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며

강형구 2019. 5. 19. 11:07

 

   나는 요즘 인식론, 언어철학, 과학철학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인식론에 관한 논문들은 전체적으로 공부를 마쳤고 지금은 언어철학 논문들을 공부하고 있다. 5월까지 언어철학 공부를 마친 후 6~7월에 과학철학 관련 논문들을 공부하는 것이 목표다. 올해 8월 초에 예정되어 있는 시험에 응시할 예정이지만 합격 여부는 불확실하다. 공부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8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경우에는 내년 초에 예정된 시험에 다시 응시할 예정이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내년에는 과학철학만을 다루는 다른 논문자격시험을 준비하여 응시할 계획이다.

  

   나에게 박사학위란 지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인 계기다. 나는 학사, 석사, 박사학위 공부를 계속하여 꾸준히 연구 실적을 쌓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좀 역설적인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저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자연과학을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공부한다. 나는 제도화된 자연과학 수업과 교과서에 의존하지 않는 대신, 자연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책들과 글들을 읽고 이에 관한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거나 강의를 함으로써 자연과학을 공부해나간다. 나는 과학사를 위한 과학사, 과학철학을 위한 과학철학을 공부한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나는 자연과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과학의 역사와 철학을 일관되게 공부해왔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철학적 설명이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로렌츠 변환을 유도한다고 가정해보자. 로렌츠 변환이란, 서로 상대적으로 등속 운동하는 두 계의 좌표계 AB가 있고, 동일한 물리적 현상 PA 좌표계에서 (x, y, z, t)라는 좌표값으로 기술하고 B 좌표계에서 (x', y', z', t')라는 좌표값으로 기술하는 경우, 두 부류의 좌표값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만족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변환식이다. 빛의 속도 일정의 원리와 특수 상대성의 원리를 이용하면 로렌츠 변환식을 유도할 수 있는데, 이때 유도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식 하나 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한다면 그것이 바로 과학철학적 설명이다. 과학철학적 설명은 과학을 설명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과학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담론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나에게 모범이 되는 과학철학자는 푸앵카레, 아인슈타인, 라이헨바흐다. 이 세 사람은 나에게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른 의미를 가진다.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과학이 드러냈던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과학자 스스로의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푸앵카레의 독창적이고 예리한 생각들이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가 각 주제들에 대해 비교적 짧은 분량의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정밀한 논의를 담은 저서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앵카레가 논의하는 주제들, 이 주제들에 대한 그의 고찰들은 충분히 과학철학적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내게 아인슈타인은 과학철학을 체화하고 있던 과학자다. 그는 과학의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해 철학적인 고찰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통해 직접 구현해낸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아인슈타인이 서양과학의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비록 상대성이론이 뉴턴의 고전역학을 기반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인슈타인이 특정한 측면에서는 뉴턴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뉴턴의 경우 그의 수학적 능력과 철학적 능력을 구분할 수 있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철학보다는 그의 수학이 훨씬 더 뛰어났다고 본다. 이에 반해 아인슈타인에게서는 그의 수학적 능력, 물리학적 직관, 철학적 사유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물리학적 직관과 철학적 사유가 더 중요했고 수학은 늘 그 둘을 뒷받침하는 도구로써 기능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아인슈타인의 경우 그의 물리학적 직관과 철학적 사유가 수학적 능력보다 더 뛰어났다.

  

   그렇다면 왜 나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라이헨바흐를 연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약간 모호하다. 나에게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 20세기의 자연과학 이론에 대해 아인슈타인이나 보어보다는 라이헨바흐가 더 철학적으로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좀 더 투박하게 말하자면, 나에게는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적 설명이 과학자들의 과학철학적 설명보다 더 친절하고 자세해서 더 만족스러운 이해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답변에는 약간 미묘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고전 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칸트의 인식론적 분석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뉴턴이 제시한 절대적 시공간 개념보다 칸트가 제시한 인간의 인식 형식으로서의 시공간 개념을 더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뉴턴보다는 칸트의 설명이 철학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설명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뉴턴과 칸트 사이의 관계를 아인슈타인과 라이헨바흐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평가한다. 비록 수학적 기량은 아인슈타인보다 뉴턴이 더 뛰어났고, 철학적 사유 능력은 뉴턴보다 아인슈타인이 더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뉴턴 사이에는 흥미로운 비대칭성이 있다. 뉴턴은 라이헨바흐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 뉴턴보다 아인슈타인이 더 철학적이었다는 것은, 아인슈타인 이후 등장할 제 2의 아인슈타인 역시 최소한 아인슈타인 이상으로 철학적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분명 향후 물리학의 중요한 혁신은 고도로 전문화된 물리학을 숙달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지만, 분명 그 사람은 깊은 철학적 사유 능력 역시 갖추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라이헨바흐는 기호논리학, 확률론, 법칙이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과 같은 주제에 관한 다수의 저서들을 남긴 과학철학자다. 그의 저작들은 나와 같이 일반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제법 진지하게 자연과학의 의미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철학적 설명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는 마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과도 같다. 그러나 이에서 더 나아가, 미래의 아인슈타인 혹은 미래의 철학자-과학자가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든든한 양식이 될 만한 20세기의 과학철학이 있다면, 이는 다름 아닌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제법 길어졌다. 우선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한다. 그 이후 계속 라이헨바흐의 과학철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야 한다. 과학철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나의 생각과 해석은 곧 사라져버릴 한낱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해석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 삶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나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낼 수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증명되지 않는 생각은 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와 같은 냉정한 삶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