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책은 살아 있다

강형구 2022. 6. 20. 11:54

   나는 책을 노트북이나 핸드폰으로는 거의 읽지 않는다. 노트북이나 핸드폰 속 전자 파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로 된 견고한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책장을 폈을 때 내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을 좋아하고, 종이 위에 연필이나 샤프 펜슬로 줄을 그을 때 들리는 사삭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내게 종이로 만든 책은 여전히 가장 선호하는 형태의 정보 매체이다. 나라는 소비자는 아직 실물 형태의 책을 선호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은 영상이 유행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 감동하는 사람보다 영상을 보며 감동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책이 줄 수 있는 감동의 고유함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 책이라는 매체의 본질은 그것이 일정량 이상의 문장들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문장들의 연계가 줄 수 있는 고유의 통찰과 감정을 전달한다는 데 있다. 물론 겉으로는 책처럼 보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영상을 모방하고 있는 책들도 많다. 또한 짧게 짧게 쓴 글들을 모아서 두꺼운 책으로 만든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들은 책처럼 보이는 ‘가짜 책’이라고 평가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책’은 오랫동안 고민하고 다듬어서 만든 하나의 일관된 ‘작품’과 같다. 이러한 책은 치밀하게 설계된 미로와 비슷하고, 정교하게 계획된 게임과도 유사하다. 전문화된 퍼즐 풀이와는 다르다. 수학자들은 수학 문제를 풀고, 물리학자는 물리학 문제를, 화학자는 화학 문제를 푼다. 다양한 종류의 자연적인 현상들이 인간의 표상 능력 아래에서 문제화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이면서 놀라운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산업이 다양한 분야들로 전문화된 것과 비슷하다. 퍼즐 풀이는 고도의 지성과 전문적인 지식 및 체계적인 협업이 필요하지만, 인간에게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조망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동료였던 인펠트와 함께 쓴 [물리학의 진화]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전문적인 물리학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중요한 측면에서 이 책이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논문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물리학 전체를 바라보는 아인슈타인의 거시적인 조망이 담겨 있다. 비슷하게, 물리학자 리 스몰린이 쓴 [다시 태어난 시간] 또한 물리학에 관한 일반적인 철학적 관점을 담고 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 리가 쓴 책도 있지만, 로벨리의 책은 약간 즉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더 재미있고 깊이가 있으려면 약간 더 수수께끼 같고 유혹적이며 독자를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어딘가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간적으로 소모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고 고민하게 만드는 책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카뮈의 [이방인], 사르트르의 [자유의 길]을 떠올린다. 철학책으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 생각난다. 이 책들이 ‘진리’를 담고 있어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책의 분량을 든든한 무기 삼아, 긴 호흡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언어적 드라마를 독자 앞에 펼치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 작가가 자신을 장식하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책을 썼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책에 자신의 삶을 바친 것이다.

 

   매일 짧고 간헐적으로 여러 조각글을 읽으며 감정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책은 살아 있다. 나는 힘을 줘서 구부려도 튼튼하게 그 외형을 유지하는 견고한 책을 만지며 그 책을 만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평소에는 보기 힘든 깊은 감동을 주는 책을 읽으며 책의 작가에게 공감한다. 종이로 만든 책은, 고도로 발달한 정보 해석 체계인 나라는 인간 개체가 여전히 가장 선호하는 형태의 정보 전달 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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