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17: 물질의 파동적 특성

강형구 2016. 6. 7. 06:43

17. 물질의 파동적 특성

 

   보어의 이론은 물리학에 마치 개선 행렬(triumphal procession)과 같이 등장했다. 이 이론은 10년 이상 물리학자들을 연구하도록 이끌었고, 그 결과 물질의 내부 구조와 관련된 새롭고 가치 있는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이론은 태생적으로 이론 실패의 원인이 되는 씨앗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보어는 이론을 처음 작업할 때부터 자신의 가정이 고전적인 전기동역학과 상충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이론이 문제가 되는 상황들을 좀 더 철저하게 파악해야 하는 상황에 당면한다면, 이와 같은 내재적인 상충은 이 이론을 실패로 이끌 것이었다. 실제로 보어 이론의 정확성이 떨어지면서 이 이론의 불충분함은 점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펙트럼선의 공식이 점점 정확해지면서 마침내 보어의 이론이 제시하는 공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는 물리학자들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가정들 아래에서 원자 모형이 수학적으로 탐구되었지만, 측정이 좀 더 정확해지면서부터는 이론의 초기 단계에서 볼 수 있었던 공식의 예측 값과 측정 값 사이의 놀랄만한 일치라는 성공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관측값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찾던 물리학자들은 이상하고 인위적인 보조 가설들을 구성해야만 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만 효과(236쪽을 볼 것)를 해석하기 위해서 에너지 양자의 절반 값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은 유달리 충격적이었다. 에너지 원자론의 기초 개념을 그와 같이 위반하는 것은 분명 물리학자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점차적으로 물질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함을 분명히 의식하게 되었다. 원자에 대한 러더퍼드-보어 모형에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 명백했으며, 물질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기존의 이론을 추가로 정정하는 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만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브로이는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학자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볼 새로운 양자역학은 드브로이의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드브로이는 오래 전부터 빛의 이론을 통해 알려져 있는 입자 또는 파동이라는 두 선택지 사이의 문제가 물질의 문제에서도 그 근원이 된다는 것을 인지했다. 비록 빛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점점도 파동 개념들이 아니라 입자 개념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어 이른바 빛 파동의 물질화 과정을 의미하고 있었으나, 여기서 드브로이는 과감하게 그 반대 방향으로 생각했다. , 물질은 오직 파동 이론의 개념들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물질에 대한 파동 이론이 물질의 참된 본성에 이르는 열쇠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전자와 같은 물질 입자는 항상 파동을 동반해야 한다고 과감하게 추측했다. 우리가 빛의 경우에 대한 양자 이론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물질에는 파동과 입자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입자-파동 선택지 개념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파동 또는 입자라고 부르지 않고 파동이면서 입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새로운 가정에 의해서 파동과 입자 사이의 예전의 대조는 좀 더 높은 차원으로 통합되었다. 우리가 이미 물리학의 역사에서 반복해서 등장함을 확인했던, 물리 이론의 헤겔식 3단계 발전 과정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드브로이의 개념은 물리학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1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의 근본적으로 다른 광성들을 분리하는 데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입자 광선은 원자 혹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라듐의 알파선과 베타선, 공기가 제거된 유리관에서 발생하는 양극선과 음극선은 입자 광선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듐의 감마선과 뢴트겐 관의 X선은 파동 광선이다. 그런데 드브로이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두 종류의 선들 사이의 기본적인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두 종류의 광선 모두 같은 시간에 파동과 물질 입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미 빛 양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파동 방사에 대해서 이와 같은 개념을 표현한 바 있었고, 드브로이는 두 가지 종류의 방사가 갖고 있는 완벽한 유사성을 확립하여 물질 광선에게도 파동의 속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물론 드브로이가 수학적 계산으로 자신의 이론에 힘을 실어주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어떤 물리학자도 드브로이의 대담한 개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드브로이는 양자 이론의 근본적인 방정식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단순한 산술적 연산을 하고, 이를 움직이는 전자들에 대한 상대론적인 방정식들과 결합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전자 파동의 본질적인 측면들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 드브로이는 전자 파동의 파장, 진동수, 속도를 계산해냈다. 이러한 계산 과정에서 수학적 공식의 도구가 감탄할 정도로 파동 개념에 적합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물리학자들은 항상 이와 같이 개념적인 이론과 수학적 도구 사이의 일치를, 새로 도입된 가정이 옳다는 것을 훌륭하게 나타내 주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바로 이러한 점이 드브로이의 파동 이론이 가지고 있던 힘이었으며,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들도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프랑스 물리학자가 제시한 개념들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드브로이의 개념들을 좀 더 발전시키는 연구를 한 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공을 거둔 것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Schroedinger)였다.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개념을 심오하게 수학적으로 확장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실질적인 파동 역학을 창조해냈다. 슈뢰딩거는 연구 과정에서 수학적 도구의 인도를 받았으며, 이때 수학적 도구의 내적 논리가 새로운 물리학이 탐험해야 하는 길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슈뢰딩거의 연구가 갖는 특징이다. 슈뢰딩거는 역학과 광학을 다루는 수학적인 방법 사이에 있는 유사성에 의존했는데, 이러한 유사성은 영국의 수학자인 해밀턴(Hamilton)의 작업 이래로 유달리 눈에 띄게 되었다. 물론 빛을 광선으로 간주하는 기하광학 분야에 대해서만 역학과 광학 사이의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때 기하광학은 빛의 파동적인 특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하광학은 주로 망원경과 현미경의 이론에 적용된다. 그러나 좀 더 조심스러운 추론을 통해서 판단해보면 기하광학은 파동광학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망원경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해보면, 이 상은 더 이상 점이 아니라 밝고 어두운 고리들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회절상임을 알 수 있다. 기하광학은 관측된 사물들과 이 사물의 상들이 관측에 사용된 빛의 파장에 비해 충분히 클 경우에 적용되는 믿을 만한 근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 건판으로 아주 정밀하게 찍히는 상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근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슈뢰딩거를 인도한 개념이 비롯되었다. 그는 기하과학과 수학적으로 대응하는 고전역학 역시 거시적 차원에서만 옳으며, 미시적 차원에서는 고전역학이 파동역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추론했다. 슈뢰딩거는 기하광학을 다루는 수학적 방법으로부터 파동광학을 다루는 수학적 방법으로 이행하는 것에 대응하여, 해밀턴의 근본적인 방정식들을 거시적 차원에서 미시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파동역학의 수학적 형태를 기적처럼 찾아냈다(divined).

