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물리학의 철학 독서노트 05

강형구 2016. 9. 6. 06:56

 

스클라(Sklar),물리학의 철학(Philosophy of Physics), 53-69.

  

우리는 어떻게 세계의 참된 기하학을 알 수 있을까?

  

   우리의 기하학적 지식에 대한 변화하는 견해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세계에 대한 기초적인 진실들로부터의 추론을 통해서 얻어지는데, 이 때의 기초적인 진실들 또한 오류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초적인 진실들 또한 관찰과 실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오랫동안 기하학적 체계만은 오류가능성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어왔지만, 이러한 믿음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을 통해 무너지고 말았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적어도 유클리드 기하학 만큼이나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기하학 체계였다. 이를 통해 오직 관찰을 통해서만 어떠한 기하학이 옳은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뿌엥까레의 규약주의: 하지만 뿌엥까레는, 우리는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서는 물리적 공간의 존재나 본성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들로부터 물리적 공간을 추론해야 한다. 뿌엥까레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모두 우리의 직접적인 지각들을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까닭에, 어떤 종류의 기하학을 물리적 기하학으로 선택할 것인지는 순전히 규약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평평한 원반 하나를 생각하고, 그 원반 위에 2차원의 평면적인 생물체들이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원반의 중심으로부터 반지름에 비례해서 원반의 온도가 감소한다고 가정하면(

), 원반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질수록 측정 막대의 길이는 줄어든다. 이 때 평면적인 생물체들은 자신들의 몸이 줄어드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온도는 보편력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체가 줄어드는 비율과 측정 막대가 줄어드는 비율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생물체들은 실제로는 원반이 평평함에도 불구하고, 원반이 평평하지 않다고(정확히 말하자면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에서처럼 음의 곡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위와 같은 가상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원반의 실제 곡률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3차원적 생물체인 우리가 우리 주변의 공간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경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유클리드적 공간인지 비유클리드적 공간인지 위의 사례에서처럼 분명히 말할 수가 없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규약의 문제일 뿐이다.

  

   뿌엥까레에 대한 답변들: 비록 감각 지각들을 정합적으로 설명해주는 물리적 기하학의 체계들이 여럿이라고 해도, 그 체계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전적으로 규약의 문제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론 전체를 더 단순하게 만들어 주는 기하학을 채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서는 세계의 기하학적 구조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뿌엥까레 주장의 핵심이었다. , 세계의 기하학적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각을 넘어서는 추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공간의 구조 그 자체를 관찰하는 것은 가능한가?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동시성이 ’, ‘인과적 신호’, ‘이동하는 시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직접적인 탐구가 불가능한 대상들이다. 첫째,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물질적 사물들의 행동이며(시공간 구조 그 자체가 아니다), 둘째, 우리가 관측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지점에서의 물질적 사물들의 행동일 뿐이라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주요한 두 가정인데, 이 가정들에서도 우리는 상대성이론의 논의 내에서 공간의 구조 그 자체를 관찰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뿌엥까레의 주장에 따라 관찰불가능한 구조들은 우리 이론들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과연 상대성이론은 어느 정도로 직접 관찰가능한 것들을 초과하는 것일까? 특수 상대성이론의 중요한 전제들인 ‘(방향과 무관한) 빛의 속도 일정 공준선형성 공준(평평한 시공간을 전제)’은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경우, 빛 선과 중력 아래에서의 자유입자들이 각각 시공간의 빛 측지선과 시간 측지선을 따른다는 것, 국소 막대와 시계가 그것들이 위치한 시공간의 거리적 간격에 대한 올바른 지시자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관찰 불가능한 전제들이다. 이와 같은 이론적 전제들이 선행되어야지만 관측 결과들이 의미를 갖게 된다. 새로운 관측결과들이 발견되었을 경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시공간의 구조가 미리 전제되어야 하고 이러한 전제들은 관측결과들을 초과하므로, 공간의 구조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뿌엥까레의 주장은 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하겠다.

  

   실재론자의 대응: 그렇지만 실재론자들은, 시공간의 이론적 구조는 세계에 실재하지만 관측불가능한 세계의 구조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수의 시공간 이론들 중에 어떤 것이 실제로 세계를 기술하는지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실재론자들은, 우리는 최고로 믿을만한 이론을 선택해야 하며, 그에 관한 두 가지 기준으로 내적 그럴듯함배경 과학과의 관계를 든다.

  

