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연구 이야기

로빈 르 푸아드뱅이 쓴 [4차원 여행] 요약 정리

강형구 2015. 9. 4. 10:18

제목 : 4차원 여행 공간과 시간의 수수께끼들

            (travels in four dimensions : Enigmas of Space and Time)

저자 : 로빈 르 푸아드뱅(Robin Le Poidevin)

역자 : 안재권

출판 : 해나무(2010)

요약 : 강형구(2011-30086), 서울대학교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15. 7. 23.)

 

 

1: 모든 사물의 척도

 

<그리니치에서 일어난 일>

 

   우리는 시간 개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60초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시간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그것보다는 손목시계로 측정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만 손목시계 역시 태엽을 감아주지 않거나 배터리를 충전시켜주지 않으면 시간이 느려질 것이다. 또는, 손목시계를 뜨겁게 가열하거나 불규칙한 크기의 전자기력을 손목시계에 가하면 시계의 초침이 불규칙하게 움직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외적 물리력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손목시계보다는 세슘 원자시계가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슘 원자시계(혹은 이보다 더 정밀한 시간 측정 도구)가 정말로 정확한가?”라고 묻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세슘 원자시계가 측정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자를 통해 길이를 잰다. 하지만 시계는 무엇을 재는 것인가? 우리는 변화를 통해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시계는 규칙적인 변화를 이용해서 시간을 잰다. , 시계는 시계의 변화를 사용해서 변화함을 통해 드러나는 시간을 잰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자. “시계가 정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간은 변화와 동일한 것인가? 이 두 의문 사이의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는 어떤 것인가?”(22)

 

<측정기준, 규약, 사실>

 

   시간 측정기준에 관한 규약주의(conventionalism concerning the metric of time)에 따르면, 일단 시간 표준을 선택하고 나면 그 선택하는 행위 자체로 표준은 전적인 정확성을 부여받는다. 표준의 선택은 규약의 문제이다. 반면, 시간 측정기준에 관한 객관주의(objectivism concerning temporal metric)에 따르면, 측정 체계에 대한 어떠한 관습적 선택과도 무관하게 두 간격이 동등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사실은 존재한다. 세계에 대한 어떤 주어진 진술이, 아무리 이상적인 상황에서라도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가능한 방법이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진술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입장을 검증주의(verificationism)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검증주의를 받아들이면, 측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 경우, 시간의 객관적 흐름에 대한 진술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는 시간 측정에 대한 규약주의를 옹호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직관은 우리의 측정과는 무관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시간과 자연의 법칙들>

 

   시간 측정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은 해당 측정이 운동의 법칙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제안한 것은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였다. 오일러에 따르면, 일정한 순환 과정에 맞게 시간 단위를 정의했을 때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이 입증된다면 이 과정을 주기적(periodic)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운동법칙은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것이므로, 시간 측정의 정확성을 진단하는 이 방법은 시간 측정에 대한 객관주의를 옹호하고 규약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운동법칙과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 자체가 완벽하게 정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불확실성은 실험을 거듭 시행하면서 줄일 수 있다. 다른 문제는 운동 법칙 자체가 규약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경우 발생한다. 우리는 운동 법칙이 사물들이 세계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기술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볼 필요는 없다. 체스를 두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심적 상태를 갖지 않지만,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심적 상태를 갖고 체스를 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규약주의는 대담한 입장이며, 논박하기 쉽지 않다.

 

2: 변화

 

<변화로서의 시간>

 

   만약 모든 변화가 멈춘다면 시간 역시 멈추게 될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physica)]에서 제기한 물음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시간이 변화라는 견해를 제시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과 변화를 동일시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변화는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등 다양한 속도로 진행될 수 있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고, 변화는 우주의 일부분에 국한되지만 시간은 우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에 대해, 시간을 변화의 일부가 아니라 변화 일반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대응할 수 있다.

 

   그러면 시간은 어떤 종류의 변화인가? 시간은 미래이기를 멈추고 현재가 되었다가 점점 더 과거가 되어가는 사건들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기술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차 변화(first-order change)와 이차 변화(second-order change) 구분을 도입하자. 일차 변화란 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성질에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차 변화는 사건들이 현재이기를 멈추고 과거로 흘러가면서 겪는 변화이다.

 

<변화 없는 시간?>

 

경험 논증

1. 변화가 없는 기간 동안 경험은 전혀 없을 것이며- 경험 그 자체도 변화의 한 형태인 까닭에- 따라서 변화가 없는 시간의 기간 동안에 대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기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으며 따라서 그러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어떠한 차이도 가져오지 않는다.

3. 우연히 참이 되는 어떤 진술은 그 참임이 현재 혹은 이후의 어떤 단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어떤 차이를 유발할 수 있는 경우에만 참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4. 변화가 없는 기간이 발생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5. 어떤 진술이 참이거나 그렇지 않음을 (혹은 참일 가능성이 높거나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진술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6. 변화가 없는 기간이 발생했다는 취지의 모든 진술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차 변화 없는 시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논증을 경험논증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험 논증의 결론 6은 지나치게 강하다. 참과 거짓 여부를 떠나, 5분 동안 우주에서 어떤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시간적 진공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전제 1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전제 5 역시 너무 강하다. 이와 달리 어떤 진술은 해당 진술과 적합한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고, 시간은 변화라는 관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변화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시간에 대한 진술이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수정해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간 속에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 전제 5를 좀 더 완화한다고 하더라도 전제 1과 결론 6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독일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가 제시한 시간적 진공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을 살펴보자. 그의 논증을 측정 논증이라고 부른다.

 

측정 논증

1. 기간은 변화로 측정한다.

그러므로

2. 정의상 시간적 진공에서는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으므로 그 길이를 판단할 어떠한 가능한 수단도 없다.

3. 시간적 진공의 길이를 판단할 어떠한 수단도 없다면, 시간적 진공에는 명확한 길이가 없다.

4. 모든 시간 간격에는 명확한 길이가 있다.

