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 소개

강형구 2015. 9. 28. 22:25

 

이 책의 저자 라이헨바흐는 어떤 사람인가?

   ☞ 대학에서 공학, 수학, 물리학, 철학을 공부한 20세기 초반의 독일철학자다. 물리학에 적용되는 수학적 확률 개념을 주제로 삼아, 수학 교수와 철학 교수의 공동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신회사에서 근무했으며, 대학에서 공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자연과학, 공학, 철학을 두루 공부한 철학자였다.

 

19세기에 유럽을 풍미했던 칸트의 자연철학이란 어떠한 것인가?

   ☞ 칸트는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직관 형식 및 특정한 범주들(, , 관계, 양태)을 통해 사물들을 받아들인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칸트는 감각 경험을 정돈하는 특정한 원리들이 인간에게 있어, 이 원리들을 토대로 모든 감각들을 질서 짓는다고 보았다.

 

칸트가 제시한 선험적 종합 원리란 무엇인가?

   ☞ 칸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감각 경험을 받아들이는 틀이기 때문에 모든 감각 경험은 시간과 공간을 전제한다. , 시간과 공간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경험에 앞서 있고’, 그런 의미에서 선험적이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본성은 단순히 이 개념들을 반성적으로 분석한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 시간과 공간의 특성은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해당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만으로는 밝혀지지 않는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 인과성의 원리, 고전역학에서의 운동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수학에서의 공리 등 수학과 물리학의 기초적 지식을 일종의 선험적 종합지식이라고 보았다.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종합지식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서 반박되지 않지만, 그 본성이 개념적논리적 분석만으로는 밝혀지지 않는 지식이다.

 

왜 상대성이론은 당대의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나?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공간이 유클리드적인 성격을 띠는 것, 시간은 좌표계와 무관하게 일정하게 흐르는 것을 칸트적인 의미에서 선험적 종합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향후 물리학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의 흐름이 좌표계에 따라 달라지며, 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물들이 있는 공간은 유클리드적인 공간이 아니라 비유클리드적인 공간임을 주장했다. 따라서 칸트의 자연철학을 믿고 있던 많은 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이 잘못되었거나, 물리학 이론인 상대성이론이 자연에 대한 철학적 인식론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의 선험적 성격을 논박하는 라이헨바흐의 기본 전략은 무엇인가?

   ☞ 우선 라이헨바흐는 상대성이론이 경험적으로 잘 입증된 과학 이론임을 전제한다. 그 다음, 상대성이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주요 원리들이 칸트가 제시했던 선험적 종합 원리들만큼이나 인간에게 자명한 원리들임을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비록 개별적인 선험적 종합 원리들 각각을 반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선험적 종합 원리들의 집합이 과학적 탐구에 의해 입증된 경험 사실들의 총체와 양립 불가능함을 보임으로써 기존의 선험적 종합 원리가 반박될 수 있음을 보인다.

 

라이헨바흐는 시간과 공간의 선험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박하는가?

   ☞ 만약 우리가 특수 상대성의 원리를 경험적으로 잘 입증된 원리로 받아들일 경우, 시간의 선험적 성격을 의미하는 원리가 포함된 물리학 원리들의 집합이 우리의 관측 자료 총체와 양립 불가능해진다. 이와 유사하게, 만약 우리가 일반 상대성의 원리를 경험적으로 잘 입증된 원리로 받아들일 경우, 공간의 유클리드적 성격을 의미하는 원리가 포함된 물리학 원리들의 집합이 우리의 관측 자료 총체와 양립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라이헨바흐는 칸트가 주장한 선험성을 완전히 거부하는가?

   ☞ 그렇지 않다. 라이헨바흐는 칸트의 선험성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첫째,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언제나 참인 것. 둘째, 대상 개념을 구성하는 것. 라이헨바흐는 선험성의 첫째 의미는 거부되어야 하지만 둘째 의미는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상대성이론을 통해 대상의 개념이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대상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물리학은 개념만을 다루는 학문인 수학과 달리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학문이다. 그런데 사물들에 대해서 경험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우선 그 사물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런 작업을 라이헨바흐는 동등화(coordination)’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동등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우리는 사물들이 어길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을 사전에 가정한다. 예를 들어 인과성의 원리, 상대성의 원리 등과 같은 원리들은 사물들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적인 원리들이고, 이를 라이헨바흐는 동등화 공리(axiom of coordination)’라고 부른다.

   둘째,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경험적 측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임의적 정의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길이를 측정하기 전에 단위 길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시간을 측정하기 전에 어떻게 시간을 측정하는지에 대해 정의한다. 이를 라이헨바흐는 동등화 정의(coordinative definition)’라고 부른다.

 

동등화가 여러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대상 개념은 임의로 구성 가능한가?

   ☞ 동등화 정의의 경우, 서로 동등한 복수의 정의들이 사용될 수 있다. 동시성을 정의하는 것, 길이의 단위를 정의하는 것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복수의 동등화 정의들 중에서 물리학 이론을 가장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정의를 사용한다. 이때의 단순성을 기술적 단순성(descriptive simplicity)’이라 한다.

   그러나 동등화 공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절대적 시간의 원리공간의 유클리드적 성격의 원리와 같은 동등화 공리의 경우, 새로운 관측 자료가 확보되면서 더 이상 경험 자료와 일관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물의 특정 상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예측을 하고 이 예측이 경험 자료와 일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유일성의 조건(requirement of uniqueness)’이라 하는데,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동등화 공리가 보여주는 단순성을 귀납적 단순성(inductive simplicity)’이라 한다.

 

만약 대상 개념이 동등화 공리를 전제한다면, 어떻게 동등화 공리가 경험적으로 반박될 수 있는가?

   ☞ 비록 우리가 동등화 공리를 전제하고 대상 개념을 구성한다고 해도, 실재에서 획득되는 경험 관측 자료가 이 대상 개념과 일관되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고전역학의 모순은 전자기 현상의 발견 및 아주 빠른 속도의 물체에 대한 연구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도 이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동등화 공리가 유일성의 조건충족하는지의 여부는 잠정적인 것이며, 이후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만약 대상 개념이 변화 가능하다면, 이 변화는 연속적인가 불연속적인가?

   ☞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대상 개념의 변화는 연속적이기도 하고 불연속적이기도 하다. 우선 연속적인 측면부터 살펴보자. 고전역학의 경우 물체의 속도가 빠르거나 물체의 질량이 크다는 특수한 조건 이외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상대성이론이 제시하는 예측에 근사하는 예측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상대성이론의 동등화 공리는 고전역학의 동등화 공리와 전면적으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범위에서 근사적으로 일치한다. 이렇듯 새로운 동등화 공리가 근사적 일치를 만족시키는 예전의 동등화 공리를 대체하는 방법을 라이헨바흐는 연속적 근사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동등화 공리가 예전의 동등화 공리와 내용상 다르다는 점에서 대상 개념의 변화는 불연속적이다. 시간의 흐름이 시간을 측정하는 관측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공간의 곡률이 공간에 위치한 물체의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고전물리학의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 개념과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대상 개념의 변화와 관련한 철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 새로운 동등화 공리를 통해 대상 개념을 변화시키는 것은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다. 상대성이론의 경우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와 같은 업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대상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명료한 분석을 아인슈타인 본인이 제시하지는 못했다. 물리학자의 주된 임무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그 이론이 경험과 합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지 이론에 대한 분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은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의 몫이다. 철학자는 과학적 지식에서 어떤 부분이 공리이고, 어떤 부분이 정의이며, 이 지식이 전제하는 경험 자료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대상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분명히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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