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19: 상과 실재

강형구 2016. 6. 9. 06:58

 

19. 상과 실재

 

   지금까지 우리가 현대 물리학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는 일을 했다면, 이제 우리는 물리적 사고의 일반적인 경향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두 개의 본질적인 경향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두 경향성은 그 방향은 다르지만 둘 사이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둘 중 하나는 자연과학이 경험의 세계와 밀접하게 접촉해 있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작업에서 관측과 실험이 결정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음은 우리가 살펴본 모든 내용들에서 명백했다. 마이컬슨의 실험,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에 대한 천문학적 시험, 방사 공식으로부터의 양자 개념 도출, 컴프턴 효과의 결과로 빛 양자 가설이 겪은 결정적인 변화, 보어 모형에 대한 증거로 주어진 스펙트럼선의 규칙성 등이 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의 예들이다. 물리학의 발전이 이러한 실험들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현대 자연과학의 경험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등한 정도로 본질적인 두 번째 경향성은 반대의 방향에 있다. 이 경향은 이론적인 구성의 방법으로부터 드러나며, 이 방법을 통해 물리적 사유의 건축물이 수립된다. 사실 이론 물리학의 위대한 영역들이 갖고 있는 이름들은 그와 같은 사고의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 상대성이론, 원자이론, 양자이론 등은 직접적인 관측을 훨씬 넘어서는 내용을 갖는 이론적 구조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그토록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물리학은 사실들을 존중하긴 하지만 단순한 사실들의 집합이 결코 아니다. 물리학은 사실들에 기초한 창조적인 구성물이며, 물리학적 주장들이 갖는 함축은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을 훨씬 넘어선다.

  

   철학은 지금까지 항상 두 개의 기본적인 철학적 태도인 경험론과 관념론을 구분해왔다. 경험론은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학설(doctrine)이며, 과학의 진술들은 경험의 세계에 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관념론은 오직 사유만이 지식을 창조한다는 학설이다. 관념론은 사유하는 의식이 사유의 대상을 실제로 창조해내며, 관측에도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관측은 오직 부수적인 역할만을 담당한다고 본다.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입장 중 어느 편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의 자연과학의 의의는 경험론-관념론이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들을 훌륭하게 종합한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직 경험만이 자연법칙의 타당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경험론의 근본 개념은 그 중요성이 더욱 더 강조되며 현대 자연과학에 유지되어 있다. 그러나 관측된 사실들을 사유에 의해 창조된 법칙으로 결합한 산물만이 과학을 구성한다는 관념론의 근본 원리 역시, 자연에 대한 현대적 지식을 위해서 대등한 중요성을 갖는다. 여기에는 그 어떤 모순도 없다. 개념들과 관계들은 사유의 창조물이지만, 세계의 상을 얻기 위해서 개념들과 관계들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적 성찰이 아니며, 오직 관측과 실험을 통해서 자연에 대해 물음을 던짐으로써만 이를 알 수 있다. 오직 자연만이 옳다혹은 그르다라는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경험이 그토록 영향력이 큰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의 어려움은 경험이란 오직 고립된 관측 자료만을 제공하지만, 이론적 법칙은 모든 사례들에 대해 유효함을 주장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은 늘 특수한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의 추론, 이른바 귀납적 추론이다. 우리는 전류가 흐르는 고리 전선이 자석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을 보고 항상 이러한 일이 발생하리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과정들에서 에너지가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음을 확인한 후, 에너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늘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론은 좀 더 복잡한 이론적 연관성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관측을 통해 발견된 내용들이 매우 복잡한 이론에 포함되어 있어, 아주 다른 종류의 간접적인 예측을 입증하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양을 지나가는 빛의 휘어짐을 관측하거나 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관측한 다음, 이러한 사실들이 우주 공간에는 비유클리드적인 기하학이 편재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간접적인 입증을 제공한다고 본다. 이때 우리는 관측 자료로부터 좀 더 일반적인 법칙으로 추론하기 때문에 이 또한 귀납에 의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전까지의 사례들과 다른 점은, 이 경우 법칙은 지금까지 관측된 것으로부터 다른 사례들로 적용되는 단순한 일반화가 아니라, 오직 복잡한 이론적 논증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더 심오한 법칙이라는 것이다.