그러므로

5. 시간적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

 

   이 논증의 문제는 전제 34에 있다. 시간 측정 기준에 대해 규약주의의 입장을 취하느냐 아니면 객관주의의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전제 34를 받아들이는지의 여부가 달라진다. 규약주의자는 전제 3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나, 객관주의자는 이를 거부할 것이다. 규약주의자는 전제 4를 받아들지지 않을 것이며, 객관주의자는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 규약주의든 객관주의든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취하면 전제 3, 4 둘 모두를 인정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라이프니츠는 변화 없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세 번째 논증을 제시했는데, 이를 충족 이유 논증이라고 한다.

 

충족 이유 논증

1. 과거에 시간적 진공이 존재한 적이 있다면 변화가 없는 기간 이후에 변화가 재개되는 시점도 있을 것이다.

2. 일정한 순간에 발생하는 모든 변화에는 직전의 변화에 의해 다른 여느 순간이 아니라 정확히 그 순간에 발생하게 된 이유에 대한 해명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3. 시간적 진공 직후에 발생하는 변화는 왜 실제로 발생한 그 때에 발생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존재하지 않는다(어떠한 변화도 직접 선행되지 않으므로).

그러므로

4. 과거에 시간적 진공은 존재한 적이 없다.

 

 

<요약>

 

   시간과 변화가 동일하다고 보는 입장을 시간에 대한 관계론(relationism about time)이라고 부른다. 시간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이 시간에 대한 절대론(absolutism about time)이다. 관계론자는 시간적 진공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절대론자는 긍정한다. 앞서 살펴본 경험 논증, 측정 논증, 충족 이유 논증은 시간적 진공을 논박하는 관계론자 입장의 세 가지 논증이다. 첫째 논증과 둘째 논증은 의심스러운 전제 혹은 전제들의 조합에 근거한다. 셋째 논증은 결론의 범위가 한정적이다. 이 논증은 미래의 시간적 진공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면이 없는 상자?

 

<두 세계가 만나는 곳>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정신과 물질이 이질적이라고 보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질은 연장(延長)을 갖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정신과 물질은 어떻게 상호작용 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의 정신 물질 이원론적 견해에 대해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었던 헨리 모어(Henry More)는 반대했다. 모어에 따르면 정신, 영혼 혹은 영(따라서 신 역시)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 물질을 특징짓는 것은 연장이 아니라 불가입성이다. 한 물체가 공간을 점유하면 동일한 위치를 다른 물체가 점유할 수 없다. 따라서 모어에게 공간이란 물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며, 정신과 물질이 만나는 매개를 제공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은 물체가 없는 공간의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

 

<허공에 반대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연속적이다. 물질은 원칙적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어떠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유한하지만 그 주변에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허공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시했다. 만약 허공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허공 속에서 물체는 어떻게 움직일까? 물체가 허공 속에 있으면 그 속에는 해당 물체 밖에 없으므로 물체에 작용하는 힘도 없고, 그 물체가 특별한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하는 어떤 요소도 없다.

 

   허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번째 반론을 살펴보자. 물체의 운동은 그 물체가 운동하는 공간의 매질이 갖는 저항에 반비례한다. 예를 들어, 물체는 물 속에서보다 공기 속에서 더 빨리 움직이고, 매질 속에서도 저항이 작은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허공에는 물질이 전혀 없으므로, 물체는 무한히 빠른 속도로 모든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는 불합리하다.

 

   허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가지 반론은 근대 물리학에 의해서 반박될 수 있다. 근대 물리학에 따르면 물체에는 관성이 있으므로 허공을 만나도 기존에 운동하던 방향과 속도로 계속 운동하고자 할 것이며, 허공을 통해서도 중력과 같은 원거리 힘이 작용할 수 있다.

 

<단지, 펌프, 기압계>

 

   허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반박하는 몇몇 사례들이 있다. 첫째, 단지의 사례이다. 두 개의 크기가 동일한 단지가 있고, 단지 하나에는 재가 들어 있다. 두 단지에 물을 넣으면 동일한 양의 물을 넣을 수 있다. 원자론자들은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물은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미세한 틈들을 갖추고 있어, 재들은 해당 틈들에 들어간다.

 

   갈릴레이의 제자인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90센티미터 정도의 유리관 한 쪽 끝을 막고 수은을 채운다. 그 다음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유리관을 거꾸로 세워 수은이 담긴 통에 잠기게 했다. 이 때 수은의 수직 기둥은 유리관의 꼭대기까지 이르지 않았고 유리관 끝에는 빈 공간이 남았다.

 

   마그데부르크의 시장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는 거대한 두 개의 구리 반구를 합친 후 공기를 빼냈다. 공기를 빼내자 두 반구가 강하게 달라붙었고 여러 필의 말들이 잡아당겼지만 반구들을 떼어내지 못했다.

 

<진공의 교훈>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적 탐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공간적 진공의 존재는 시간적 진공의 존재보다는 더 쉽게 논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공간이 시간과 달리 1차원이 아니라 3차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공간적 진공에 관련해서는 시간적 진공에서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과연 국소적인 공간적 진공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차지하는 진공이 있는가? 진공이란 항상 그 주변을 둘러싼 물체들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공간에 대한 절대론(absolutism about space)은 공간이 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공간에 대한 관계론(relationism about space)은 공간이 물체가 아니라 물체들 간의 관계-공간적 관계-의 체계라고 본다. 공간에 대한 절대론자는 물체들에 의해 점유되지 않은 지점들의 존재를 옹호하며, 이 지점들이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지시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둘째, 물체들이 해당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준다. 셋째, 일정한 기하학적 진술의 진위를 설명해준다.

 

   이에 대해 관계론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 수 있다. 첫째, 점유되지 않은 지점들은 항상 물체들 사이의 특정한 거리 관계를 지시하는 것이지 해당 지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해당 지점이 아니라 두 물체가 갖는 거리 관계이다. 셋째, 기하학적 진술의 진위는 그러한 진술이 지칭하는 대상이 실제 공간에 존재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판가름할 수 있다.

 

<공간의 과잉>

 

   관계론자는 절대론자가 주장하는 공간이 갖는 특별한 역할이 없으며, 해명할 수 없는 가정적인 사실을 도입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비판한다. 만약 구체적인 사물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진공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 , 우주의 경계 너머에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는 공간에 대한 절대론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은 반박을 제시했다.

