266)

- 과거에도 일반 시민이 측정 문제를 좌우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제단위계를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면서도 그 근본 원리를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탓이다. (271)

- 일반 시민이 더는 체계를 관리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측정경관에서는 신뢰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272)

- 현대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이 자신을 측정하라고 어르고 측정 외에는 의미를 찾을 방법이 없다고 구슬린다는 것이다. (273)

- 측정 체계가 우리를 조종한다는 느낌,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 때마다 우리는 세팅의 존재를 감지한다. (273)

- 조와 조제핀이 비트루비우스적 인간과 다르듯, 현대 측정경관은 인간과 세계가, 또한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새롭게 바꾼다. 자꾸만 숨으려 하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 이 측정경관은 우리가 무엇을 만드는지, 무엇을 사는지, 사물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무엇을 진짜로 여기는지를 좌우한다. 현대 측정경관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측정경관을 이해하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 (275)

12: 킬로그램이여, 안녕

- 2011124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학회 회의... 개혁안이 승인되면 국제단위계의 7개 기본 단위가 기본 물리 상수나 원자의 성질에 따라 재정의된다. 가장 크게 바뀌는 것은 인공물로 정의된(파리 외곽의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된 백금-이리금 원기둥의 질량) 유일한 국제 단위계 단위인 킬로그램이다. 측정학자들이 단위를 재정의하려는 이유는 킬로그램원기의 안정성이 의심스럽고 질량 표준의 정확도를 높여야 하며 더 높은 정확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신기술이 개발되었고 국제단위계 체계의 안정성과 간결성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280)

- 미터는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4000만 분의 1,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의 무게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자연 표준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발상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이 입증되자, 1799년에 제작되어 프랑스 국가 기록원에 보관된 에탈롱을 길이와 무게 단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지금 추진하는 개혁은 자연의 상수를 단위 표준의 근거로 삼으려는 18세기의 목표를 마침내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280)

- 1875년에 미터 협약이 체결되면서 미터법의 감독 권한이 프랑스 손을 떠나 국제 기구 국제도량형국에 넘어갔다. 또한 국제도량형국은 혁명 세력이 만든 미터와 킬로그램을 대체할 새 표준인 국제 미터원기와 국제 킬로그램원기를 제작하는 일에 착수했다. 두 원기는 1879년에 제작되어 1889년에 공식 채택되었지만, 기록원의 미터와 킬로그램에 맞추어 교정되었다. (281)

- 1960년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결정된 두 가지 중대한 변화였다... 첫 번째 변화는 크립톤 86의 광학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을 이용하여 미터를 재정의한 것이다. (1983년에 미터는 빛의 속력으로 다시 정의되었다.) 이제 길이 표준을 교정하려고 국제도량형국에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기술만 있다면 어느 나라나 미터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 미터원기는 역사의 유물이 되었으며 지금은 국제도량형국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281)

- 두 번째 변화는 미터법을 대신하여 측정학의 전 분야를 포괄하는 더욱 큰 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281)

- 1967년에 세슘 133의 초미세준위를 이용하여 초를 재정의했다. (282)

- 하지만 킬로그램은 자연 현상을 기준으로 재정의할 수 없었다. 질량을 미시 차원에서 거시 차원까지 일관되게 측정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282)

- 1988년에 국제 킬로그램원기를 금고에서 꺼내어 6개의 사본과 비교하던 중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사본들과 원기의 질량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사본과 똑같아야 하는 원기가 혼자서 이상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283)

- 킬로그램을 재정의하는 데 쓸 수 있을 만한 기술 중에서 두 가지... ‘아보가드로법은 단결정 규소로 공을 만들어 아보가드로 상수를 측정하여 원자 개수를 질량 단위로 삼는 방법이다. ‘와트 저울은 전기력과 중력의 SI 단위가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특수 장치로 플랑크 상수를 측정하여 질량 단위로 삼는 방법이다. (285)

- 와트 저울은 두 종류의 힘을 비교한다. , 물체의 역학적 무게와 (강한 자기장에 놓인) 유도 코일의 전기력을 비교하는 것이다. (287)

- 킬로그램을 플랑크 상수로 측정할 수 있다... 이제 이 과정을 뒤집으면 플랑크 상수의 특정 값으로 킬로그램을 정의할 수 있다. (289)

- 1960년 제1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국제단위계가 제정되었을 때만 해도 측정학은 과학의 변두리, 일종의 서비스업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새 국제단위계,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기술이 등장하면서 측정학과 기초 물리학은 훨씬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297)

- 20111021일 제24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새 국제단위계를 시행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