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 [원자와 우주] 18: 인과성과 확률

강형구 2016. 6. 8. 07:07

 

. 철학적 귀결

 

18. 인과성과 확률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양자역학의 해석은 이전까지 모든 물리학 이론에서 작동해왔던 엄격한 법칙 개념을 포기하는 데에 이르렀다. 법칙이 보편적으로 통제한다는 근본 원리는 인과성의 원리로도 불린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인과성 원리 대신, 사건들 사이에는 단순히 확률에 의해서 통제되는 관계가 있다는 개념을 사용한다. 인과성과 확률의 문제는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주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이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물음들을 조심스럽게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이러한 탐구와 함께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현대 물리학의 귀결들에 대해서 다룰 것이며, 이는 자연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것들 사이에 엄격한 인과적 연관이 있다는 개념은 현대 자연과학의 표지로 여겨져 왔고, 진정 이는 자연과학에서의 현대적 사유를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인 개념적 경향이었다. 물론 고대 세계의 사람들 역시 미래에 일어날 일의 예정(predetermination)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운명 즉 파툼(fatum)이라는 개념 속에서 사건들의 진행에 대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개념을 공식화했다. 이때 운명이란, 인간의 바람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일어나는 모든 삶의 결정적인 전환을 지시했다. 그러나 운명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현대 물리학의 인과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인들이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서 작동하는 법칙을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법칙은 완전히 다른 유형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에게 사건의 예정이란 의미들의 연관(connection of meanings)이다. 언젠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은 오이디푸스(Oedipus)의 운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실현되기 위한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자신의 운명과 대적하여 그 운명을 실행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투쟁은, 결과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여 좀 더 확실하게 스스로를 운명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서양의 사유를 특징짓는 예정이란 중첩된(superimposed) 의미 없는 연관이다. 하나의 원인은 오직 하나의 결과만을 고정한다. 현재의 사건 B는 이전에 일어난 명확한 하나의 사건 A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이란 오직 과거 즉,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미래의 목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과 법칙의 규칙은 맹목적이며, 이는 운명의 지배를 보는 것과 대조적이다. 인과적 연관에 따르면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쓰러뜨리는 장소는 사전에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고, 실제로 아버지의 살해로부터 비롯된 핏방울들이 그가 사용한 검의 어느 지점들에 흩뿌려지는지도 결정되어 있다. 초기 조건의 미소한 변경,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가 원래보다 30분 정도 늦게 태어나는 것과 같은 변경은,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이력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부친 살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과성은 원인들로 이루어진 맹목적인 연쇄(concatenation)이다. 이의 상징은 기계다. 기계는 피스톤에 특정한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지, 그 어떤 의미 있는 기능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은 어떻게 그와 같은 이상하고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far reaching) 주장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고대인들의 시야에 놓여 있던 인간과 그의 정신적 운명에 대한 관측은 그와 같은 주장으로 이끌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는 인간 사고의 특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의 정확성을 가지고 모든 자연 현상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연에 대한 엄격한 연구를 통해서 그와 같은 인과적인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현대 자연과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것은 갈릴레오가 지식을 위한 새로운 재료를 아주 풍부하게 수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납적인 물음을 수학적 공식과 연결한 최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물체가 떨어지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했을 때 그는 자연의 수학적 함수 개념을 인지했다. 그것은 만약... 이라면, ...이다라는 엄격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이는 어떤 자연적인 양이 A라는 결정된 값을 가질 경우 이에 따라 자연적인 양 B의 값이 고정됨을 보여주었다. 이후의 세기들에서 나타난 자연과학의 발전 전체는 이러한 위대한 개념의 단일한 승리였다. 천문학의 정확한 측정에 의해 시험된 뉴턴의 역학, 전기로부터 자연의 새로운 힘을 발견한 것, 예상하지 못했던 화학적 에너지의 발견 등은 모두 원인이라는 근본적인 개념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주었다. 기술적으로 매우 정밀한 기계들을 만든 것은 그와 같은 과학의 실천적인 결과였으며, 이는 과학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인과적 가설에 대한 되풀이된 입증이었다. 인과적인 관점을 갖지 않는다면 그 어떤 기술자도 기계를 만들거나 고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수학자인 라플라스는 이러한 결정론에 대한 고전적인 공식화를 제시했다. 만약 완벽한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궁극적인 정신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공식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며, 이 공식에 일정한 수치적 값들을 부여함으로써 미래 또는 과거에 세계가 갖는 상태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생물학에서 가장 덜 명백하다. 생명과학은 생명체에게만 별도로 적용되는 법칙들을 정당화하고, 생명체가 엄격한 인과적 연관으로부터의 이탈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듭해서 노력해왔다. 