  

   외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새로운 이론에 대한 이와 같은 정당화는 아주 형식적이며 수학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고의 수학화 과정을 이용한 이론의 구축은 현대 물리학에서 아주 생산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따라서 물리학자는 자신이 수학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데 필요한 수학적 도구들을 다루는 기술을 능숙하게 익히고 있을 경우, 항상 이와 같은 방법을 이용할 것이다. 슈뢰딩거가 이룬 업적의 위대함은 그의 업적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수학적 본능에 놓여 있다.

  

   이제 슈뢰딩거의 이론을 통해 파동 개념의 내용을 확보했다면, 과연 이를 시각화할 수 있을까? 슈뢰딩거는 이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전자가 알갱이로 이루어진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전하는 원자의 핵 근처에 전기적 장의 형태로 분포되어 있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전기장은 진동 상태에 있으며, 이 진동은 기본 진동과 고 진동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모든 진동들이 충분히 강하다면 간섭 현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이때 원자핵 근처의 대부분의 공간에서 전하 밀도는 소멸하고 오직 하나의 영역에서만 전하 밀도의 상호 강화가 발생한다. 따라서 오직 배타적으로 이 영역만이 전기를 띠는 것처럼 보인다. 슈뢰딩거는 공간의 이와 같은 영역을 에너지 다발(packet)이라고 불렀으며, 그와 같은 에너지 다발이 지금까지 전자라고 불렸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슈뢰딩거는 전자의 회전이란 에너지 다발이 원자핵 주변을 회전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전자는 장 구조의 특별한 경우일 뿐이며 간섭 현상의 특성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일반적인 경우 이러한 간섭이 없고 더 이상 전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핵 근처의 영역은 음 전기를 띤 떨리는 구름으로 채워져 있다.