   여러 다양한 선택지들이 있을 경우 이전까지의 과학이론과 가장 합치하는 선택지를 택해야 한다는 주장은 두 번째 기준과 관련이 있으며, 이를 방법론적 보수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배경 과학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애매함이 있다. 이론적 단순성을 통해 이론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첫 번째 기준과 관련이 있는데, 단순성의 개념 또한 정확하게 정식화하기가 쉽지 않다. 이론의 형식 측면에서 단순성을 바라볼 수도 있고, 이론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단순성을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 상대성이론 각각이 에테르 이론평평한 시공간 + 중력이론보다 구조적으로 더 단순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환원주의자의 대응: 하지만 이러한 단순성에 기반한 실재론자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이론이 단순하다고 해서 왜 우리가 그것이 세계에 대한 참된 이론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회의적인 입장에 대한 환원주의자의 대응을 살펴보자. 환원주의자들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오직 관측적 귀결들에 의해서만 이론을 식별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여러 대안들은 겉보기에는 다를 뿐 실제로는 하나의 이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동일한 현상을 서로 다른 언어들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론의 완전하고 실재적인 내용이 그것의 관찰귀결들에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겉보기에는 달라도 실제로는 다 같은 이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 기하학에 대한 환원주의적 관점이다. 관찰가능한 토대가 같다면, 복수의 기하학은 실제로는 하나의 기하학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같은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뿐이며, 관찰가능한 것들을 초과하는 것은 다만 환상적인 것일 뿐이다. 이론적 단순성이라는 것 또한 표현의 문제에 지나지 않으며, 이론이란 관찰귀결들의 총체를 언어적으로 편리하게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환원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이론 중 관찰불가능한 것에 관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가? 단순히 관찰귀결들을 모은 이론이 관찰불가능한 것들을 얘기하는 이론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가? 환원주의자의 입장은 관찰불가능한 것에 대한 급진적인 반실재론적 입장으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반실재론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것 아닌가?

  

   실재론자의 대응과 실용주의자의 입장: 이에 실재론자들은 관찰적 동등성이 완전한 동등성의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대응한다. 실재론자들은 이론적 차원에서의 구조적 차이가 있다면 두 이론이 동등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재론자들은 관찰불가능한 이론적 용어 또한 의미를 얻는다고 보며, 그들은 해당 용어들이 이론 속의 법칙들의 연결망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관찰결과에 이르게 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용어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실용주의자의 관점을 보자. 실용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선택된 이론이 말하는 것이 참이고, 그러한 선택은 합리적이다. 이들은 관찰가능-불가능의 구분을 원리적으로 비판하며, 이론 독립적인 세계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논평: 스클라는 마치 상대성이론과 고전역학이 관측결과의 측면에서 서로 동등한 것처럼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고전역학은 수성의 근일점 이동이라는 관측결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물론 고전역학의 범위 내에서도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설명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이러한 설명은 임시방편적인 보조가설들의 도입(태양 근처에 미지의 행성이 존재한다든지, 태양 근처에서는 뉴턴의 중력 법칙이 미소하게 어긋난다 등과 같은 작위적인 가설들의 도입)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고전역학으로부터는 상대성이론에 제시한 새로운 관측결과들을 예측해낼 수 없다. 예를 들어 태양 근처에서 빛이 휘어지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순수한 고전역학으로부터는 태양 근처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것을 정식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 물론 특수 상대성이론이 등장한 이후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라는 것이 밝혀졌고, 빛이 에너지를 갖고 있다면 빛 또한 중력장 아래에서 휘어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지만, 이는 상대론적 입장에서 고전역학을 수정한 결과를 토대로 추론한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을 초과하면서도 관찰가능한 많은 예측들(중력장 아래에서의 시간 지연 현상, 빛의 적색 편이 현상, 아원자 입자의 겉보기 수명 연장 현상 등)을 산출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예측들은 실험 결과 옳다고 확인되었다.

  

   따라서 나는 스클라가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을 비교하기보다는,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물리적 기하학에 어느 정도로 이론적인 요소와 규약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물리적 기하학이 어느 수준으로 경험적으로 지지되는지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더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 상대성이론이 고전역학보다 더 우월한 이론임을 받아들이고 난 후, 과연 상대성이론이 말하는 공간이 세계에 실재하는 공간인지 아니면 세계를 기술하기 위한 우리의 이론적 도구인지를 따지는 것이 더 옳은 접근 방식이라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두 전제는 광속 일정의 원리와 특수 상대성원리이다. 로렌츠 변환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적으로 등속운동하는 관측계 사이의 좌표 변환이 선형적이라는 가정이 들어가는데, 이러한 선형성의 가정이 공간의 등질성과 등방성을 전제한다면, 이는 곧 공간의 유클리드적 성질을 가정하는 것이다. 과연 특수 상대성이론의 위와 같은 전제들을 전적으로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전제들에 대한 완전한 경험적 입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제들을 입증하려고 해도 이러한 입증에는 불가피하게 규약적인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경험적 관측 결과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시성’, ‘길이등과 같은 기본개념들을 측정과 연계시킬 수 있는 정의들을 규정해야 하며, 이러한 정의들은 어쩔 수 없이 규약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초적인 동등성 정의들의 규약성이다.

  

   기초적인 동등성 정의들이 한 번 결정되고 나면, 물리적 세계를 기술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기하학이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분명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라이헨바흐의 주장이었고, 나는 라이헨바흐의 이러한 주장이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초적인 동등성 정의들이 이후의 물리학 발전에 따라서 변경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이르면 라이헨바흐적인 의미에서의 동등성 정의들의 유효성 혹은 타당성에 의심을 제기할 여지가 생긴다. 왜냐하면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공간에서의 빛의 경로와, 중력 이외의 다른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입자의 경로가 공간에서의 측지선을 따른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공간에 분포한 장의 세기에 따라서 측정 막대와 자연 시계가 요동쳐야 하지만, 상대성이론은 측정 막대와 자연 시계가 장의 세기로부터 스스로를 조절하는 현상을 통해서 강체성을 유지한다고 전제한다. , 이론이 기초적 개념들에 대한 관측결과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제시하고 규정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제시와 규정에 따라서 관측결과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러한 전제의 타당성 여부를 경험과 관측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