 

우주 외 공간에 대한 반론

1. 어떤 물체가 특정 순간에 실제로 점유하고 있는 위치가 아닌 다른 위치를 점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순간 해당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인과적 해명이 존재한다.

2. 우주가 빈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우주 전체가 공간 속에서 현재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는 다른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3. 우주가 빈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현재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인과적 해명이 존재한다.

4. 그러나 빈 공간은 완전히 균일하므로(즉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을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전체로서의 우주가 현재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해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5. 우주는 빈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다.

 

   위와 같은 논증에 대해 절대론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 수 있다. (1) 절대 공간의 경계는 유한한 우주의 경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은 공간과 우주의 경계 일치를 우연한 것으로 만든다는 단점이 있다.) (2) 공간과 우주는 무한하다. (3) 전제 1은 우주 안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만 참이며, 이를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절대운동에 대한 탐구>

 

   상대운동이란 물체들 간의 공간적 관계에서의 변화이다. 절대운동이란 공간 그 자체에 대한 운동에 주어진 이름이다. 아이작 뉴턴은 공간 자체에 대한 절대운동을 옹호했다. 뉴턴은 속도나 방향이 변하는 운동, 즉 힘의 개념을 통해 절대공간에 대한 증거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 두 개의 구체를 하나의 노끈으로 연결하고, 노끈의 중점을 중심으로 구체를 일정한 속도로 돌린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두 물체의 상대운동은 존재하지 않지만, 두 물체를 묶고 있는 노끈에는 계속 장력이 가해진다. , 노끈에서 볼 수 있는 장력은 두 물체의 절대운동을 나타낸다.

 

   다음으로 그는 유명한 양동이 실험을 제시한다. (1) 양동이와 물은 정지해 있다. 수면은 평평하다. (2) 양동이가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운동은 아직 물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면은 평평하다. (3) 양동이와 물이 움직이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정지해 있다. 수면은 오목하다. (4) 양동이는 정지했으나 물은 계속해서 운동한다. 수면은 오목하다. 물과 양동이 사이의 상대적인 관계만 따지면 (2)(4)는 동일한 것 같다. 하지만 왜 (2)에서는 수면이 평평하고 (4)에서는 수면이 오목한가? 이를 뉴턴은 (2)에서는 물이 절대적인 정지 상태에 있지만 (4)에서는 물이 절대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절대가속에 근거한 논증

1. 구성요소들이 서로에 대해 정지 상태인 계에서 원심력이 존재하는 것은 가속 때문이다.

2. 물체의 가속은 절대적- 즉 절대공간에 대한 것-이거나 아니면 단지 다른 물체들에 대한 것이다.

3. 계 바깥에 어떠한 물체도 없는 상태, 따라서 어떠한 상대가속도 없는 상태에서 구성요소들이 서로에 대해 정지해 있는 계 내부에 원심력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4. 절대가속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5. 절대공간은 존재한다.

 

   이 논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제 3이다. 계 바깥의 물체들이 계와 무관하다고 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론은 적어도 다음의 측면에서 관계론에 대응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다. 절대공간의 개념이 관찰할 수 있는 사실들에 관한 어떤 차이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관계론자의 주장과 달리, 절대공간은 실제로 앞서 살펴본 구체나 양동이에 가해지는 힘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4: 곡선과 차원

 

<추방된 에우클레이데스>

 

   그리스 수학자 에우클레이데스는 [기하학 원본(Stoicheia)]에서 다음의 두 가지 법칙이 기본적인 진리라고 보았다. (1) 임의의 두 점을 잇는 직선은 정확히 한 개다. (2)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통과하며 그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정확히 한 개다. 하지만 에우클레이데스의 시대부터 (2)는 정리이며 따라서 다른 공리들로부터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18세기 지롤라미 사케리(Girolami Saccheri)(2)를 부정했을 때 모순이 발생함을 보여주려 했으나 실패했다. 카를 가우스는 (2)가 참이 아닌 기하학을 착상했고, 그와 독립적으로 헝가리의 수학자 야노시 보여이(Janos Bolyai)와 러시아 수학자 니콜라이 로바쳅스키(Nikolai Lobachevski)(2)와 모순되는 평행선 이론을 발전시켰다. 더 나아가 가우스의 제자 게오르크 리만(Georg Riemann)(1)(2)가 거짓이 되는 구면 기하학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는 어떠한 기하학도 논리적 필연으로서 참이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공간은 그 실재를 감지하게 한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는 공간에 대한 관계론과 절대론의 논의에 대해 어떤 함축을 갖는가? 관계론자는 기하학적 진술의 진위 여부가 실제 공간의 특성과는 무관하며 기하학 내적 논리만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을 통해 알려졌듯 추상적 세계만으로는 유일하게 옳은 기하학을 결정할 수 없다. 또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공간의 형태가 다양할 수 있음을 함축하므로, 물체는 힘을 받지 않고서도 서로에게 근접할 수 있고 힘을 받기 때문에 근접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는 물체들 사이의 관계만으로도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관계론자에 대한 반론이 된다.

 

   또한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든 유명한 예를 생각해보자. 어느 날 밤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크기가 두 배로 커졌다고 가정하자. 만약 공간이 유클리드적이라면 우주 내의 관찰자는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공간이 비유클리드적이라면 크기가 변할 때 관찰자는 해당 공간의 곡률 역시 더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면 위에서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삼각형의 크기가 클수록 180도와 더 큰 차이를 보인다. 요약하면, 공간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물체들의 행동양식을 해명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외톨이 손>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의 손을 통해 공간의 본질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우주에는 몸에 달려 있지 않은 인간의 손 단 하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손이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손의 내재적인 특성들로는 이를 파악할 수 없다. 오른손의 특성들을 왼손 역시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는 손과 공간 그 자체 간의 관계에 의해서 해당 손의 오른손 또는 왼손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 결론 내린다.

 

손잡이성으로부터의 논증

1. 왼손만 있는 우주와 오른손만 있는 우주 사이에는 객관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바, 문제의 손잡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2. 손잡이성은 공간적 속성이다.