슈뢰딩거의 이와 같은 해석은 그것의 그림적인 특성 때문에 매우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해석을 유지한다면 이는 드브로이의 원래 개념과는 매우 달라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슈뢰딩거의 해석에서는 더 이상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유지하지 않게 되는데, 슈뢰딩거는 바로 이러한 이중성으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출발시켰기 때문이다. 슈뢰딩거 해석에서는 파동을 옹호하는 일방적인 결정이 입자-파동 이중성을 대체한다. 파동 이론에서 입자는 하나의 특별한 경우로 나타난다. 입자는 특정한 중첩 현상이 일어날 때만 발생하며, 엄밀하게 생각해보면 이는 더 이상 입자의 그림을 나타내지 않게 됨을 알 수 있다.

  

   보어 모형의 양자 조건들 역시 슈뢰딩거의 이론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보어 모형에서 에너지 상태가 특정한 정수배를 갖는 특성은 슈뢰딩거 이론에서 등장하는 특정한 수학적 가정의 결과로 나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수학적 가정은 진동하는 현의 기본음과 배음 사이 관계에서 정수배가 등장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슈뢰딩거의 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음향학 상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수학적 관계이다. 그러나 슈뢰딩거 이론에서의 수학적 추론은 이와 밀접하게 유사한 유형의 추론이다. 양자 조건에 대한 슈뢰딩거의 이와 같은 정당화가 출판되었을 때 이는 학자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물질에 대한 새로운 파동 이론이 등장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이에 대한 실험적인 입증이 일어났다. 미국의 물리학자인 데이비슨과 거머는 격자에 전자 광선을 쏘아 전자들이 튕기면서 이에 수반해서 회절 현상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수정 격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X선 회절 실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다. 이 실험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수정을 이용한 X선의 회절이 X선의 파동적 특성에 대한 결정적인 실험으로 간주된 바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에는 X선을 뢴트겐이 갓 발견한 상황이었고 이 광선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와 동일한 종류의 실험이,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고 입자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생각한 전자 광선에 전기적 파동이 실재함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이 실험은 드브로이에 의해서 계산된 파장도 입증했다. 이후 독일의 물리학자인 럽(Rupp)은 인위적인 흠을 내어 격자 사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증가한 금강석 격자를 사용하여 이러한 파동들의 회절이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이론에서 등장하는 파동에 대한 슈뢰딩거의 해석은 계속 유지될 수가 없었다. 슈뢰딩거의 에너지 다발이 일정한 시간 동안 뭉쳐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계산되었고, 이에 따라 전자를 간섭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사실 전자 파동의 회절 실험 그 자체는 슈뢰딩거의 해석에 반하는 증거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파동들로 구성된 에너지 다발을 수정에 쪼였을 때에도 에너지 다발은 여전히 뭉쳐 있어야 하는데, 이와 반대로 실험 결과 확인된 흩어진 파동들은 입자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이론이 이 이론의 창시자에 의해서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한다. 슈뢰딩거의 방정식들은 참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전자를 파동 다발로 환원하고자 하는 그의 개념은 참이 아니었다. 현대 물리학에서 수학적 공식과 시각적 상이 서로 간에 상호적으로 맺는 관계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난다. 이론의 핵심과 개념적 골격은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반면, 이론에 대한 상들은 오직 겉에 두르는 옷과 같아서 변화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들은 실용적인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길들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은 이러한 상들 없이는 연구를 진행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파동은 결국에는 무엇일까? 드브로이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믿었고 그 둘 모두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슈뢰딩거는 파동을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입자들은 파동 장의 구조로서 설명하고자 했다. 마지막 세 번째 개념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개념으로, 보른, 하이젠베르크, 보어에 의해서 발전된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물질 원소에서는 입자 즉 사물과 같은 것(thingish)”이 실질적인 것을 이룬다. 그러나 파동은 전기장이 아니며 전혀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파동은 확률이다.

