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숙제하는 시간

강형구 2016. 2. 6. 22:42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날 때마다 선생님들께서 숙제를 몇 장씩 나눠주셨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독서실에서 숙제를 하거나, 독서실에서 다 하지 못하면 집에 가지고 와서 숙제를 했다. 나는 숙제하는 시간이 좋았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글을 쓰거나 문제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제를 잘 해서 점수를 높게 받으면 기분이 좋았지만, 점수를 잘 받으려고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용히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물론 친구들과의 경쟁이 약간의 자극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의 생각이 자라나가는 것을 직접 느끼는 즐거움이 더 컸다.

  

   나 스스로가 이런 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나는 굳이 나의 아이들을 시내의 좋은 동네에서 공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공부를 잘 하고 똑똑한 아이들 틈에 있으면 자극을 받아 공부를 열심히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보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가 하루 종일 학원을 전전하며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요령을 익히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한가로운 도시의 외곽에서 살아가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며, 지금보다 돈이 더 많아진다고 해도 굳이 도시 안으로 사는 곳을 이동하고 싶지는 않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숙제 비슷한 것들은 계속되었다. 학점을 얻기 위해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고, 시험을 보아야 했다. 그렇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전보다는 퍽 한가로워져서, 나는 남는 시간에 조금씩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주는 법을 배웠다. 스스로에게 책 읽는 숙제를 내는 것이 가장 쉬웠다. 시험을 보거나 과제를 낼 필요 없이 그냥 시간을 투자해서 책만 읽으면 되었다. 그러다보니 뭔가 허전해져서, 자연스럽게 책을 읽다가 중간에 밑줄도 긋고 좋은 구절이 있으면 공책에 베껴 적었다. 책을 읽다가 나의 생각이 두서없이 떠오르면 책을 읽다가 말고 공책에 나의 생각을 적어보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자라났다.

  

   대학원에서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학부시절에는 한글로 된 글들을 많이 읽었던 반면, 대학원에 들어가니 한글은 거의 읽지 않고 대부분 영어로 된 글들을 읽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원 시절에서 내가 받은 훈련은 영어로 된 글들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한 다음 나의 말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몇몇 뛰어난 선배들은 영어로 된 글들을 읽고 영어로 정리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대학원에서 교수님들께서는 토론과 논쟁의 기법들도 가르쳐주시려 노력하셨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러한 기법들을 잘 배우지는 못했다. 영어로 된 글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학문적인 시야가 매우 넓어졌다. 생각이 교류하고 뻗어나갈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예전에 홀로 숙제를 하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직도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숙제를 하는 게 좋다. 물론 이제 서른이 넘은 나에게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은 없다. 대신 내가 나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어준다. 읽고 싶은 글들을 읽고 정리하는 일, 좋은 글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 등이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숙제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이런 숙제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글을 정리하고, 내가 공부하고 싶은 글을 우리말로 옮긴다. 나는 나의 아이가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홀로 숙제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즐기고, 더 나아가 어른이 되어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고 그 숙제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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