  

   귀납적 원리의 항상적인 적용은 현대적인 연구의 경험적 경향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우리의 권리가 어떤 원천을 갖고 있는지를 논의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문제는 현대의 자연철학에서 가장 어려우며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인식론적인 문제라는 사실만을 덧붙이겠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잠시 제쳐두고, 귀납의 무제한적인 올바름에 대한 믿음이 경험적 사고에 있어 본질적이라는 것만을 말해두기로 하자. 귀납의 원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관측으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단일한 사례에서 관측하는 것은 항상 예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침반의 자침을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가까이 대었을 때 자침이 항상 회전하는 것은 하나의 우연이며 사건들의 우연한 일치이지 법칙에 대한 표현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에 의해 주어진 수성의 근일점 이동이 정확히 43호초인 것 역시 하나의 우연이며, 천문학자들이 중력 이론과 독립적으로 관측한 양이 이와 동일했다는 것 역시도 하나의 우연일 수 있다. 지금까지 관측되어 온 불타는 물질들의 스펙트럼선들이 보어의 공식을 통해 표현된 규칙성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단순하게 그와 같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너무나 적은 까닭에 아무도 이를 진지하게 고찰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이상한 우연들을 믿지 않으며, 특히 스펙트럼선들의 경우와 같이 관측된 내용이 단 한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일치할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의 양식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귀납의 원리뿐이다.

  

