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의 자기소개서 02

강형구 2016. 2. 9. 20:56

 

   1936년 이스탄불대학 철학과 재직 중에 쓴 자기소개서

  

   철학자로서 나는 처음에는 칸트주의를 옹호했다. 하지만 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칸트적인 체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나의 책 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지식에서 나는 칸트가 선험적이라고 여겼던 시간과 공간의 특성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이 특성들은 상대성이론에 의해서 오류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 책에서 나는 지식의 필연적 전제들을 수립하고자 하는 칸트의 계획이 실패하게 된 근거를 제시했다. 인간의 알 수 있는 능력과 자연 사이의 일치는 칸트의 생각처럼 공준화 될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인간이 수립한 개념 체계와 자연 사이의 불일치 가능성은 원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불일치하는 경우에도 인식론이 실패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개념 체계를 변화시켜서 자연에 부합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상대성이론의 등장과 더불어 일어났다. 이 책에서 나는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위한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나는 칸트가 제시한 이성에 대한 분석을 과학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했다. 이와 같은 과학적-분석적 방법은 특정한 시점에서 인식론에 의해 사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전제들을 상술하고 이 전제들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을 시공간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 적용하여 여러 편의 논문들을 출판하였고, 이후 이 연구들의 결과가 두 권의 책 상대론적 시공간 이론의 공리화(1924) 시공간 이론의 철학(1928)으로 출판되었다. 우선 이 책들에서 나는 개념 체계의 인식론적인 요소들을 정의적인 요소들과 분리시키고자 했다. 나는 최초로 모든 시공간 정의들, 이른바 동등화 정의들의 완전한 체계를 수립했다. 또한 나는 최초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갖고 있는 경험적인 내용들을 공리체계의 형태로 정확하게 제시하였다(여기서 말하는 공리란 이론의 전제로서 사용되지만 그 자체로는 경험적으로 통제 가능한 진술을 말한다). 뒤이어 나는 시간의 인과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간 개념은 인과성의 개념으로 환원된다. 또한 나는 공간의 측정이 시간의 측정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이 세계의 인과적 구조임을 보였다. 시공간 이론의 공리들은 경험적인 진술들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법칙들은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특질들을 표현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은 실재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나는, 시간과 공간이 앎의 주체인 인간의 지식이 갖는 형식들이라고 본 이론(칸트와 푸앵카레의 규약주의)이 분명한 오류임을 증명했다. 이에 더해 나는 기하학의 시각화 문제를 분석한 후, 원리적으로 비유클리드적인 공간 역시 구체적으로 상상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뒤이은 두 개의 저술을 통해 나는 물리적 세계상의 포괄적인 상을 제시했다. 첫째로, 인식론적인 방법과 관련하여 물리적 지식의 목적과 방법(1929)을 발표했다. 둘째로, 물리적 세계관의 내용과 관련하여 대중적인 과학책 원자와 우주(1930)을 출판했다. 원자와 우주에서 나는 일상생활 및 초기 물리학의 개념 세계가, 인간의 자연적인 크기로 인해 인간이 속해 있는 중간 크기의 차원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증명했다. 거시적인 차원(천문학)과 미시적인 차원(원자)에서 이 개념 세계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므로 새로운 개념 세계가 필요해진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새로운 개념 세계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탐구 결과는, 칸트의 믿음과는 달리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칸트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부른 것은 사실상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진 일반적인 경험적 진술들이었으며, 이 진술들은 우리의 세계에 대해 오직 근사적인 타당성만을 갖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으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었고,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일관성 있는 경험주의는 발전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귀납의 문제였다. 귀납에 대한 흄의 비판 이후 귀납의 문제는 모든 인식론을 잠식했으며, 칸트가 제시한 해결책이 유지될 수 없음이 밝혀진 이상 이와는 다른 종류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나를 확률의 문제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귀납에 기초한 결론은 실제로는 확률에 기초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 연구할 때도 자주 확률의 문제로 되돌아와 연구했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1915)에서 나는 이미 확률 연산의 적용 문제를 다루었다. 비록 이 논문이 칸트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논문은 확률의 문제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논문에서 나는 이른바 식별되지 않은 원인의 원리가 유지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폐기되어야 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여러 논문들을 과학 학술지 특히 인식에 발표했다. 이러한 논문들 중 중요한 논문은 1925년에 발표된 세계의 인과적 구조 및 과거와 미래의 차이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특정한 종류의 인과성 개념이 발전 가능함을 예측했는데, 실제로 이 개념은 훗날 양자역학에서 구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들은 수학적으로 발전된 확률 연산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나는 이를 위해 논문 확률이론의 공리화(1932)를 출판했다. 이 논문에서 나는 확률 연산과 논리학을 결합해서 확률의 문제가 귀납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생각들을 통해 논리학의 개념이 확장되었고, 확장된 논리학인 확률 논리학이 1932년에 최초로 출판되었다. 1935년에 출판된 책 확률론에서 나는 확률 문제 전체에 대해 포괄적으로 서술했다.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결코 귀납적 결론들이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으며, 늘 이 결론들이 좀 더 높거나 낮은 확률을 갖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은, 참 혹은 거짓이라는 두 개의 진리값을 갖는 논리학이 아니라, 01을 경계값으로 하고 그 사이에 연속적인 진리값 척도를 갖는 논리학과 대응된다. 따라서 확률 논리학은 지금까지 기호논리학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던, 미래에 관한 진술 문제를 해결해준다. 하지만 확률 논리학은 과학적 사고의 전 범위를 포괄할 수 있다. 확률 논리학의 틀에서 귀납의 문제는, 귀납 법칙이 미래에 대한 진술들의 필수적인 전제임을 증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이 전제는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귀납적 방법의 성공은 보장될 수 없다. 오직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에 대한 진술을 작성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늘 이 진술들이 귀납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귀납적 결론을 위한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정당화이다.

