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한스 라이헨바흐의 자기소개서 01

강형구 2016. 2. 8. 17:59

 

   1932년 베를린에서 학술적인 목적으로 쓴 자기소개서

  

   나는 1891926일에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고, 17살 때까지 함부르크에서 학교를 다녔다. 나의 아버지는 함부르크의 도매상인이셨다. 나의 가족들 중에 과학자는 없었고 공학자들만이 몇몇 있었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공학자가 되고자 했고, 나는 1910년과 1911년 사이의 두 학기 동안 슈트트가르트의 공과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배웠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나는 나의 관심이 매우 이론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나는 베를린 대학, 뮌헨 대학, 괴팅겐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학, 물리학, 철학을 공부했다. 나의 스승들 중에는 플랑크, 좀머펠트, 힐베르트, 보른이 있었다. 수학과 물리학 공부와는 달리 철학 공부는 전혀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학에서 배운 철학은 나에게는 부정확하며 자연과학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뮌헨 대학의 폰 애스터, 베를린 대학의 카시러는 예외였다. 그들은 자연철학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강의는 매우 고무적이고 자극적이었다.

  

   나는 철학자들 중에서도 칸트에게 가장 큰 흥미를 느꼈다. 나는 칸트의 철학을 매우 꼼꼼하게 연구했다. 그러나 나는 역사 속의 철학자들에게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나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저작들을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읽었지만, 나 자신의 철학적 작업은 항상 물리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으며, 나의 저작이 이전의 철학적 저작들과 어떤 역사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기체의 운동 이론에 관심을 가졌고, 기체 운동 이론에서의 개별적인 문제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실재와 관련되는 확률 법칙의 타당성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탐구는 이후까지 이어져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학위논문을 쓰면서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학위논문에서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한 나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이 해결책에 칸트 철학이라는 외형을 입혔으나, 나는 나의 학위 논문에서 제시한 기본적인 개념이 본질적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 개념은 확률의 문제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의 기초들 중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에를랑엔 대학에서 191532일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나는 26개월 동안 군인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이미 그 시절에 나는 전쟁이 매우 심각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이후 항상,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인류의 재앙인 전쟁을 유발하는 정신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특별한 임무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통신 부대에서 복무하면서 통신공학에 종사했는데, 전쟁의 마지막 해에 나는 러시아 전선에서 심각한 질병에 걸려 현역 복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 나는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베를린에 있는 한 회사에서 통신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공학자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에 나는 물리학자로서의 나의 역량을 발휘하여 이 회사의 확성기 연구소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나는 나와 아내의 생계를 위해 한동안은 공학자로서 계속 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상대성이론을 연구했다. 나는 베를린 대학에서 열렸던 아인슈타인의 강연에 참여했다. 그 때는 아인슈타인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강연의 수강자는 극히 적었다. 상대성이론은 내게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쳐, 상대성이론 때문에 나는 칸트 철학과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시공간의 문제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은 나로 하여금 칸트의 선험성 개념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나는 이러한 나의 내적이고 심오한 변화의 결과를 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지식이라는 작은 책에 담아 출간했다. 이 책을 쓴 직후 나는 스튜트가르트의 공과대학에서 강사로 강의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스튜트가르트에 머물렀다. 나는 스튜트가르트에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강의했다. 나는 물리적 측정 기법, 무선 전신,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강의했지만, 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도 강의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이 대학의 철학 교수직을 제안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철학 교수로서 나는 철학의 역사와 자연철학에 대해서 강의했다. 1926년에 나는 막스 플랑크의 도움을 받아 베를린 대학으로 오게 되었으며, 자연철학 교수 자리를 얻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1930년에 프라하의 독일 대학에서 자연철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스튜트가르트에서 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나의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그 결과 상대론적 시공간 이론에 대한 공리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1924,상대성이론의 공리화』). 내가 볼 때 이 공리체계의 가치는, 이 공리체계가 상대성이론에 대해 철학적으로 올바른 정당화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구성할 때 일반적이고 본능적으로 이 이론의 철학적인 요소들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저술에서는 인식론적인 관점으로부터 비롯된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찾기 어려웠다. 나의 판단에 이 공리체계의 결정적인 성과는, 상대성이론은 시간의 인과적 이론에 기초해야만 하며, 더 나아가 물리학은 특정한 종류의 동등화(상관성correlation) 정의들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었다. 더 나아가, 빛 기하학을 구성함으로써 나는 상대성이론에서 단순히 정의하는 기능을 하는 진술들을 자연의 내용에 대해 주장하는 진술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다. 훗날 나는 시공간 이론에 대한 나의 여러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여 시공간 이론의 철학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나로 하여금 과학적 저술을 시작하도록 했던 확률의 문제는 계속해서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학위논문을 쓸 당시 이미 나는 확률의 개념과 인과성의 개념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수립하였으나, 상대론적 시간 이론에서 내가 다시 한 번 인과성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 이후 나는 나의 연구를 좀 더 발전시켰다. 따라서 나는 1924년에 세계의 인과적 구조 및 과거와 현재의 차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나는 세계 속의 인과성 연관들로부터 확률의 연관을 일반화함으로써, 시간의 방향을 결정하는 방법을 얻고자 했다. 이 논문에서 나는 결정론을 하나의 극한적인 진술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나는 이 논문에서, 확률의 극한이 임의적인 정도로 확실성에 가까워지지 않는 좀 더 일반적인 종류의 세계가 상상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러한 일반화는 이후 양자역학에서 실현되었다.

  

   베를린에서 나는 확률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1929년에 나는 통계적 연속확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는 오직 시간적으로 무한소인 영역에서만 결정론적인 특성을 갖는 확률 연관의 수학 이론이 제시되었다. 이후 나는 확률 연산의 새로운 기초를 개발해서 1932년에 논문 확률이론의 공리화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확률이론은 논리적인 공식들, 수학적인 공식들, 연산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특수한 연산 아래에서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응용 확률 연산을 하나의 단일한 공리인 귀납 공리로 환원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이미 1929년에 프라하에서 열렸던 인식론 학회에서 발표했던 사고를 사용했는데, 이는 간단히 말해 특수한 확률 논리에 관련한 사고였다. 왜냐하면 확률 문제는 엄격한 논리의 틀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물리학에서 확률 개념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차지한 이래로 물리적-과학적인 지식 이론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성과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물리적 진술들이 기본적으로 확률 진술임을 보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나는 자연철학 학회들을 조직적으로 상호간에 더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 나는 경험철학을 위한 베를린 학회및 학술지 인식의 창설을 통해 이러한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인식에서는 정밀한자연철학에 대한 저술들이 수록되었고, 그와 동시에 국제적인 수준의 지성적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이 학술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울 무렵부터 나는 비엔나 학회의 회원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비엔나 학회의 대표로서 루돌프 카르납은 학술지인식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비엔나 학회와의 협력 속에 우리는 프라하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인식론에 관한 학회를 주관하였는데, 이 학회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학자들과의 모임도 가질 수 있었다. 인식에 수록된 학회 결과 보고서를 보면, 학회에서 주로 인과성, 확률, 수학의 논리적 기초에 관련한 토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나는 확률 문제에 대한 나의 논문들을 종합하여 좀 더 포괄적인 책으로 출판하고자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