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햇살 속에서 뛰노는 딸을 바라보며

강형구 2019. 3. 24. 16:11

 

   태어난 지 28개월이 된 나의 딸은 이제 말을 곧잘 한다. 아이는 혼자 있을 때 가끔씩 스스로 문장을 지어서 말하며 논다. 아이는 말의 신비를 깨달은 것 같다. 아이는 아빠인 나에게 자신이 어떤 말을 하면 나의 특정한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나에게 원하는 행동을 유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아빠는 이쪽으로 들어오지 마.” 내가 아이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아이는 같은 문장을 거듭 말하다 짜증을 내며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는 어떤 문장을 말하고 난 뒤 곧바로 그 문장의 부정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아이는 엄마나 아빠가 지윤아, 밥 먹으러 이리 와.”라고 하면, “지윤이는 밥 먹으러 안 갈 건데.”하면서 엄마와 아빠의 문장을 부정하며 우리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

  

   나는 종종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며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는 느끼기 어려운 종류의 이질감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느끼는 이와 같은 이질감에는 다소 역설적인 성격이 있다. 과연 내가 그 때 그 일들을 어떻게 겪어낼 수 있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 얼굴이 이렇게 변했을까. 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10대 시절의 일들이 생생하고 마음도 여전히 그때와 비슷한 것 같은데, 왜 나는 30대 후반의 모습으로 저 곳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까. 나는 이러한 종류의 이질감을 내 아이에게서도 느낀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하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인 나의 딸이 환한 햇살 속에서 웃으며 뛰놀고 있다. 내가 아이에게 분홍색 공을 차서 보내면, 아이는 다시 내게 달려오며 공을 찬 후 깔깔 웃음을 짓는다.

  

   나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기에 나는 딸을 보며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딸을 지금까지 자라게 한 것은 나와 내 아내의 노력만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이 갖는 내재적인 힘이 딸을 자라게 했고, 내가 속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 딸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딸을 보며 비록 나 자신의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 개체는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적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성장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더 생생하게 실감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외부 세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푸른 하늘에서 태양이 햇살을 비추고, 멀리 시선을 주면 웅장한 몸집의 가야산이 보인다. 근처 계곡에서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간질인다.

  

   새로운 생명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만약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없더라도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인 나의 딸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인 나의 부모님이 나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 주신 것처럼, 내가 숨을 다해도 나의 딸이 이 땅에 남아 자신만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이렇게 나는 인류의 거대한 역사 속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죽어도 사람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낳은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그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또 다른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나는 딸아이를 보며 기뻐하는 내가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기쁨이다. 나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벅찬 기쁨. 아마 딸은 나의 이런 기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이런 기쁨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너 역시 자신의 아이를 낳아봐야 할 거야. 앞으로 너와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지만,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너에게 너무나 감사해. 딸이 햇살 속에서 흐드러지게 웃는다. 곧 지나갈 이 순간이 마치 영원과도 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