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욕심 없이 커피 한 잔

강형구 2025. 2. 12. 10:02

   나는 아침에 바쁜 일들을 마친 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직장을 다닐 때도 그랬고, 대학 교수가 된 지금도 그렇다. 나는 이렇게 아무런 의무 없이 편하게 숨 쉬며 생각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모든 인간은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이 퇴직한 이후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열심히 일하던 시절에 모은 돈을 다 쓰지 않고 저축하여 퇴직 후 쓸 수 있게 설계해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먼 훗날 공식적으로 퇴직한 이후에도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할 것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은 매일 근처 도서관에 나가 작업을 하지 않을까. 글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 그러나 퇴직 후에도 나는 마음속으로 일과 휴식을 분리하지 않을까 한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여전히 때때로 내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느꼈던 감정을 느낀다. 과학고등학교 독서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열심히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나는 수업과는 관련 없는 책을 읽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학교에서 나왔을 때, 나는 부산 시립 부전도서관 열람실에서 어른들 틈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대학교에서도 비슷했다. 나는 서가들이 늘어서 있는 자료실 모서리의 책상 하나를 잡고 앉아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읽으며 고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는 책을 읽는다는 표면적 행위를 하고 있긴 했지만, 그 행위는 그저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하나의 의례적 행위였다. 그렇게 앉아 책장을 보고 있으면, 고요함 속에서 나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 속에 내가 존재함을 생생히 관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이 세상이 마련한 공식적인 일들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는 게 내 일이었고, 군대에서는 복무하는 게 내 일이었다. 나는 작업하는 게 좋았다. 실질적 성과가 있고, 현실적 삶을 유지하며,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메모하거나 문제를 풀면 교과서와 문제집이 부드러워지고 닳았고, 나는 그 부드러워짐과 닳음이 내가 학생으로서 나의 의무를 다했음을 현상적으로 보여줘서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이것은 내게는 눈이 왔을 때 눈을 치우면 도로가 말끔해지고, 식사를 한 후 설거지하면 그릇들이 깨끗해지는 것과 비슷했다. 공공기관에서 일을 할 때는 연간 사업계획을 세운 후 1년 동안 그 계획에 맞게 국가가 마련해 준 예산을 써야 했다. 이런 공식적인 일들을 하면서 나는 내가 우리 사회 속에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세상이 내게 부여한 일들을 공식화시키면 나의 ‘의무’가 분명해졌고, 나의 ‘의무’가 분명해지면 그 ‘의무’를 수행한 후에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분명해졌다. 그리고 내가 행복함을 느끼는 자유란 카페에서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는 것, 근처에 있는 공원을 걸으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것이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그냥 지금껏 살아보니 그랬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부터 주변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학에서도, 군대에서도, 대학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런데 나 자신이 주변적인 존재라는 이런 느낌은 사실 내게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뭔가 좀 홀가분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 또한 나의 운명일지 몰랐다.

 

   좀 크고 넓게 보면, 20세기 전반기의 과학사상은 오래 두고 느긋하게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주제다. 라이헨바흐는 연구해야 하는 많은 사상가 중 한 명에 불과하지만, 내가 계속 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한 명의 사상가를 집요하게 끝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인슈타인, 에딩턴, 바일, 슐리크, 카르납, 오토 노이라트, 필립 프랑크, 콰인, 포퍼, 쿤, 파이어아벤트에 대해서도 나와 비슷한 스타일로 연구할 수 있다. 문제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안 한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평범하고 주변적인 존재인 내가 그런 연구를 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소소하게 느낄 수 있는 삶의 묘미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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