3. 한 사물의 공간적 속성은 (a) 해당 사물과 다른 사물들 간의 관계, 혹은 (b) 해당 사물의 부분들 간의 관계, 혹은 (c) 해당 사물과 절대공간 간의 관계로 결정된다.

4. 이 두 개의 우주에서 손잡이성을 (a)로 해명할 수는 없는데, 그 까닭은 손 말고는 아무런 사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5. (b)로도 해명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관계들이 두 우주에 있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 (c)로 해명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7. 손잡이성은 절대우주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관계론자는 위 논증의 전제 1과 전제 5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전제 1의 경우, 철저한 고립 상태에서는 어떤 손이 손잡이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전제 5의 경우, 손잡이성은 단순히 손이 갖고 있는 거리, 각도 관계가 아니라 손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3차원 이상?>

 

   2차원 거울상 두 개는 3차원에서 볼 때 회전을 통해 정확히 포개진다. 마찬가지로, 3차원의 손 역시 4차원에서 볼 때 포개질 수 있을 것이다. 거울상으로서의 차이를 유지할 경우 키랄성을 유지한다고 하면, 2차원 거울상은 공간이 3차원일 경우 키랄성을 잃어버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간 자체가 어떤 차원을 갖는지에 따라 해당 특성이 키랄성을 유지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키랄성으로부터의 논증

1. 키랄적인 손 하나만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와 비키랄적인 손 하나만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사이에는 객관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2. 키랄성은 공간적 속성이다.

3. 한 사물의 공간적 속성은 (a) 해당 사물과 여타의 사물들 간의 관계, 혹은 (b) 해당 사물의 부분들 간의 관계, 혹은 (c) (b)와 절대공간의 어떤 특징의 결합 중 하나로 결정된다.

4. 앞서 말한 두 개의 우주에서 키랄성은 (a)로는 해명할 수 없는데, 손 말고는 아무런 사물도 없는 까닭이다.

5. (b)로도 해명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관계는 두 우주에 있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 이는 (c)로 해명되어야 한다(해당되는 공간의 특징은 예를 들어 그 차원성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7. 키랄성은 절대우주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해 관계론자는 공간의 차원성 역시 공간의 차원에 따른 물리 법칙의 변화 방식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력 법칙이 거리에 반비례하면 공간은 2차원이고 거리의 세제곱에 반비례하면 공간은 4차원이라는 식이다.

 

5: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

 

<창조의 모방, 아마겟돈의 조짐>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윌슨 산 천문대의 반사망원경을 통해 먼 은하에서 나오는 빛 스펙트럼이 붉은색 쪽으로 이동함을 밝혀냈다. 이는 은하들이 점점 멀어져 감을 뜻하며, 특히 허블은 은하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멀어지는 속도 역시 더 빠르다는 것을 밝혀냈다. 만약 이렇게 우주가 점점 팽창한다면, 그 이전에는 우주의 규모가 작았을 것이고 우주가 최초에 시작했던 시점도 존재할 것이다. 이를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프레드 호일(Fred Hoyle)빅뱅이라 불렀다. 우주는 점점 팽창하기만 할까 아니면 특정 시점에서는 중력으로 인해 다시 오그라들어 한 점으로 수축할까? 우주가 한 점으로 수축하는 경우 이를 빅크런치(Big Crunch)’라 부른다.

 

   그렇다면 우주의 시간과 끝이 시간 그 자체의 시작과 끝을 의미할까? 만약 빅크런치가 존재한다면 이는 빅뱅과 빅크런치가 반복될 수 있으며, 이는 시간의 존재가 우주와는 별개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논거의 한계>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시간의 시작과 끝을 반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변은 다음과 같다.

 

시간의 시작과 끝을 반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변

1. 모든 순간은 (언젠가는) 현재이다.

2.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경계이다.

그러므로(2로부터)

3. 시간에 최초의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현재일 수 없다- 시간의 시작에는 과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13으로부터)

4. 시간의 최초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제 2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이다. 전제 2는 이미 최초의 순간이 있었을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시작을 반대하는 논자들은 충족 이유율을 근거로 시간의 시작이 근거 없음을 주장한다. 시간의 시작에 선행하는 상태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으며, 만약 선행하는 상태가 없다면 시간의 시작의 존재를 해명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우주의 개별 상태들에 대해서는 그 이전의 상태가 해명할 수 있으나, 우주의 전체 상태에 대해서는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충족 이유율이 완벽하게 적용되지 않음을 주장한다.

 

<과거는 무한할 수 있는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순수이성의 이율배반부분에서 시간의 시작이 존재한다는 논증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 두 개를 병립시키고, 그 하나를 정립(thesis)’ 다른 하나는 반정립(antithesis)’이라 불렀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 사이에 모순이 발생함을 보여줌으로써, 이 논제들과 관련된 시간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경험에 부과하는 구조(직관의 형식)라고 주장했다. 칸트가 제시한 정립과 반정립 논제를 검토해보자.

 

미결성으로부터의 논증

1. 시간에 시작이 없었다면 이미 무한한 양의 시간이 경과했다.

2. 무한한 양의 시간이 경과했다면 무한한 계열이 완결되는 것은 가능하다.

3. 무한한 계열이 완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4. 무한한 양의 시간이 경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5. 시간에는 시작이 있었다.

 

   전제 3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5, -4, -3, -2, -1 과 같이 끝은 있으나 시작은 없는 무한한 계열이 존재한다. 끝이 있다는 것이 완결됨을 의미한다면, 완결될 수 있는 무한한 계열은 존재한다. 그러나 시간의 시작이 없다고 인정할 경우,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유한한 방식으로 인과적인 해명을 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거대한 원>

 

   시간이 거대한 원 위에서와 같이 순환한다고 가정하면 위에서 제시된 문제가 해결된다. 이 경우 과거는 유한하지만 최초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의 순환성에 대한 여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순환적 시간은 시간의 특징인 방향성과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는, 순환적 시간에는 국소적인 비대칭성이 있다고 답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최근의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 가까운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비대칭성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이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의 순환성을 받아들이면 동일한 사실이 무한하게 발생하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순환성을 통해 비록 유한한 방식으로 사태를 해명할 수 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어떠한 사건의 원인이 해당 사건 자신이라는 결론이 귀결된다. 일반적으로 인과성은 비대칭성, 추이성, 비반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순환적 시간을 가정하면 인과성은 이 세 속성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게 된다.

