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라이헨바흐의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 소개

강형구 2015. 9. 26. 15:34

(01) 이 책의 저자인 한스 라이헨바흐는 누구인가?

   → 한스 라이헨바흐는 20세기 전반기에 활발히 활동한 과학철학자다. 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통계역학과 같은 현대 물리학 이론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02) 왜 철학자가 과학이론을 분석하는가?

   → 19세기 중엽 이후 과학의 전문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적인 과학적 탐구 활동에 비과학자인 일반인이 개입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반인 역시 세계의 작동방식과 구조를 설명하는 과학이론에 관심을 갖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한다. 철학자는 그 특유의 분석 방법을 통해, 당대의 과학이론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

 

(03) 과학이론에 대한 설명은 그 이론을 만든 장본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과학의 전문화 이후 과학이론은 과학자 집단 특유의 협업과 경쟁 체제 아래에서 생산된다. 그런 까닭에 여러 사람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발전된 양자역학의 경우, 실험적으로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이론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을 만든 과학자들 본인도 분명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철학자가 과학이론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04) 하지만 양자역학의 해석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보어(Bohr)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이 기여하지 않았는가? 이들의 해석을 이른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 보어의 원자 이론으로 잘 알려진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있는 물리학 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보어가 하이젠베르크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과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을 발전시킨 것도 코펜하겐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였기 때문에 이 해석을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라 부른다.

   보어는 뛰어난 물리학자였지만, 많은 동료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에 대한 보어의 철학적 견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보어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들 가운데서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동의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학자의 대표적인 예였다.

 

(05) 그렇다면 라이헨바흐의 이 책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인가?

   → 그렇지는 않다. 라이헨바흐는 철학자의 분석적 방법을 통해 양자역학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해명을 통해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과는 다소 상이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06) 양자역학이 이전에 등장한 물리학 이론, 특히 고전역학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 고전역학과 상대성이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당연한 약속으로 전제한다. 첫째, 자연의 법칙들은 대상이 관측되거나 그렇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동일하다. 둘째, 대상의 상태는 대상이 관측되거나 그렇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동일하다. 이러한 두 가지 약속을 전제해서 자연의 여러 현상을 기술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이 두 약속을 유지할 경우 자연을 기술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07)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가?

   → 물리학에서는 사물의 움직임을 특성화하기 위해 사물에 특정한 물리량을 부여한다. 그리고 운동 법칙을 통해 그 물리량이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기술한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에서는 물체의 운동을 특성화하고 그 운동을 예측하거나 계산하는 데 위치운동량이라는 물리량을 사용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사물을 측정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 사물을 측정했을 때의 물리량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전제할 경우, 인과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한다. 이전까지의 측정을 통해서는 파동이라고 특성화될 수 있던 물리적인 대상이 또 다른 측정을 통해 순간적으로 하나의 점으로 오그라든다고 생각해야 하는데(이른바 축퇴(degeneration)’ 현상), 이러한 오그라듦은 순간적이고 공간을 뛰어 넘는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인과성의 원리에 위배된다.

 

(08) 이것이 이른바 입자-파동의 이중성아닌가?

   → 중등학교 교과서나 대학 교재에서는 미시세계에서 물질이 입자파동의 성격을 둘 다 갖는다고 설명하고, 이를 입자-파동 이중성이라 부른다. 그런데 설명이 이러한 수준에서 그쳐버리면 미시세계는 신비로운것으로만 남게 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물체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인 것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만약 미시세계에서 이러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면, 이 현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09) 그렇다면 라이헨바흐는 이와 같은 미시세계의 현상을 어떻게 분석하는가?

   → 우선 그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측정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약속(또는 규약)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인다. 방금 전까지 내가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고개를 돌리는 동안 그 나무가 계속 서 있는지 아니면 사라져버리는지를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동안 그 나무가 사라졌다가 내가 다시 나무를 보려고 할 때 맞춰서 나무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10) 대개 우리는 우리가 보지 않을 때에도 나무가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 그렇다. 그러나 라이헨바흐는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경험적으로는 입증될 수 없는 하나의 약속, 다시 말해 일종의 규약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나무가 사라져버리거나, 한 그루였던 나무가 두 그루로 변한다고 가정해도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 그렇게 되면 앞서 말했던 고전역학의 두 전제인 자연 법칙의 동일성원리와 대상 상태의 동일성원리가 위배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규약을 채택할 경우, 우리가 보지 않았을 때의 나무는 우리가 볼 때의 나무와는 다른 자연법칙을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원리를 위배하지 않는 규약, 우리가 보지 않았을 때도 나무는 한 그루가 그대로 존재한다는 약속을 채택한다.