  

   귀납의 문제에 대한 이와 같은 해결책이 제시되기 전까지는 논리경험주의의 발전이 완결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결책은 선험적 종합판단을 논박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실들 및 사실들에 대한 동어반복적인 변환이 있을 뿐이며, 우리로 하여금 사실들 너머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납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사실들을 조직화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성공적이며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예측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측은 기본적으로 내기이며, 우리는 경마에서 한 마리의 말에 내기를 하듯 미래에 대해 내기를 건다. 과학이란 가장 유리한 내기들의 체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과학적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학술 조직 활동에도 참여해왔고, 대부분의 경우 나의 활동은 베를린 학회비엔나 학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에 더해 나는 학술지 인식을 편집하여 출간하였고, 여러 학술대회를 주관했다. 내가 1931년에 출판한 소책자인 현대 자연철학의 과거와 미래는 학술적이라기보다는 방향을 설정하는(programmatic) 특성을 갖고 있었다.

    

   1951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제3자에 의해 쓰인 글

  

   라이헨바흐는 다시 물리학의 분석으로 돌아와 양자역학에 대한 분석을 진행했고, 현대 물리학에서 자주 논의되었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결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물질의 구성 성분이 물질인지 파동인지와 관련된 문제는 삼가 논리학을 도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삼가 논리학에서는 거짓이라는 진리값 사이에 미결정이라는 새로운 진리값을 도입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책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1944)로 출판되었다.

  

   라이헨바흐는 기호논리학에 대한 그의 연구들을 정리하여,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의 형태로 기호논리학 기초(1947)을 출판했다. 하지만 이 책은 교과서임과 동시에 논리학에 대한 많은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 그는 기호논리학의 방법을 대화 언어 연구에 적용했으며 새로운 종류의 문법을 고안했고, 이는 실제적인 유용성을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대화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개인적인 상황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같다. 터키 이스탄불 대학에서 그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으며,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언어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수리논리학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그는 전통적인 철학 체계를 비판하고 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책을 쓰고 있다. 이 책은 광범위한 대중을 독자로 삼고 있어 전문적이지 않은 형태로 올해 가을에 출간될 예정이다. 학문적 철학의 형성(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