 

   우리가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든 상관없이 인과성과 관련된 난점에 봉착한다. , 인과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정들을 모두 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a) 모든 주어진 사건에 원인의 연쇄는 유한하다.

(b) 원인이 없는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c) 인과성은 비대칭적이고 비반사적이며 추이적이다.

 

   이는 다음을 시사한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불가피한 역설을 수반하며 따라서 칸트가 주장했듯 시간은 세계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투사라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시간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구조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인과성에 대한 우리의 전제 중 하나 이상을 수정해야만 한다.(140)

 

6: 공간의 가장자리

 

<가장자리에 있는 아르키타스>

 

   플라톤과 동시대 사람이자 친구였던 아르키타스(Archytas)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공간에 가장 바깥 한계, 즉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공간 그 자체조차도 없는 경계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아르키타스 본인은 부정적으로 답했다. 더 이상 손을 뻗을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물리적인 장벽이 존재함을 의미하며, 이 장벽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이 장벽 너머에도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물리적인 장벽은 두께가 없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만약 공간의 가장자리가 있다면, 가장자리에서 물체는 어떻게 운동할까? 아마도 물체는 뉴턴의 운동법칙을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법칙이 공간 모든 장소에서 적용된다는 입장을 포기하거나 공간의 가장자리가 있다는 개념을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우주 너머에 공간이 있을까>

 

   칸트는 세계가 시공간에 있어 무한함 및 무한하지 않음을 이율배반에서 논증했다. 무한함에 대한 논증에서 칸트는 공간 그 자체가 무한하며, 공간적 관계는 사물들 사이에서만 성립한다고 가정했다. 만약 공간이 무한하다고 가정하면 무한한 공간 속에 유한한 세계가 위치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없으므로 충족 이유율에 위배된다. 칸트는 세계의 무한함과 무한하지 않음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공간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했다.

 

<무한이라는 환상>

 

   칸트가 전제했던 공간의 무한성은 필연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푸앵카레가 제안한 우주를 살펴보자. 이 우주는 유한하지만 우주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사물들이 특정한 힘에 의해 수축한다고 하자. 그렇게 될 경우, 우주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결코 우주의 가장자리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이동하는 관찰자는 실제로 이 우주가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무한히 큰 것으로 여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계는 경계가 없으면서도 유한하게 닫혀 있을 수 있다. 2차원 구면이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이다. , 공간의 한 점에서 광선을 멀리 쏘아 보냈더라고 하더라도 아주 먼 훗날 그 광선이 반대편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7: 무한과 역설

 

<제논 : 어떻게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를 이기는가>

 

   엘레아의 제논이 제시한 역설은 다음과 같다. 달리기 경기에서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앞서서 출발할 경우,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출발 위치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시간 동안 거북이는 조금 더 멀리 움직였을 것이며, 거북이가 움직인 거리만큼 다시 아킬레우스는 쫓아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이러한 역설은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게 분할 가능하다고 전제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논에 대한 두 가지 대응 : 무한소와 유한론>

 

   제논의 역설에 대해, 단지 제논이 무한소의 개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역설에 부딪쳤다고 대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0+10+1+1/10+1/100+...는 제논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한대가 아니라 111 1/9이라는 유한값을 갖는다. 하지만 제논의 역설은 단지 수학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적 무한 개념을 도입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단계적으로 분할 가능하며 매 단계마다 추가로 분할 가능한 것이지 처음부터 무한개로 분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잠재적 무한 개념을 도입한다고 해도, 여전히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톰슨의 등>

 

   미국 철학자인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은 제논의 역설과 비슷한 실험 상황을 제시했다. 전등이 켜진 후 1분이 지나 꺼진다. 다음 30초 동안 전등은 꺼져 있다가 다시 15초 동안 켜진다. 다음 7.5초 동안 꺼져 있다가 3.75초 동안 켜진다.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을 때, 과연 2분이 지난 다음에는 (a) 전등이 몇 번이나 꺼졌다가 켜졌으며 (b) 지금 전등은 켜져 있을까 꺼져 있을까? 과연 등은 무한번 꺼졌다가 켜졌고, 전등은 켜져 있는 것도 아니고 꺼져 있는 것도 아닌 것일까?

 

   위와 같은 절차는 물리적으로 실현하기 불가능한 것이라고 대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적 무한 역시 사고 속에서 가능한 잠재적 무한과 물리적으로도 가능한 잠재적 무한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인가? 다른 대안으로, 톰슨의 등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필연성 또는 불가능성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면 이와 같은 답변이 불충분하다.

 

<전이에 대한 어떤 난문>

 

   어떻게 사물은 정지한 상태에서 운동한 상태로 바뀌게 될까? 정지의 마지막 순간과 운동의 최초 순간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약 시간이 조밀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임의의 두 순간 사이에도 제3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정지와 운동 사이의 순간은 정지에 속하나 운동에 속하나? 어디에 속한다고 가정해도 모순이 발생한다. 정지에 속하면 정지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전제와, 운동에 속하면 운동의 최초 순간이라는 전제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운동의 순간을 논하지 말고 물체가 점유하는 위치에 주목해 보자. 이 경우 정지의 마지막 순간은 파악 가능할 수 있지만, 기존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움직였을 때의 시간은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시간은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화는 기존의 전제와는 달리 불연속적이며 시간과 공간 역시도 그러한가? 아니면 변화는 연속적이지만 중간에 그 상태가 불확정적인(indeterminate) 경우가 존재하는 것일까?

 

<데모크리토스의 원뿔>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 역시 가분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역설을 제시하였다. 하나의 원뿔을 아랫부분과 윗부분으로 나누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랫부분의 절단면과 윗부분의 절단면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만약 같다면 잘려진 것은 원뿔이 아니라 원기둥이다.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원뿔은 겉보기에는 매끄러워 보여도 실제로는 계단식 원뿔일 것이다. 이 역설 역시 물질세계의 연속성이라는 전제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공간과 시간의 원자>

 

   앞서 제시된 모든 역설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이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공간에서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성립하지 않게 되며, 이는 공간이 유클리드적인 성격을 띠지 않음을 의미한다.