 

(11) 미시세계에서는 고전역학에서와 같은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 라이헨바흐는 위에서 제시된 고전역학의 두 원리를 만족시키는 기술 체계를 표준 체계(normal system)’라고 부른다. 또한 우리가 측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을 현상(phenomena)’이라 부르고, 측정 사이에 대상이 갖는 상태를 사이현상(inter-phenomena)’이라 부른다. 고전역학에서는 현상사이현상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는 표준 체계가 존재하였지만, 양자역학에서는 현상사이현상을 동시에 기술하려고 할 경우 늘 특정한 방식으로 인과성의 원리가 위배된다. 이를 그는 변칙성의 원리(principle of anomaly)’라고 부른다.

 

(12) 이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 그렇다. 하지만 라이헨바흐는 가급적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일종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유클리드기하학과 비유클리드기하학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

 

(13) 유클리드기하학과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서로 확연하게 다르지 않은가?

   → 그렇지 않다. 처음에 수학자들은 유클리드기하학의 평행선 공리(한 직선이 있고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이 있을 경우, 그 점을 통과하며 원래의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하나)를 부정해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기하학을 발견했다. 이후 가우스와 리만이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위상기하학을 수립한 후, 유클리드기하학을 비유클리드기하학과 상치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인 기하학의 한 종류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14)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은 어떤 점에서 연속선상에 있는가?

   → 모든 물리학 이론 그 내용상 관측언어, 대상언어, 메타언어로 구분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이론인 물리학 이론에서 물리적 대상을 경험하거나 측정한 결과는 관측언어로 표현된다. 이에 더해, 관측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물리적 대상들의 거동 또는 상태를 대상언어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대상언어와 관측언어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미론적 규칙들이 필요한데, 이를 메타언어라 부른다.

   라이헨바흐는 고전역학의 메타언어가 2가논리학을 사용한다면, 양자역학의 메타언어는 3가논리학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런데 2가논리학과 3가논리학은 다가(多價)논리학의 한 종류이며, 3가논리학은 2가논리학을 포괄하는 더 일반적인 논리학이다.

 

(15) 2가논리학과 3가논리학의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 2가논리학에서는 명제 또는 진술에 또는 거짓이라는 진리값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고전역학에서는 시간 t에 물체 A의 위치가 x이다라는 진술에 또는 거짓의 진리값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3가논리학에서는 또는 거짓이라는 진리값 이외에 미결정(indeterminate)’이라는 진리값을 도입한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는 측정 이전이나 측정 이후의 물리적 대상이 특정한 물리량을 갖고 있다는 진술에 미결정의 진리값을 부여한다.

 

(16) 양자역학 언어에 3가논리학을 도입하면 어떠한 이점이 있는가?

   → 앞서 양자역학에서는 현상사이현상을 동시에 기술할 경우 인과성의 원리가 위배된다고 했다. 이는 양자역학에서 2가논리학을 사용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3가논리학을 사용할 경우에는 인과성의 원리가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두 종류의 현상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다.

 

(17) 이와 같이 3가논리학을 이용한 양자역학 해석은 어떤 점에서 코펜하겐 해석과 다른가?

   → 라이헨바흐에 따르면, 보어가 중심으로 고안한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사이현상에 관한 일체의 진술들에 진리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없다고 본다. , 양자역학의 유의미한 언어적 진술들에서 사이현상에 대한 진술들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라이헨바흐는 이와 같은 코펜하겐 해석의 관점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본다. 3가논리학을 도입하게 되면 양자역학의 많은 진술들을 여전히 의미 있는 진술들로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책의 철학적 가치는 무엇인가?

   → 19세기 이후 철학은 과학과 사이가 멀어졌지만, 사실 서양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철학과 과학은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해왔다. 라이헨바흐의 이 책은 과학이 고도로 전문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학의 실제 내용과 밀접하게 연계된 철학적 탐구가 가능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19)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은 독자는 누구인가?

   → 물리학 교과서를 공부하면서 양자역학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공계 학생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논리경험주의와 20세기 분석철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이나 학자들에게도 유용한 독서 자료가 될 것이라 본다.

 

(20) 당신은 누구인가?

   → 강형구다.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교육부 산하기관인 한국장학재단에서 근무 중이다.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라 번역문에 다소 어색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hgkang82@kosaf.go.kr로 알려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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