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하는 사람은 전장에 있는 사람이다. 전사로서의 철학자. 나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할 때마다 강인하고 두려움 없는 군인을 떠올린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여러 전투를 치러내며 죽음의 위기를 이겨낸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기도 하고 좋은 군인이기도 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는 좋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철학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오늘날 존재하는 대학, 연구소 혹은 다른 겉보기에 평화적인 기관과 제도는, 철학자에게는 끊임없이 치러나가는 일련의 전투 속 일시적인 휴식처일 뿐이다. 그 허상을 즐기되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는 않는다.
너무 당연하게도, 철학자가 굳이 전사로 살아갈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이미 일어났던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도 된다. 아니면, 이미 몇 번의 전투를 치렀으므로, 앞으로는 전투 없이 평온하게 살아가고자 애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비유를 들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철학자는 단기 복무 자원이 아니라 직업 군인 같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전쟁과 전투는 살아가기 위한 숙명과도 같다. 직업 군인은, 특히 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늙어서 혹은 병으로 죽는 것보다 전장에서 죽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다. 그런 죽음이야말로 그에게 일종의 불멸의 길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전장에서 죽었다. 물론 그 죽음이 미화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늘 철학자가 생존의 위협에 시달린다는 것, 철학자가 자신에게 생존의 위협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안일한 착각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는 일종의 야생동물이다. 그중에서는 사자, 호랑이, 곰과 같은 맹수도 있겠지만,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하면서도 능히 야생에서 잘 살아남는 야생동물도 있다. 나는 내가 맹수는 아니지만 체력이 제법 좋고 생존력이 강한 작은 야생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야생동물은 자신이 야생동물임을 잊을 때 몸이 느려지고 공격을 당할 위험이 커진다.
싸움은 모든 철학자에게 새롭다. 생존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희한한 풍경을 본다. 철학자는 싸울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싸웠는지 혹은 어떻게 싸우는지를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게 아니다. 내게 매우 역설적이고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정작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철학의 싸움을 하지 못하는 것같이 보인다는 거다. 이는 자신이 싸움의 대가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싸워보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사람과도 같다.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사람이 싸움을 이야기하고 가르치며, 그렇게 훈련된 제자 역시 싸우지 못하지만 싸움을 이야기하고 가르칠 수는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철학자가 제대로 싸우려면 철학이 스스로 만든 일종의 가상 공간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가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철학을 하기 전에 전쟁을 비롯한 산전수전을 겪었던 것,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그리스에 돌아와 학교를 세우기 전에 오래도록 동방을 여행하며 세상을 경험했던 일은 늘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철학자는 친숙하고 편한 공간, 그렇기에 자신을 기만하고 안주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각을 통해 무엇인가 거창한 이론 혹은 개념 체계를 만드는 것이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 그 자체이며, 이 과정은 철학자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인간에게 같은 식으로 반복된다.
야생동물은 자기 새끼를 야생동물로 키운다. 야생동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싸우며 살다가 죽는다.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철학자는 자기 제자를 야생동물 키우듯 키울 필요가 있다. 제자가 그럴듯한 철학 이론에 심취하게 할 것이 아니라, 철학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싸워 나가며 살아갈 힘을 키워줘야 한다. 철학의 사유는 늘 전장 속에 있다. 낯설고 기이한 세계 속에서 싸워 나가며 그 의미를 찾으려 않는 철학은 노쇠하고 타락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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