 

8: 시간은 흐르는가

 

<경과의 신비>

 

   시간이 공간과 구분되는 두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흐른다. 둘째, 현재라는 것은 유일무이하다. 시간을 시간답게 만드는 것은 시간의 경과이다. 시간에서 시간의 경과가 빠질 수는 없다. 시간의 경과는 연속적인 시각과 사건을 지나가는 현재의 운동이다.

 

<시간의 비실재성에 대한 맥태거트의 증명>

 

   영국의 철학자 맥태거트(John McTaggart)가 제시한 시간의 비실재성 논증을 살펴보자. 그는 우리가 시간상에서 사건들을 배열하는 두 가지 방식인 A-계열과 B-계열을 구분한다. A-계열은 먼 과거, 가까운 과거, 현재, 가까운 미래를 구분하지만 이 구분 각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먼 과거에 있던 사건이 점점 과거, 현재, 가까운 미래로 이동한다. 하지만 B-계열에서는 A-계열에서와는 달리 사건들의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 한번 과거에 있었던 사건은 계속 과거로 남는다. 맥태거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시간의 비실재성에 대한 맥태거트의 증명

1. 시간이 실재한다면 어떤 A-계열이 존재한다(A-계열은 가장 기본적인 종류의 시간계열이므로).

2. A-계열 상의 상이한 위치들은 서로 양립 불가하므로 어떠한 사건도 둘 이상의 A-계열 상 위치를 보일 수는 없다.

3. 어떤 A-계열이 존재한다면 사건들의 A-계열 상의 위치는 변화하므로, 모든 사건들은 A-계열 상의 모든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4. A-계열이 존재한다면 어떠한 사건이든 단 한 개의 A-계열 상 위치를 차지함과 아울러 모든 A-계열 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다.

그러므로

5. A-계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6.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

 

   위 논증에서 전제 2와 전제 3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다. 전제 2는 어떠한 사건도 둘 이상의 위치를 동시에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제 3은 어떤 사건이라도 순차적으로’ A 계열의 모든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 4에서 맥태거트는 전제 2와 전제 3을 잘못 해석했다. 전제 2와 전제 3을 받아들이더라도 모순을 충분히 회피할 수 있다. 특히 전제 3에서 사건들은 상이한 A-계열 위치들을 상이한 A-계열 시점에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인 아주머니가 196249일 월요일에 방문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제인 아주머니의 방문은 : 먼 과거에는 먼 미래에 속한다.

가까운 과거에는 가까운 미래에 속한다.

현재에는 현재에 속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가까운 과거에 속한다.

먼 미래에는 먼 과거에 속한다.

 

   위는 현재 기준이지만, 과거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거 기준의 표현 또한 살펴보자.

제인 아주머니의 방문은 : 먼 과거에는 먼 미래에 속한다.

현재에는 가까운 미래에 속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현재에 속한다.

그다지 가깝지 않은 미래에는 최근의 가까운 과거에 속한다.

먼 미래에는 먼 과거에 속한다.

 

   과거 기준의 위 표현은 일관성이 있지만 현재 기준의 표현과는 모순된다는 문제가 있다. 과연 현재 기준 표현과 과거 기준 표현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응답 : 현재주의>

 

   첫 번째 응답은 과거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과거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재성을 현재의 순간에 제한하는 이러한 조처를 현재주의(presentism)라 한다. 하지만 현재주의를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첫째, 과거 혹은 미래가 실재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둘째, 과거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과거와 관련된 언명, 신념 혹은 기억이 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의문에 대해 현재주의자는 과거에 대한 진술을 참으로 만드는 것이 현재의 사실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사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과거의 사실들이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현재는 과거를 충분히 결정하지 못한다(underdetermine)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현재주의자는 과거와 현재를 대응시켜 줄 수 있는 인과적 기제 및 과거가 현재에 인과적 흔적을 남기기를 요구하게 된다.

 

<두 번째 응답 : B->

 

   두 번째 대응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B-계열뿐이고 사건들은 B-계열 상의 위치들만을 가지며 B-계열 사실들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입장을 통해 맥태거트의 모순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사건들은 조건 없는 과거, 현재, 혹은 미래가 아니라 B-계열의 용어로 명시할 수 있는 어떤 시점과 관련해서 과거나 현재, 미래이다.

 

   B-론을 취한다고 했을 경우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 첫째, B-우주에서 A-계열 진술들의 진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둘째, B-우주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지만 시간이 경과하는 데는 A-계열이 필요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셋째, B-우주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의 현재만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모든 실재하는 것은 지금 존재한다. 과거가 실재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지금이란 실재의 선두에 있는 가장자리이며, 생성되는 역사의 마지막 지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 혹은 현재 순간이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가 무엇인가?

 

9: 영화 같은 우주

 

<머이브리지의 말과 제논의 화살>

 

   사진이 발명된 후 미국의 사진가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는 사진을 활용하여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했다. 이 연구를 통해 질주하는 말의 네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사진술은 움직임을 일련의 스틸사진들로 변형했다. 이는 움직임이 일련의 정지 상태들로 구성된다는 제논의 주장과도 비슷하다. 사진과 제논의 역설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는 다른 운동의 개념을 제시하며, 운동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우리의 마음의 산물임을 깨닫게 한다.

 

<순간에는 운동이 없다?>

 

화살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논증 1

1. 화살이 비행 기간 내내 움직인다면, 그러한 기간의 각 순간마다 움직인다.

2. 화살은 각각의 순간마다 자신의 부피에 상당하는 공간을 점유한다.

3. 화살이 한 순간에 자신의 부피에 상당하는 공간을 점유한다면 화살은 그 순간에 움직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23으로부터)

4. 화살은 그러한 기간의 어느 순간에도 움직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14로부터)

5. 화살은 비행 기간 내내 움직이지 않는다.