  

   이와 같은 개념에 대해서 처음 듣는 사람은 크게 놀랄 것이다. 자연 안에서의 과정인 파동이 사물과 같은 무엇이 아니라 오직 개념적인 어떤 것이라는 주장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확률은 개념이며 우리는 확률을 자연 속에서 마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확률의 규칙을 드러내는 자연의 과정들을 관측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파동에 대한 통계적인 개념은 분명 아주 조심스럽게 공식화되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단순히 방금 우리가 제시했던 것처럼 피상적으로만 진술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지식 이론 그 자체로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기술(description)과 사물의 관계 및 사고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물음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이젠베르크에 의해서 철저하게 연구되었다. 그는 인식론적 고찰에 기초해서 슈뢰딩거보다 전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공식화에 도달했고, 이후 그의 수학적 공식화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아주 독립적인 추론에 의해서 발전된 또 다른 수학적 공식화가 있다. 이 공식화는 영국의 물리학자 P. A. 디랙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하이젠베르크의 고찰은 매우 급진적인 본성을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고찰은 모형의 문제에 대한 비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를 표상할 때 러더퍼드-보어의 방식처럼 모형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자처럼 작은 크기에 관련된 행성 체계를 정확하게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매우 확대된 모형이고, 이 모형에서 전자는 핀의 머리와 같은 크기를 갖고 있고 이보다 훨씬 더 큰 핵 주변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회전하고 있다. 과연 원자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이러한 모형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인가?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부정했다. 그는 우리가 원자처럼 아주 작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결코 관측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모형을 없애기를 요구했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관측에 의해서 정당화할 수 있는 미시적 기제들에 대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작은 대상들은 일반적인 현미경을 통해서는 시각화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 대상들은 빛의 파장에 비교할 때 너무나 작기 때문에 우리에게 빛 광선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 원자 규모의 대상들은 우리가 일반적인 사물들에 빛을 쬐었을 때 사물들이 반사하는 빛을 보고 이들을 관측하는 식으로는 관측할 수 없다. 우리가 전자들을 관측하고자 하면 아주 짧은 파동을 가진 빛-예를 들어, 감마선-을 사용해야만 한다. 우리의 눈이 그와 같은 짧은 파동을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은 사건 건판으로 대체될 수 있고, 감마선 현미경을 이용해서 전자를 감마선으로 쪼였을 때 사진 건판을 이용해서 이를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관측되는가? 감마선은 짧은 파동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강력한 에너지 양자를 갖는다. 전자에 감마선을 쬐면 전자에게 강력한 충격을 일으켜 전자를 원래 궤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전자가 충돌 이전에 원자 내부에서 회전하고 있었다면, 감마선의 충격 때문에 전자는 원자 결합으로부터 떨어질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바로 이것이 새로운 측면이다. 대상은 관측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교란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관측을 통해 외부 사물에 대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처럼 전자에 대해서 추론하면 안 된다.

  