그러나 생물학은 인과적 개념의 승리 과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생리학에 따르면 동물 유기체에서는 화학적이고 전기적인 과정들이 발생하며, 소화, 호흡, 심장의 활동, 두뇌의 활동마저도 물리화학적 과정들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개념은 생물학에서도 자신의 승리를 축하했다. 오직 가장 최근에 이르러서야 활력론적인 가설들이 다시 한 번 저명해질 수 있었다. 그것은 기계론적 방법론을 사용한 설명이 생물학에서는 그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론은 모든 자연과학 중에서 가장 정밀한 물리학에서 인과의 개념이 승리하는 한 그다지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생리학적 과정들이 궁극적으로는 원자들과 분자들의 역학적 운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 인과적 설명에 등장하는 불완전함은 오직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행성들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처럼 수백만 원자들의 운동을 사전에 계산할 수 있는 전지적 정신인 라플라스의 정신에게는 이러한 불완전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사건들의 완벽한 결정에 대한 의심이 물리학에서조차 그 근거를 얻기 시작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는 인과적인 개념의 실제적인 위기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정확히 원자 내부의 역학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의심은 인과적인 개념에 대한 의식적인 포기에로 이끌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이러한 단계가 겉보기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의 물리학 발전을 뒤따라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온 모든 개념적인 작업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때문이며, 이것이 발전의 일관된 연장선상의 마지막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법들을 통해 우리는 좀 더 일반적인 법칙 개념을 열 이론에서 마주쳤다. 우리는 모든 사건들이 움직이는 방향에 관한 법칙인 열역학의 제2법칙이 통계적 고찰들로 회부(refer back to)될 수 있음을 보였다(10). 이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는 분자들의 섞임은 평준화하는 경향으로부터 지휘를 받으며, 이때의 평준화 경향은 인과적 법칙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통계적 법칙 즉 확률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계적 법칙은 이전까지는 엄격하게 보편적이라고 여겨졌던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단순한 평균 법칙으로 변환시켰다. 여기서 이미 엄격한 법칙에 대한 확률 법칙의 대체가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통계적인 정당화 이후, 자연에 대한 타당성이 오직 통계적인 타당성으로만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 모든 정확한 법칙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개념이 거듭해서 등장했다. 이는, 우리가 거시규모의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규칙성이 미시세계에는 도입될 수 없으며, 더 자세히 탐구해보면 이러한 거시규모의 규칙성은 분자 수준의 혼돈으로부터 비롯되는 평균적인 규칙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의 견해는 엇갈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칸트 철학과의 긴밀한 연관 하에 그와 같은 개념이 허용될 수 없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시적 차원에 적용되는 엄격한 인과적 원리의 타당성을 의심할 수 없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단일한 분자적 사건들에 대한 충분히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으로 유추하는 추론이 결정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관점은 원리적으로 이 물음은 답변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분자적 과정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측은 판단을 보장할 수 없으며, 거시적인 관측들로부터 분자적 사건들에로의 추론만이 우리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동안은 물리적 측면에서는 더 탐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직접적으로 물리학을 흥미롭게 하는 문제들의 집합에 속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 물음을 들여다보려는 철학적 경향의 탐구들이 이어졌다. 특히 이러한 탐구들은 확률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진행되었다. 이전까지의 인식론적인 논의들에서는 확률 개념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결코 인지한 적이 없었다. 확률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어느 정도 병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자연에 관한 예측이 오직 확률적인 정확성을 갖는 것은 인간의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학습에 대한 완전한 능력이 갖추어진다면 비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은 확률 개념이 최초에 연원하게 된 확률 게임의 경우에 특히 잘 지지된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질 경우마다 초기 조건-주사위의 최초 위치, 게임 참여자가 주사위를 던질 때 사용한 힘 등-에 의해 주사위를 던진 결과가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심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확한 사전 계산을 포기하고, 주사위를 던졌을 때 특정한 면이 결과로 나올 확률은 모든 면에 대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해보자. 이때 원리적으로는 특정한 면이 나오는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은 실질적으로는 인간 무지의 핑계(subterfuge)일 뿐이며 초기 조건들을 정확하게 탐구하는 실험적 정확성을 높이지 못한 우리의 무능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라플라스의 상징적인 개념은 정확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성장했다. 이는 확률 이론의 철학에 대한 라플라스의 저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라플라스는 초인적인 지성은 확률 법칙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이 지성은 천문학자들이 행성들의 경로를 예측하는 것처럼 확률 게임의 결과를 예측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자 했다. 이러한 개념은 확률의 주관적인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흠결 없는 원리들을 따르며, 예측의 모든 불확실성은 오직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결정론의 원리로 이끈다.