 

   이 논증의 전제 1에 대해, 사실 운동이란 각 순간에 특정한 위치에 대한 점유만이 있을 뿐 각 순간의 움직임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반박은 가속의 개념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난점을 갖는다. ‘가속을 받아들이면 물체가 순간마다 서로 다른 속도를 갖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전제 3에 대해, 물체가 한 순간에 공간을 점유한다고 해도 반드시 물체가 그 순간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잇따르는 순간들 사이에서 물체의 위치가 바뀔 경우에는 각 순간에서 물체가 운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물체의 운동은 물체의 위치에 관해서 파생적인(derivative) 성격을 갖게 된다.

 

운동에 대한 정적 설명

사물은 어떠한 기간의 모든 순간에 있어 상이한 위치를 점유하는 경우에,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만 그 기간 내내 운동하는 것이다. 사물은 어떤 순간의 직전과 직후의 순간들에 상이한 위치를 점유하는 경우에,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만 그 순간에 운동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운동이 없다?>

 

화살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논증 2

1. 화살이 비행 기간 내내 움직인다면, 화살은 움직이는 경우 현재 중에 움직인다.

2. 화살은 현재 중에는 움직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3. 화살은 비행 기간 내내 움직이지 않는다.

 

<제논과 현재주의자>

 

운동에 대한 동적 설명

한 시점에서의 사물의 운동은 여타 시점에서의 사물의 위치와는 무관하다.

 

   위 논증에서 핵심은 전제 2이며 이는 현재 중에서의 운동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현재주의자의 입장에서 운동을 긍정하는 방법이 있을까? 아마 다음과 같은 운동에 대한 동적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주의는 변화를 용인하는 사건들을 기본적인 실체로 간주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건들은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증이 가능해진다.

 

화살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논증 3

1. 운동이 가능하다면 정적 설명이나 동적 설명 중 하나는 그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다.

2. 현재주의가 참이라면 운동에 대한 정적 설명은 거짓이다.

3. 현재주의가 참이라면 운동에 대한 동적 설명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4. 현재주의가 참이라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현재만이 실재적일 수 있고, 시간이 변화에 지나지 않으며, 변화가 현재 중에 발생할 수 없다면, 시간 그 자체가 비실재적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10: 역사에 대한 간섭

 

<잃어버린 날들>

 

   표준 달력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변경되면서, 1752년의 93일부터 13일까지는 삭제되었다. 물론 역법이나 시계를 바꾼다고 시간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시간에 간섭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과거의 변경 가능성>

 

   과거의 변경 가능성에 대한 반론은, 과거를 변경할 경우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젯밤 도박에서 돈을 잃은 것을 후회하여 과거를 변경한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나는 돈을 잃지 않게 되고, 돈을 잃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이 공존하게 되기 때문에 모순이다.

 

   B-론자의 입장에서 과거의 변경 가능성을 살펴보자. B-우주에서 과거에 대한 진술은 명확한 진리치를 갖는다. 이는 미래에 대한 진술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과거를 변경시킬 수 없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과거의 사물이 변경될 수는 있겠으나 과거의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주의자의 관점에서는 과거의 변경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는가? 현재주의자는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근거로 과거의 실재성을 추정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 현재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들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과거까지도 변경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시간여행사의 딜레마>

 

   우선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를 따라 시간여행사의 시간과 그가 여행하고 있는 세계의 시간을 구분해 보자. 개인시간(personal time)이란 시간여행사와 그의 바로 근접한 주변에서 진행되는 한 묶음의 변화이다. 외부시간(external time)이란 시간 그 자체로서, 타임머신 바깥의 변화로 기록된다. 시간여행이란 외부시간에서 볼 때 시간여행사와 타임머신의 역사가 중단된 것이다. 이 때 개인시간은 연속적으로 흘러간다. 시간여행은 전진할 수도 있고 역행할 수도 있다. 만약 역행이 가능하다면, 과거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현재주의는 옳을 수 없다. 시간여행은 과거나 미래로 이동하는 것인데, 과거나 미래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해도, 명확한 진위를 갖는 과거의 사실들을 변경할 수는 없다. 변경할 경우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바꾸는 것사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구분될 수 있다. 이렇게 구분하면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꾸지는 못해도 과거 사실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거꾸로 된 인과관계>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현재가 과거에 인과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행위가 과거를 확정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실들은 이미 그 진위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의 행위는 미래의 사건들을 확정적으로 만드는 데 인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역인과관계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에 반대되는 순인과관계를 우리는 더 선호할 것이다.

 

11: 다양한 시간과 공간들

 

<확률과 다중우주>

 

   다중우주 가설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수많은 우주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각각의 우주들은 서로 다른 물리적 조건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 수많은 우주들은 더 큰 대우주 속의 소우주들일까? 이 소우주들은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각각 서로 다른 물리적 법칙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우주들 사이에는 일종의 상호작용이 있을 것인데, 과연 이 상호작용은 어떠한 것일까? 다중우주를 가정하면 위와 같은 여러 문제들이 제기된다.

 

<분기하는 공간>

 

   영국의 물리학자 토머스 영(Thomas Young)은 빛을 이중 틈새에 쏘았을 때 간섭무늬가 형성됨을 보였다. 이는 빛이 파동의 성질을 갖고 있음을 뜻했다.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빛이 에너지 알갱이라는 입자 가설을 주장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이중 틈새에 단 하나의 광자를 쏘아도 간섭무늬가 형성되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과연 빛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보자. 광자가 이중 틈새에 다가가면서 공간들은 여러 개로 분기하고 공간 속 실험 도구들도 똑같이 복제된다. 이 여러 개의 공간들 속에서 광자는 위쪽 틈새를 통과하기도 하고 아래쪽 틈새를 통과하기도 한다. 광자가 틈새를 통과한 이후에는 분기되었던 공간들이 다시 합쳐진다. 과연 이러한 제안은 유지될 수 있을까?