   그렇다면 자연법칙과 연관되어 있는 보편적인 타당성 주장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 자연과학에서는 이러한 보편적인 타당성에 형이상학적 필연성과 같은 신비로운 기초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에서 어떤 법칙이 타당하다고 말할 때, 이는 오직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법칙은 미래의 관측과 관련한 결론들을 허용한다. 이 결론은 아주 단순한 형식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전류에 의한 자침의 회전을 하나의 법칙이라고 부를 경우, 이는 전기 회로의 완성이라는 사건과 자침의 회전이라는 사건이 동시에 발견될 것이며, 이는 과거의 모든 관측들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미래의 관측들에서 그러할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동시발생이 우연적일 수 없음을 앞서 언급한 바 있고, 이제 우리는 이 개념을 좀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우연이 아닌 법칙이 있을 경우, 이는 두 사건들이 미래에도 항상 함께 발견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좀 더 복잡한 관계들에 대해서도 유사하다. 천문학적 영역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타당성을 주장할 경우, 이는 빛의 휘어짐이나 수성의 근일점 운동처럼 이미 이루어진 관측뿐만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이용해서 계산될 수 있는 다른 많은 현상들 역시 일어난다는 것을 주장한다. 비록 우리가 지금까지는 이 현상들을 직접적으로 시험해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자연과학의 법칙이 타당하다는 주장은 이 법칙이 예측을 제시한다는 데 있으며, 이 주장이 근거하고 있는 귀납의 원리는 알고 있는 사례로부터 알고 있지 않은 사례로의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타당성 문제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 속에서 현대 자연과학이 취하고 있는 반형이상학적인 태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자연 탐구의 목적은, 칸트가 믿었던 것처럼 이성에 의해 규정되어 주어진 도식에 우리의 경험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자연 탐구는 관측들을 공간과 시간 안에 배열하거나, 관측들을 실체나 인과적 필연성 등 특별한 개념들의 강압 아래에서 요약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자연 탐구는 오직 이미 관측된 것들에 기초해서 미래의 경험들을 예측하고자 할 뿐이다. 오직 이와 같은 바람만을 가진 현대의 자연 탐구는 전통적인 개념들이라는 무거운 짐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전통적인 개념들은 사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들이 그림과 같은 기술들로 가득 차 있고, 이러한 그림과 같은 기술에서는 자연이 인간과 같은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는 장력을 받고 있는 용수철에 작용하는 힘을 오르막길에서 짐을 들고 있는 인간의 노력과 비교한다. 우리는 던져진 돌이 갈릴레오의 법칙에 따르는 것을 인간이 정치적 법칙에 복종하는 것과 비교한다. 우리는 빛을 우리의 눈이 보는 것처럼 미세하고 색깔 있는 물질로 간주한다. 이러한 모든 개념들은 단순히 자연의 법칙들을 시각적인 내용으로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다른 세계로부터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연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물리적인 자연으로부터 영혼을 박탈해서 자연을 생명이 없고 흥미롭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물리학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반론은 시인과 화가의 세계로부터 차용한 기준,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는 아주 다른 영역에서만 의의가 있는 기준을 차용해서 물리적 탐구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른 영역의 기준을 과학적 탐구의 기준으로 적용하지 않는 것은 지적인 성실성(integrity)의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술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정화(purgation)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도덕적 정화의 힘이 예술적 창조 그 자체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자연 지식을 획득하는 데 있어 감정적인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예술가의 세계가 갖는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예술가의 개념을, 이 개념이 속하지 않은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함을 의미한다. 자연을 이해하는 예술적인 방법은 그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방법은 과학의 일, 즉 미래의 사건들을 예측하는 일을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경향성을 반형이상학적이라 불렀다. 우리는 이를 자연으로부터 신학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고대의 사람들은 신들과 악마들이 자연 속에 산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연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고대인들은 자연적인 사건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존재가 모든 사건들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닮은 신의 바람들이 자연 법칙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났다. 비록 이러한 다신론적 세계상이 오래 전에 대체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에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도입하는 것은 그 밑바탕에 있어 동일한 것이다. 시간, 공간, 실체, , 법칙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 모두는 분명 인류학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 기원은 오늘날에는 오직 시각적 부속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물리적 지식이 실제로 기초하고 있는 경험들과는 관계가 없다. 오직 경험들, 경험들을 예측적인 수학적 이론으로 통합하는 것만이 현대 자연과학의 내용을 형성한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상 다음과 같은 점전적인 이행보다도 더 위대한 혁명은 없을 것이다. 원시 사람들은 자연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고, 이후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자연을 보았으며, 오늘날에는 무감정한 본성을 가진 물리학이 등장했다. 오늘날의 물리학에는 사실들과, 사실들 사이에 적용되는 개념적인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물리적 상을 기술하기 시작하던 부분에서 제시했던 근본적인 개념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이러한 급진적인 관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현대적인 연구를 통해, 일상적인 차원의 개념 세계는 더 이상 거시 규모와 미시 규모의 세계에서는 그 타당성을 갖지 못함을 인지했다고 진술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이론을 탐구했던 거시 세계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부터 훨씬 더 복잡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개념들로 이행하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 규모의 세계에서는 물질에 대한 옛 개념들이 포기된 것과 물질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했던 엄밀한 법칙 속에서 이러한 점이 대표적으로 드러났다. 공간, 시간, 실체, 인과성과 같이 중간 차원의 세계로부터 차용된 일반적인 개념들이 거시 규모와 미시 규모의 현상 영역에서도 무제한적인 타당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개념은, 우리 세대의 물리학을 통해 처음으로 극복되었다. 이러한 극복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신들로부터 자연을 해방하는 최종적인 단계가 이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가장 이행하기 어려운 단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탐구에 관련해서 철학자들이 지어 놓은 개념들의 전체적인 연결망이 파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연결망이란 철학적으로 선험적인(a priori) 개념들의 연결망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사고의 범주가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던 특정한 철학적 체계의 주장들에 자연과학이 어떻게 도전할 수 있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칸트가 발전시킨 선험적인 철학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늘 특정한 전제들에 근거해서 자연에 대해서 학습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하게 한정된 관점에 따라서 경험의 자료들을 배열해야만 한다. 따라서 칸트는 경험이 이러한 배열에 사용된 원리들을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간을 측정하고자 하면 우리는 반드시 측정 도구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공장에서 도구들을 제작할 때에는 이미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제하고 제작한다. 따라서 측정을 통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이와 대응되는 상황이 다른 범주들 또는 다른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과성의 근본 법칙,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시험하고자 한다고 해보자. 이러한 시험을 위해 우리는 이미 인과 원리를 전제한 측정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에서 그 어떤 무법칙성을 연역하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이것이 칸트가 제시한, 자연 지식에 있어서의 특정한 근본 법칙들이 갖는 불변성(immutability)에 대한 정당화 논증이다. 이때 칸트는 이러한 법칙들을 선험적 즉 모든 경험의 전제가 된다고 보았다. 칸트의 선험적 법칙들은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고 오늘날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이 개념을 논박할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실험을 할 때 우리의 관측은 항상 중간 차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우주 공간의 팽창에 대한 탐구에 적용해 보면, 여기서 우리는 실제로는 망원경 내의 상을 관측하거나, 크기의 줄어듦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경우인 사진을 통해 관측한다. 원자적인 차원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러한 주장이 적용된다. 우리는 중간 차원의 도구들로부터 제공된 자료인 압력과 온도를 측정함으로써, 수정에 대한 X선 조명을 통해 얻어진 사진들 속 점들과 선들을 관측함으로써, 윌슨의 구름상자에 생긴 줄무늬를 관측함으로써 미시 세계에 대해 추론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론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와 같은 관측 방법들을 사용하는 경우, 우리는 중간 차원의 개념적인 세계를 사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는 중간 차원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진 세계를 추론할 수가 있다. , 이 세계가 중간 크기의 현상과 관련될 경우 예전의 형식에 아주 근사하게 되는 구조를 갖도록 구성될 경우에만 그러하다. 이를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해보자. 우리는 작은 영역에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에 따라, 비록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기하학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천문학적 도구들의 크기를 다룰 때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들을 사용할 수가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지각 가능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규모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정하더라도 넓은 영역에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옳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에는 아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차원의 세계와 관련해서도 상황은 유사하다. 우리는 기본적인 과정들이 무수히 많이 모일 경우 거의 완전한 확실성을 보이는 법칙이 도출됨을 살펴보았다. 비록 기본적인 과정 그 자체가 단순한 확률적 발생이 갖는 불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로부터 양자적인 과정들을 추론하는 관측들은 이번에도 중간 차원의 도구들의 도움을 빌려서 이루어진다. , 무수히 많은 기본적인 작용들이 참여하는 과정들의 도움을 빌려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도구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인과성의 개념을 가정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미시적인 세계에서 인과적 원리에 대한 일탈이 일어남을 추론할 수 있다. 이에 관련된 두 개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보자.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서 간섭 현상을 관측하는 경우, 우리는 기하광학의 엄격한 법칙들을 사용해서 망원경 내의 광선 이동 경로를 계산한다. 이때 우리는 빛의 전파가 갖는 근본적으로 양자화 된 과정에 대해서, 각각의 양자가 갖는 충격과 비규칙성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와 같은 관측들에 근거해서 기본적인 양자화 과정이 확률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추론한다고 해도, 이러한 추론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열의 운동학적 이론에서 등장하는 통계적인 과정들에 대해서 추론하는 경우, 우리는 엄밀하게 따졌을 경우 기본적인 과정들의 평균적인 결합만을 나타내는 온도계와 압력계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온도계와 압력계의 움직임 역시 거시 물리학에서와 같이 열적이고 역학적인 과정들로 취급한다.

