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차분한 나날들

강형구 2023. 9. 19. 09:25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지극히 현실적인 의사 결정을 일관되게 해왔다. 내가 과학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은 내신 성적이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학고등학교에서 교과과정 학습이 거의 끝나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자퇴했다. 자퇴 후 나는 응시 계열을 이과에서 문과로 바꿨는데, 왜냐하면 나의 경우 이과보다는 문과 계열 과목들에서 더 성적이 잘 나왔기 때문이다.

 

   자퇴 후 나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대입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과학고를 자퇴했던 까닭에 나는 학원에서 다른 과학고 자퇴생들과 함께 일종의 특별대우를 받아 매달 8만 8천원만을 내고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나는 대입 입시학원에 다닐 때도 학원에서 알게 된 형들 또는 누나들과 놀러다니지 않았다.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초, 중, 고교 과정을 거치면서 과도한 사교육비를 쓰지 않았다.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마냥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서울대학교 이외의 다른 대학의 경우 모두 법학과를 선택해서 입시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다닐 때 나는 내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계속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원에 지원할 당시 과학철학 분야의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당한 행운이었다. 만약 과학철학이 인기 있는 학문 영역이었다면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다.

 

   육군 학사장교의 복무 기간은 40개월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군 생활을 40개월씩이냐 하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나는 정확하게 4년 만에(물론 계절 학기를 계속 수강했지만)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직장인으로서 돈을 벌고 싶었고, 학사장교는 군대에서도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다. 비록 군 복무 기간은 제법 힘들었지만, 전역하면서 나는 군대에서 모은 돈으로 대학원 근처의 원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전세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연히 석사 과정을 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는 나 스스로 벌었다.

 

   나는 4학기 만에 석사를 졸업했다. 늦게 졸업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휴학하고 공공기관에 취직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과학철학 책을 번역했고, 박사과정 학점을 이수했으며,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고, 결국 늦게나마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셋을 가지게 되었으니 퍽 부지런하게 살아온 셈이다. 오랜 숙원이었던 박사학위 취득 후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강사로서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매년 2편 정도의 학술 논문을 쓰고 있으며, 매년 1권 정도의 책을 번역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나의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선택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좀 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내가 좀 더 머리가 좋아 공부를 더 잘했다면 아마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 왔다고 믿는다. 당연히 이 세상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 속 여러 제도들 및 절차들과 타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길,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길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나는 나에게 맞는 나 자신의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걸어 나가면 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근 차분하고 안정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