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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고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내일 당장 불의의 사고로 나 또는 내 주변의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전방 터널에서 사고가 나서 차량 정체가 시작된 후, 갑자기 앞에서 달려가던 차가 속도를 늦췄고 그에 따라 나도 속도를 늦추려고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마침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정지하지 못하고 내 차의 뒤를 받은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일 없이 곧장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충돌 직후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몸이 아프다는 것을 느낄 겨를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이후 계속 운전하다 보니 머리가 아팠고 허리에서도 뻐근함이 느껴졌다.    이번에 다..

일상 이야기 2024.05.16

모르는 게 약

너무 많이 알면 머리가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참으로 모르는 게 약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의도적으로 주식 투자에 손을 대지 않는다. 사실 의지만 있다면 주식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러한 정보를 수용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멍청한 머리로 주식 투자를 해서 이익을 낼 자신이 없고, 괜히 투자했다가 열에 아홉은 손해를 볼 것이 거의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어떤 일을 잘 못한다면, 어설프게 그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못한다고 밝히고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나에게는 일종의 도피처다. 책이나 논문을 펼치면 머리 아픈 일들에서 벗어나 나만의 생각 세계로 들..

일상 이야기 2024.05.12

통계물리학과 확률(1/3)

고대 그리스인 중 물, 불, 공기, 흙, 에테르 등과 같은 5가지 종류의 물질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분류가 매우 거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암석들이 있고 이들을 잘게 쪼개면 작은 알갱이들이 남는다. 작은 알갱이들은 물에 녹일 수 있으므로 액체가 될 수 있으며, 가연성 물질은 태우면 연기가 되어 대기 속으로 동화된다. 천상의 물체인 에테르는 몰라도,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 원소 사이에는 변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들은 실제로 원소라고 말할 수 없다. 이들보다 더 다양하고 기초적인 원소가 존재해, 이들이 결합하여 물, 불, 공기, 흙을 만들 것이다. 기체, 액체, 고체는 원소가 아니라 물질의 상태..

교수-되기

나는 아직 내가 교수라는 사실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이 교수가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교수라는 사실은 너무나 우연히 혹은 운 좋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지면서도, 이렇게 우연한 일이 일어나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게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사실 나는 매우 진지하고 성실한 유형의 사람이긴 하며, 사람의 유형만 보면 나는 철학 교수로서 매우 적합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근에 발급받은 공무원증(교육부)을 늘 소지하고 다닌다. 그리고 나의 공무원증을 볼 때마다 괜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내가 교육 공무원 교수가 되다니! 나의 공식적인 신분은 교수로 이미 확정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교수-되기’의 과정에 머물러 있..

일상 이야기 2024.05.05

상대성이론과 시공간(3/3)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 우선 아인슈타인 자신의 관점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뉴턴의 『프린키피아』(1687년)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다양한 전자기적 현상을 체계화한 전자기학이 발전하면서 질점이 아닌 ‘장(field)’이 물리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전자기적 현상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인 맥스웰 방정식이 상대적으로 등속 운동하는 두 기준계에서 다른 꼴로 표현된다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거듭 확인되었고, 아인슈타인의 1905년 특수 상대론은 ‘갈릴레이 변환’이 아닌 ‘로렌츠 변환’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바로 잡은 이론이었다. 비록 이후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1915년의 일반 상대론은 이와 같은 상대성 원리를 등속 운동이 아닌 가속 운..

삶에 충실하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나는 문득 이 세상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일들을 이미 거의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일은 내 삶을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리고 내 삶의 궁극적인 지향은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열심히 연구하며 사는 것일 뿐이다. 오직 그것 밖에는 없다.    당연히 나에게는 가족이 중요하지만, 이미 가족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우리 집은 다섯 식구가 지내기 넉넉할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고, 대출금도 퍽 많이 갚아서 3, 4년 정도 지나면 빚을 모두 청산하게 된다. 아내는 직장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있고, 아이들도 이제 제법 커서 조만간 나의 도움 없이도 매일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연구..

일상 이야기 2024.04.28

상대성이론과 시공간(2/3)

라이헨바흐는 최종적으로는 에를랑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사실 그는 처음에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공학을 공부했었고, 대학 입학 직전까지도 그의 장래 희망은 ‘기술자’였다. 교수자격 취득논문 제출 이후 그가 1920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은 슈투트가르트 공대였다. 그곳에서 그는 공학, 수학, 물리학, 철학과 같은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면서, 학술적으로는 상대성이론 속 시간과 공간에 초점을 맞춰 이에 대한 상세한 ‘철학적 분석’을 진행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분석 작업이 1928년까지 이어졌고, 그 결실이 『시간과 공간의 철학(Philosophie der Raum-Zeit Lehre)』으로 맺어졌다.    1920년에서 1924년 사이에 라이헨바흐는 ‘상대론의 철학자’로 부..

블로그 글쓰기 12년

내가 이 블로그에 처음 쓴 글의 날짜는 2012년 10월 27일이다. 오늘이 2024년 4월 20일이니, 블로그를 시작한 후 꽉 채우지는 않았으나 대략 12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셈이다. 그 첫 번째 글에서도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고 있다. “조용히, 조용히, 무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평범하면서 만족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삶을 바라보는 나의 이와 같은 입장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한다. 하지만 사람이 마냥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에게도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했고,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한국장학재단, 국립대구과학관을 거쳐 ..

일상 이야기 2024.04.20

상대성이론과 시공간(1/3)

라이헨바흐는 1915년에 에를랑겐 대학에서 수학 교수와 철학 교수의 공동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는 “물리적 실재를 수학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어 확률 개념이 하는 역할”이었다. 라이헨바흐는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칸트가 말했던 ‘선험적 종합 원리’(예를 들면, 시간, 공간, 인과성의 원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확률의 원리가 물리적 지식의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칸트 철학의 형식을 빌려 제시한 것이다. 박사 학위 취득 직후 그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 참전했다. 그는 통신부대에서 일했는데, 아마 뛰어난 공학적 계산 및 추론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병에 걸려 도중에 전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통..

상황과 스타일에 맞게 사는 것

나에게는 나의 인간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다. 나는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벌여서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용히 차분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다. 부산에서 살 때도, 서울에서 살 때도,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를 할 때도,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았고 그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 군대, 직장 등은 내가 사회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 모든 사회적 조직에서 나는 평균적인 수준으로 일했으며 남들의 눈에 띄게 특출한 역량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내가 공부 혹은 연구에서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은 내 삶의 이력을 보면 잘 드러난다. 부산과학고..

일상 이야기 2024.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