  

   따라서 물리학이 자신의 가정들을 수정하기 위해 도입한 이러한 절차를 연속적 확장의 절차(procedure of continuous extension)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기초에 있어서 거시 규모의 세계와 미시 규모의 세계는 전통적인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대신 이 구조는 중간 차원의 세계에 적용될 때에는 이전의 세계 구조와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일치는 거시 규모의 세계에서는 이전까지의 구조를 극소의 원리로 사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극소의 원리란, 무한히 작은 영역에서의 타당함을 보장하는 원리이다. 미시 규모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일치가 정확히 반대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이전의 구조를 극대의 원리로 사용함으로써 얻어진다. 극대의 원리란, 무한히 큰 영역에서의 타당함을 보장하는 원리이다. 리만은 무한소 영역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적용된다는 공준으로부터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구성하였다. 보어의 대응 원리는 원자의 양자 모형으로부터 고전적인 모형으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나타내는데, 이는 중간 차원의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구성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연속적 확장의 절차를 적용한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리만이나 보어의 작업에 사용된 원리를 최초에 언급하면서 이미 이러한 내용을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다른 많은 예들을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적 확장의 과정을 수행하면서 물리학은 개념들을 일반화하는 능숙한 기법을 개발시켰다. 따라서 일반화된 개념들은 새로 등장한 물리학에서는 이론들에서도 연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물리학이 세계의 상이 가진 놀랄 만큼 새로운 측면들을 밝힌 것 역시 이러한 일반화된 개념들에 빚지고 있다.

  

   물리적 자연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들을 밝힌 수많은 발견들에 더해 현대의 자연과학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 있다. 그것은 현대의 자연과학이, 인간 사고가 가진 관습적인 형식들을 일반화시키고 전통적인 사고 습관의 편협함으로부터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켜, 인간이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물리학은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에 숨겨져 있던 내용들을 드러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낯선 영역들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지성적인 무기들을 만들어냈다. 바로 이것이 사고의 교육과 사고의 형성에 있어 현대 물리학이 갖는 커다란 의의이다. 만약 누군가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물리학을 알게 된다면, 만약 그가 물리학에 포함된 이상한 명칭들과 수학적 공식들만을 듣는다면, 그는 실제로 물리학이란 오직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관심을 갖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리학은 독창적이고 현명하게 구성되었지만, 다른 종류의 문제와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의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겉을 두르고 있는 특수한 용어들의 단단한 껍질에 의해서 물리학에 등을 돌리는 것은 물리학을 몹시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이러한 껍질 너머를 들여다보는 데 성공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일에 성공한다면, 그는 과학이 생생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고, 내적인 운동으로 가득 차 있으며, 진리를 찾는 정신의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열정적인 노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이러한 해답이 원래 추측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실제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갖는 내용이 증가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개념 체계가 창조되어 인지의 진보에 따라 자연이 이 체계의 틀에 맞춰졌다는 것은, 과학이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이 도달한 새로운 세계의 상이 이와 더불어 사유하는 정신인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상을 가져왔다는 것은, 현대 과학이 이룬 업적들 중에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인간의 이성이 논리적인 서랍들로 구성된 거대한 장롱이 아니라는 것을, 이성이 유전된 규범들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자연과학은 인간이 학습을 통해 성장하며, 인간이 초기 단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고의 형식에 도달하기 위한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리적 사고가 성찰하는 정신의 구조에 미친 이와 같은 영향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오늘날의 물리학에 친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껏 제시한 현대 물리학에 대한 설명의 가장 큰 목적은 과학적 탐구가 사고하는 인간에게 미친 이와 같은 영향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