  

   다른 한편 확률 개념에 대한 철학적 비판자들은, 확률의 주관적 이론이 확률에 관련된 가정들이 실재에 대해 갖는 객관적인 타당성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때 실재는 통계학의 빈도 법칙들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만약 주사위 면들 사이의 동일한 확률이 오직 인간의 무지에만 대응된다고 가정한다면, 주사위를 600번 던졌을 때 하나의 면이 100번 정도 나와야 하는 이유가 전혀 명확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이 인간의 무능력함에 대해 그토록 밀접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상상할 수 없다. 확률의 주관적 이론을 반박하는 이 논증은 결정적이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 사실로서 확률 법칙의 타당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마치 인과적 법칙들의 타당성을 그와 같은 사실로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객관적인 확률 이론에 따르면, 분자들의 집합(aggregate)과 같은 통계적인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규칙성은 자연적인 사건들 에 있는 근본적인 경향성이며, 이에 대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인과적 법칙들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자연과학의 임무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통계적인 법칙들의 사용이 단순히 잠정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인다. 프랑스 수학자인 쿠르노가 지난 세기의 40년대에 언급했던 것처럼 라플라스의 초인조차도 통계적 법칙들의 사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개별적으로 주사위를 던진 결과들에 대해 계산을 했을 때 모든 주사위의 면들이 평균적으로 동일한 빈도로 나타남을 발견할 것이다.

  

   확률 개념에 대한 그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확률의 개념을 원인의 개념과 결합하는 그 다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우리가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두 개념 모두 객관적인 실재를 나타낸다. 사실상 두 개념들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확률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과적 원리는 공허하고 쓸모없는 가정이라는 사실조차도 보일 수 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늘 엄격한 법칙들을 찾을 것이라는 것은 전혀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각각의 시간에 관측하는 모든 것은 근사적으로만 충족된 법칙이기 때문이다. 던져진 돌, 흐르는 전류, 휘어진 빛 광선 등을 정확하게 측정했을 경우, 측정 결과는 결코 수학적 공식에서 규정된 경로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측정 결과에는 항상 관측 오류라고 불리는 미세한 편차(deviation)들이 존재하며, 더 좋은 실험 도구들을 사용해서 이러한 편차들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오류가 어느 정도까지나 사전 계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오류는 오직 미미한 교란에 지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이미 확률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진술이다. 따라서 자연법칙을 개념적으로 완벽하고 엄밀하게 진술하고자 하면 확률의 개념은 어쩔 수 없이 모든 자연법칙들에 개입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도 확률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확률 개념이 여러 진술들에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포함되어 있는 확률이 매우 높아서 이는 실천적으로는 절대적인 확실성으로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철도 안내서를 믿고 특정한 순간에 기차가 역에서 정지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확실한 사실이 아니다. 특정한 교란이 기차의 시간 엄수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와 같은 경우 우리는 아주 약간은 확률이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사람들은 기차의 지연으로 인한 실망 때문에 고통을 겪은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고 믿는 주장들 역시도 특정한 확률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철제 다리 위를 걸을 때 우리가 걷고 있는 동안 다리가 지탱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일도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조차도 확실하게 예측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어느 날 밤에 우주적인 재난이 일어나서 지구가 그 경로를 이탈해버릴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 특히 우리는 그러한 불온한 가능성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너무나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훨씬 더 작은 확률을 다루는 방법 역시도 배웠다. 따라서 상인은 그의 사업에서 성공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확률을 갖고 판단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여러 방향에서 최대한 많은 수의 서로 다른 작업들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는 어쨌든지 자신의 모든 계획들이 단번에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따라서 그는 일정한 평균 수입에 의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절차는 확률을 포함하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갖는 태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경우의 수를 늘림으로써 우리는 단일 사례의 낮은 확률을 평균적인 성공의 높은 확률로 변화시킨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상인은 확률을 다루는 데 성공한다. 이는 과학자가 운동학적 기체 이론에서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 대해서 진술할 때 사용하는 절차와 동일한 절차이다.

