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

강형구 2020. 1. 11. 09:55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푸앵카레의 저서 [과학과 가설]은 철학적 저술이었다. 어느 시대이든 과학적 지식은 특정한 종류의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말에 제시된 뉴턴의 물리학은 중력이라는 물리적 힘의 구체적인 작용 과정에 관한 철학적 문제, 뉴턴이 제시한 절대적 시간과 공간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푸앵카레가 활동하던 무렵에는 과학을 `유명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특정한 자연현상을 동등하게 기술할 수 있는 복수의 기호체계들이 존재한다면, 결국 그러한 각각의 기호체계는 자연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편리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수학적 기하학이 유일하지 않다는 사실, 수학적으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 역시 유클리드 기하학과 대등할 정도로 정합적이고 일관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이 문제는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모두 피할 수 없는, 수학과 과학의 발전이 제기한 철학적 문제이자 도전이었다. 이에 대해 `유명론'적 관점에서의 응답이 나왔고, 푸앵카레는 이와 차별화되는 자신의 응답을 제시했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단지 수학적으로만 정합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각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즉 경험적으로도 유클리드 기하학 못지않게 정합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데 있어 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할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할지를 경험에 의해서 결정할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어떤 기하학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경험'이 아닌 `약속' 혹은 `규약'이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클리드 기하학이 비유클리드 기하학보다는 자연을 기술하는 데 있어 더 단순하고 편리하다. 그래서 푸앵카레는 우리가 단순함, 편리함, 우아함을 충족시키는 규약 혹은 이론을 늘 선택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연을 유클리드 공간 속에서 기술할 수 있다. 만약 유클리드 기하학이 잘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면, 유클리드 기하학을 다른 기하학으로 대체하기보다는 빛의 이동에 관한 자연법칙이나 측정 도구에 관한 자연법칙을 변경하면 된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자연법칙의 변경 혹은 복잡화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간의 형태를 수학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더 단순하고, 우아하고, 편리하다. 이러한 단순함, 우아함, 편리함은 단지 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론이 실재의 자연과 더욱 더 합치함을 함축한다.

  

   이와 같은 논의의 맥락에서 그는 실험법칙과 근본법칙 사이의 지위 변화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한다. 실험적으로 잘 입증된 특정한 법칙이 어느 시점에서는 과학이론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으로 그 지위가 격상될 수 있다. 그러한 지위 격상을 통해서 이론이 좀 더 단순하고 편리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면 그 법칙은 더 이상 경험적으로 유도된 법칙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는 잘 반증되지 않는 기본법칙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이상과 같은 푸앵카레의 철학적 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아인슈타인 역시 푸앵카레와의 철학적 대화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적 입장을 마련해나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에는 푸앵카레가 살았던 시대의 과학적 지식이 직면했던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푸앵카레 자신의 철학적 응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고전]이라 부른다. 또한 나는 어떤 시대에도 그 시대의 과학적 지식에 대응하는 철학적 문제들이 등장한다고 보고, 이러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응답이 과학을 자극하고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그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했고, 일반 상대성 이론 역시 그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양자역학 또한 다르지 않다. 물론 그 해답이 과학적 이론의 형식을 띠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는 하지만, 그 해답 역시 일종의 철학적 응답이기 때문에 완전하거나 영원한 정답일 수는 없다. 사실 수학적 정리를 제외하면 과학에서 영원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해답들 사이에서 경합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양자역학에 관한 해답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해답과 아직까지도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제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2020년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우리 시대의 과학적 지식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논하고 이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적 응답을 제시하는 사상가가 있는가? 푸앵카레가 반박하고자 했던 유명론자 에두아르 르 루아(Edouard Le Roy, 1870~1954)는 철학자였다. 수학의 토대에 대해 형식주의의 관점을 취했던 힐베르트는 수학자가 아니었던가?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모두 그 시대의 과학적 지식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철학적 문제들을 탐구하는 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수학과 과학이 전문화되면서 철학이 점차적으로 수학 및 과학과 분리되고, 오늘날 철학이 전문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은 특정한 몇몇 분야로만 축소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나는 학생 시절 이러한 관점을 배웠고, 한동안은 이 관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철학적 문제들은 과학적 지식 못지않게 중요하다.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철학적 문제들이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과학적 변혁은 어김없이 과학에 대한 철학적 문제들을 탐구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러한 변혁이 종료되고 난 뒤에도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과학의 핵심에는 늘 철학적 성격이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을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그 철학적 성격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을 철학자-과학자(Philosopher-Scientist)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과학은 그 시작부터 철학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고, 그 발전 과정에서도 그러했으며, 21세기인 바로 지금도 그러하다. `이제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철학자가 아닌 과학자에게 맡겨두라.' 나는 이러한 생각 역시 일종의 편협한 권위주의이자 오만함이라고 본다. 철학자의 논의를 이제는 지나버린 옛 시대의 유물이자 고급스러운 일종의 교양으로 취급하는 일부 과학자들의 저술들에서도 나는 일종의 교만함과 오만함을 읽는다. 어떤 고정되고 공통된 `과학적 지식 혹은 이에 대한 합의'가 있고, `결국 과학이 말해주는 바가 옳고 나는 그 옳은 바를 당신들에게 알기 쉽고 친근하게 알려 주겠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일부 과학자들의 저술을 읽으며 나는 우리나라 과학 문화의 미성숙함을 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과학적 지식이 제기하는 고유한 철학적 문제들이 있었듯, 21세기인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이 제기하는 고유한 철학적 문제들이 있다. 이 철학적 문제들이 단지 철학자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고, 오히려 철학자들보다는 과학자들에게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아주 진지하고 심도 있게 논의하는 우리의 사상가들을 찾고 싶다. 나는 그들이 쓴 책들을 읽고 싶다. 아직 나는 주변에서 그런 책을 찾지 못했다. 20세기의 [과학과 가설]에 견줄만한 21세기의 [과학과 가설]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게으른 독서가라서, 내가 아직 훌륭한 책들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부디 이러한 나의 생각이 나의 게으름에서 기인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