   거시적인 세계에서도 관측을 통해서 대상을 변경시키는 사례들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출되지 않은 사진 건판의 색깔에 대해서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진 건판을 햇빛 아래 노출시켜야 하는데, 이 경우 빛을 받은 사진 건판은 곧 칙칙한 회색 빛깔을 드러낸다. 다행히도 이러한 변화는 비교적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사진 건판을 갓 벗겨내었을 때 그 겉의 색깔이 녹색을 띤 노란색임을 인지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진 건판이 매우 민감해서 노출을 시키자마자 어두워져서 우리의 눈이 아주 짧은 순간에 건판의 색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되면 관측된 대상인 건판은 변형되어, 우리는 빛을 통한 관측으로는 더 이상 건판의 색깔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관측에 사용될 다른 파장을 가진 빛을 찾는 것은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햇빛이 아닌 다른 빛 아래에서 사진 건판은 아주 다른 색깔을 갖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붉은 빛 아래에서 사진 건판이 흰 색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사진 건판은 붉은 빛 아래에서는 햇빛 아래에서처럼 녹색을 띤 노란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관측에 의한 대상의 변경을 고려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제시한 예는, 우리 역시 그와 같은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거시적인 탐구에서 관측을 위해 사용된 측정 도구의 영향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관행이다. 물리학자가 통에 담겨진 물의 온도를 측정할 때, 그는 온도계를 넣음으로써 물의 온도가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온도계를 넣기 의 온도가 아니라 온도계를 넣은 이후에 측정된 온도 수치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측한 사실들로부터 우리가 개입하기 전에 대상이 갖고 있던 상태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거시 물리학에서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추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예를 들어 그는 온도계를 넣음으로써 발생한 물 온도의 변화를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온도계 삽입 이전에 물이 갖고 있던 온도를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물리학자는 측정 결과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해석-수은주의 높이를 주변을 둘러싼 물의 온도에 대한 측도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론적 해석이다-에 관측 도구에 대한 이론을 포함시키며, 이렇게 도구 이론이 포함된 전체 이론이 관측된 대상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계산에서 관측 도구의 영향은 아주 작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고도의 정밀성에 대한 고려 없이 하나의 보정 항을 추가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기술한 추론의 양식에 이와 같은 단순화가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전자의 문제로 돌아가자.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점은 관측 도구에 의해서 생긴 변화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움직이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과 전자의 속도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한 번에 아주 정확하게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고정시킬 수 있는 실험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이는 데 성공했다. , 여기서 부정확성 사이의 특별한 결합이 발생하는 셈인데, 이를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라고 불렀다. 위치와 속도는 함께 긴밀하게 엉켜 있어서 둘 중 하나만 정확하게 고정할 수 있다. 한 쪽을 정확하게 결정하면 결정할수록 다른 쪽에 대한 결정이 덜 정확해진다. 우리는 각각에 대해 적당한 수준으로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만족할 수 있지만, 두 개의 부정확성 값을 곱한 값은 항상 상수로 남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대체 부정확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특정한 조건에 대해서 명확한 진술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대신 확률을 언급하는 진술들만이 제시될 수 있다. 부정확성은 확률을 의미한다. 하이젠베르크의 탐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의 가장 작은 입자들의 상태와 관련해서 오직 확률 진술들만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러한 상태들이 법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률에 대한 탐구는 법칙들에 대한 학습을 의미하며, 이 때의 법칙은 아주 새로운 유형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법칙이 갖는 수학적인 형식은 파동에 의해서 주어진다. 왜냐하면 파동의 세기는 한 입자가 문제가 되는 장소에 위치해야 하는 확률의 측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던 진술의 의미다. 파동은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확률을 의미하며, 따라서 파동은 확률 파동이다. 움직이는 입자는 파동에 의해 기술되는 통계적 규칙성을 따르도록 배열된다. 파동은 상태의 기술, 상태를 나타나는 것이며, 이는 사물과 같은입자와 대조된다.

  

   원자의 양자 이론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이 우리에게 가져온 것은 아주 이상한 광경이다. 보어 모형의 규칙성은 확률 기제로 대체되었고, 여기서 파동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파동은 사물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 파동은 확률 이론의 관점에서 입자들의 분포에 대한 기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이 물질의 수수께끼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답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여전히 입자들을 거시적인 경험의 상을 사용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약점, 즉 입자들을 공간에 있는 작은 물체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약점을 갖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파동과 입자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기 전에, 미시규모의 공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양자 이론의 영역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물리학자들의 견해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입자-파동 이중성은 여전히 양자 물리학 앞에 놓인 위험스러운 물음 부호로 남아 있다. 물론 우리가 양자에 대해서 놀랄 만큼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 양자에 관련된 법칙들이 최상의 수학적 정확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직 미래에만 이러한 결과들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역시도 분명하다. 따라서 물리학은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독특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시세계로부터의 전보를 해독하는 법은 배웠으나, 해독된 문헌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편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양자의 문제를 다루면서 물리학은 혈기왕성한 정력을 보여주었고, 숱한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해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 가장 심오한 수수께끼일 것이라 추축되는 물리적 본성에 대한 수수께끼를 조만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