 

<반론과 결론>

 

   칸트는 한 가지 종류의 공간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시공간이 인간의 직관 형식이라는 칸트의 철학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굳이 칸트의 반론을 수용할 필요는 없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증거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공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다른 종류의 공간들이 최종적으로는 서로 합쳐진다면, 직접적인 방식은 아닐지라도 지금의 공간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복수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시간 역시 복수가 되고 시간의 유일성이 부정되는 것인가? B-계열을 옹호하는 입장의 경우, B-계열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관찰자와 무관한 시간 계열이 존재하며 이는 시간의 유일성을 지지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A-계열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A-계열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항상 특정한 시간 계열에 속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어떤 우주에 속해 있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가 속한 시간 계열에서 현재가 유일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공간들이 하나의 공간으로 결합하는 경우에는 난점이 발생한다. a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 a’b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 b’의 경우, 만약 B-계열에서 볼 때 a’b’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A-계열에서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A-계열이 B-계열보다 더 기본적이라는 입장에 대한 문제가 된다.

 

12: 시간의 화살들

 

<숨겨진 이정표>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과정들이 거꾸로 진행할 수 있을까? 이러한 착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객관주의적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본다면,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르는 가운데 자연 과정만 거꾸로 진행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간과 달리 시간에는 그 자체에 일종의 방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에서 ‘~보다 이르다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위치를 나타낸다.

 

<세 개의 화살, 그리고 사물들이 부서지는 이유>

 

   또한 물리적 과정들 속에서도 시간적 비대칭성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열역학적 화살이 있다. 이는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방향을 뜻한다. 둘째, 심리학적 화살이 있다. 이는 사건들에 대한 지각에서 그러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으로의 방향을 뜻한다. 셋째, 인과적 화살이 있다. 이는 원인에서 결과로의 방향을 뜻한다. 이 각각의 경우에 물리적 과정들의 방향은 시간의 방향과 합치한다.

 

   이제 첫째 화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화살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엔트로피란 계 안의 열에너지가 질서를 갖게 되어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정도이며, 엔트로피가 클수록 에너지의 이용 가능성은 적어진다. , 점차적으로 타 에너지로의 변환 정도가 줄어든다. 이러한 엔트로피 증가는 확률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할 수 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할 확률이 그 반대의 확률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확률이 완전한 0이 아니기 때문에, 확률론적 사고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둘째 화살과 셋째 화살을 첫째 화살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둘째 화살의 경우, 기억한다는 것은 지각 정보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는 국소적으로 첫째 화살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첫째 화살은 국소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이며, 국소적으로는 엔트로피가 줄어들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셋째 화살의 경우,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위해서는 이를 촉발시키는 일종의 원인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인과 관계의 화살과 열역학적 화살의 일치를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의 과거>

 

   이제 둘째 화살에 대해서 살펴보자. 시간 순서를 다음과 같이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일정한 개인에 대해 해당 개인이 경험 e를 하고 그러한 경험에 대한 기억 m을 지니고 있되 다음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만 AB보다 이르다. (i) Ae와 동시에 발생하고 Bm과 동시에 발생하거나... (331) 하지만 심리학적 화살이 열역학적 화살이나 인과적 화살보다 더 기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열역학적 화살이나 인과적 화살이 심리학적 화살처럼 개별적인 마음에 상대적이라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간의 씨앗>

 

   이제 셋째 화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과 작용이 에너지의 전이를 수반하고, 이 전이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 셋째 화살은 첫째 화살보다 더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경험은 기억의 원인이기 때문에 경험이 기억에 선행한다고 보면 셋째 화살은 둘째 화살보다도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과적으로 관련이 없는 두 사건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이러한 사건들이 존재한다면, 이 사건들 사이에서 시간 순서를 결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 수 있다. AB의 원인에 속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에,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만 AB보다 이르다.(시간순서에 대한 양상적인 인과적 분석) 하지만 이와 같이 가능성을 도입하게 되면 넓은 의미에서(논리적 가능성) AB의 원인이 될 수 있고 B 또한 A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평행 원인>

 

   둘째 물음에 답변해보자. 다음과 같이 시간 순서를 확장하여 인과적으로 분석하면, 인과적으로 관련이 없는 두 사건들에도 시간 순서를 매길 수 있다. AB의 원인들 중 하나와 동시적인 경우에,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만 AB보다 이르다.

 

<시간순서는 국소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가>

 

   하지만 시간 순서를 확장하여 동시성의 개념을 도입하면 다음과 같은 난점이 발생한다. DA의 원인이다. CB의 원인이다. DB는 동시적이고, CA는 동시적이다. 이 경우 DA의 원인이고 DB와 동시적이므로 BA보다 이르지만, CB의 원인이고 CA는 동시적이므로 AB보다 이르다. , 동시성을 도입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소 극단적인 제안이다.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사이에 있음규칙을 도입할 수 있다. , B가 인과적으로 AC 사이에 있다면 (예를 들어 A의 결과이자 C의 원인리라면) B는 시간적으로도 AC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작위적인 처방이다. 따라서 인과의 화살을 기본으로 둔다면 시간순서는 단지 국소적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인은 그 결과와 동시적인가>

 

인과관계의 동시성 논증

1. 원인은 그 결과를 결정한다. 즉 원인이 발생하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원인과 결과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면 원인은 그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간격에 무엇인가가 개입하여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그러므로

4. 원인은 그 결과와 동시에 발생한다.

 

   위 논증의 전제 2에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결과가 원인의 직후에 발생한다면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방향지어지지 않은 세계에서의 방향의 의미>

 

   인과론은 순서만을 얘기할 뿐 방향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방향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하지만 순서와 방향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가? 단지 인과관계의 논리적인 비대칭성을 통해 시간의 순서가 결정되고, 방향성은 순서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원래는 순서 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 순서를 경험함으로써 방향성이 감지된다.

 

맺는 생각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마음 밖에 존재한다면 독자적인 물체인가, 아니면 사물들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들의 모임인가? 그 특징은 무엇이고, 그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으로 해명되는가? 다른 특징을 가질 수도 있었을까? 예를 들어 무한한가, 아니면 유한할 뿐인가? 유한하다면 한계가 존재할까?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을까, 아니면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시간은 어떻게 공간과 다른가? 시간은 실제로 경과할까? 미래는 실재할까? 그리고 시간의 방향은 무엇으로 해명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공간적, 시간적 행위자로 생각한다. 만약 공간과 시간이 세계의 실재적인 특징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밝혀진다면,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 생각하는가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이런 어렵고 추상적인 문제들을 숙고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견해를 넓혀준다.

 

4차원 여행(20150723).pdf
0.2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