  

   큰 수로 이행하는 것보다 더 예측의 확률을 높게 하는 방법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기상학자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경우, 그는 그의 예측이 오직 특정한 확률만을 갖고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만약 그가 오늘의 날씨 상태를 더 조심스럽게 연구한다면, 즉 바람의 방향뿐만 아니라 상당히 넓은 영역에서의 기체 압력 분포라든지 구름 존재의 여부라든지 온도 등을 파악한다면, 자신의 예측이 갖는 신빙성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물음과 관련되는 경우에 대해 최대한 면밀하게 탐구함으로써, 즉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찾아보고 이 요소들을 고려함으로써 자신의 예측을 더 낫게 할 수 있다.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물리학자 역시 그가 고려하는 투사 물체의 경로에 대한 예측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는 초기 속도 이외에도 공기의 저항, 지구 회전의 영향 등을 추가로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천문학자 역시 행성의 위치를 예측할 때 동일한 기본 원리를 사용할 것이다. 그는 문제가 되는 행성의 궤도와 관련된 요소들인 행성의 속도, 궤도의 지름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행성들로부터 작용하는 인력에 의해 발생되는 섭동(perturbation) 역시 고려할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정밀한 연구의 절차이다. 우리는 영향을 주는 더 많은 요소들을 포함함으로써 우리의 가설을 넓힐 수 있고, 이에 따라 예측에 더욱 더 큰 확률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발전해나갈 수 있을까? 모든 원인들에 대해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결과적으로 확률을 확실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추측컨대 아무도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진실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실천적인 확실성이라고 부르는 수준까지만 확률을 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확실성으로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 그토록 멀리까지 열려 있다는 것인가?

  

   이전에는 우리에게 그러한 길이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무제한적으로 정확성을 개선하는 것이 늘 가능한지의 여부는 해결되지 않은 물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요구는 필연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자연의 속성에 대한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정확성을 증가시키는 데 있어서의 절대적 한계, 즉 확실성의 부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경우, 문제가 되는 상황에 관련된 더 많은 요소들을 고려에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확실한 예측(또는 대략적인 확실성을 가진 예측조차도)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이전에 철학적 탐구를 통해서 예측된 바 있었던 이러한 가능성, 오늘날에는 자연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볼 수 있는 양자역학의 발전은 사태의 이러한 상태에 정확하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최대의 정확도로 동시에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임의적인 정확도로 전자의 미래 경로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산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의 객관적인 장애물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객관적인 장애물이란, 라플라스의 초인조차도 통과하지 못하며 오직 확률로서만 만족해야 하는 장애물을 의미한다. 자연은 단순히 말해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니다. 자연은 기계의 정확한 작동과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확률이 자연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서로 분리된 원자적 사건들이 결합해 아주 큰 확률을 갖게 되는 거시 세계에서만 우리는 이러한 확률을 실천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다룰 수 있다.

  

   비록 우리의 실천적인 활동에 있어 지각 가능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이론적 지식에서 일어난 혁명은 매우 심오하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세계의 역사를 시계의 움직임과 같은 기계적인 행위로 봄으로써 이를 훼손하는 결정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에서까지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건들이 진행하는 방식은 주사위를 연속적으로 던지는 게임과도 같아서, 각각의 분리된 단계는 주사위를 새로 던지는 것과 같다. 현재로서는 인과적 세계상과 통계적 세계상 사이의 결정 문제에서 통계적 세계상이 더 우위에 있다. 엄격한 인과성의 포기가 지식의 부족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반대로, 양자역학에 집중되어 있는 수학적이고 경험적인 관계들과 같은 매우 실질적인 지식이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이끌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이러한 개념이 고전 물리학이 구성했던 인과적인 세계상-운명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과 대조적으로 현대 자연과학에서 찾을 수 있는 근본적인 경향성-을 근본적으로 깨뜨렸다고 하더라도, 이 개념이 정신적이고 생리학적인 사건의 반인과적인 개념이 제시한 바 있는 모든 수수께끼들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의지에 의해서 행동을 통제하며, 자유의 느낌과 연관되는 인간의 행위 방식은, 세계의 역사를 확률의 게임으로 환원한다고 해도 여전히 답변되고 있지 않은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률 개념의 틀로부터 이 물음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이러한 해답이 발견되리라 믿는다. 결정론이 삶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결정론적인 해답들에 대항하여 세워놓은 단단한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래의 객관적 예정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큰 중요성을 가진다. 또한 우리가 더 이상 가능성과 생성의 개념을 인간의 무지로 인한 환상, 실재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들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며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대체물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됨에 따라, 이 개념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지금까지는 늘 철학적인 사변의 대상이었지만 이에 대해 개념적으로 엄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문제들과 당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분명 우리는 철학적 사유의 전통적인 방법론을 굳건하게 고수함으로써 좀 더 진전된 결과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정밀과학에 의해서 좀 더 정확하게 공식화된 문제들은 새로운 철학적 연구의 방법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진보는 더 이상 철학적 해설이라는 전통적인 방법론에 의존하기를 거부하고, 당면한 문제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그 자신의 길을 찾고자했던 철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는 현대 자연과학의 탐구 및 개념, 과학적 개념 형성과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지식의 문제를 그 가장 기초에서부터 좀 더 발전시키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