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노직, [지식과 회의주의(1981)](03)

강형구 2017. 8. 27. 16:51

 

 

. 회의주의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적게 알거나 전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거나, 어쨌든 이러한 입장이 지식에 대한 믿음보다 덜 합리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철학의 역사는 회의주의자를 논박하고자 하는 서로 다른 많은 시도들을 보여준다. 이 시도들에서는 회의주의자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거나, 회의주의자가 지식에 대항하여 논증을 할 때 특정한 지식을 전제하므로 자가당착적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다른 시도들에서는 회의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비합리적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의 모든 전제들이 참일 가능성보다는 그의 극단적인 결론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거나, 혹은 믿음에 대한 합리성은 반-회의적인 방식으로 진행해나가는 절차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반대 논증들이 논증을 발명한 사람들을 만족시켰을지 몰라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는 회의주의에 대한 대항이 지속되었음에서 드러난다. 회의주의를 논박해야 한다는 필요성 및 그것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느꼈다는 것은 회의주의자의 입장의 강력함을 보여주며, 회의주의자가 걱정하는 바의 깊이를 보여준다.

  

   지식에 대한 설명은 회의주의적 논증들을 조명하고 이 논증들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만약 지식에 대한 설명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 논증들을 포기하도록 이끈다면, 이는 너무 쉽게 또는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방식으로(glibly)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회의주의자는 너무나 명백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회의주의자에게 단순한 착오나 혼동 또는 오류를 부여하는 것은 회의주의적 입장이 가진 힘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회의주의자의 통찰을 얻고, 왜 회의주의적 논증들이 우리를 그토록 현혹시키는지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게 될 것이다. 사실상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회의주의의 유령(specter)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먼저 들어보지 않고서는 이 유령이 휴식을 취하도록 놓아둘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회의주의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다. , 회의주의가 오류임을 증명하거나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회의주의자가 말하는바 중 우리가 수용하는 것을 전제했을 때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꿈을 꾸거나 수조 속에 떠다니고 있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회의주의자를 설득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는 회의주의자가 거부할 법한 설명적 가설들을 도입할 수 있다. 설명과 이해라는 우리의 임무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은 가설들이 수용가능하거나 그럴듯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 가설들은 지식의 존재가 어떻게 회의주의자들이 지적하는 논리적 가능성들과 맞아 떨어져서 우리의 믿음 체계와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가설들은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지를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1. 회의주의적 가능성

 

   회의주의자는 특정한 믿음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믿을 가능성이 있다고 자주 말한다. 실제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사악한 악마에 의해서 교묘하게 기만당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은 꿈을 꾸고 있거나 알파 센타우리 근처에 있는 수조에 그의 뇌가 떠다니며 자극을 받고 있을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 그가 믿고 있는 p는 거짓이며, 비록 p가 거짓이라도 그는 p를 믿는다.

  

   어떻게 회의주의자는 어떤 사람이 p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와 같은 가능성을 인용하는가(adduce)? 그 어떤 사람이 당신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가능성들은 어떻게 당신이 p를 안다는 것에 대해서 대항하는가? 이에 대한 하나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는 이후에 고려해보겠다.) 비록 p가 거짓이지만 당신은 p를 믿는 가능한 상황이 있다고 한다면, 이 상황에서 당신은 비록 p가 거짓이라고 해도 p를 믿는다. 따라서 당신은 지식을 위한 조건 3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만약 p가 거짓이면 Sp를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논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록 p는 거짓이지만 당신은 p를 믿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때 p가 거짓인 경우 당신은 p를 믿지 않는다는 것 역시도 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만약 회의주의자가 제시한 가능한 상황이 조건 3이 거짓임을 보여주고, 조건 3이 지식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회의주의자의 가능성은 지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은 논증에서 회의주의자의 논증은 조건 3과 관계되어 있다. 이 논증은 조건 3이 충족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회의주의자는 다음을 주장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R: 비록 p가 거짓일지라도, S는 여전히 p를 믿을 것이다.

 

   조건 3과 동일한 전제를 갖고 있으면서 모순되는 결론을 갖는 이 조건문은 조건 3의 진리값과 양립불가능하다. 만약 조건 3이 옳다면 R은 옳지 않다. 그러나 R은 회의주의자가 조건 3이 거짓임을 보이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강하다. 왜냐하면 조건 3p가 거짓일 때 Sp를 믿을 수 있는 경우에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조건문은 R보다 약하며, 이는 조건 3의 단순한 부정이다.

  

   T: ~(~p ~(Sp를 믿는다))

 

   R이 조건 3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닌 반면에, 위 조건문은 조건 3 자신에 대해 반대되는 입장의 조건문을 주장한다. 아마도 회의주의자가 인용하는 가능성은 R이 참임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지만, 이 가능성은 최소한 좀 더 약한 T을 수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T가 조건 3을 부정하므로, 회의주의자의 가능성은 조건 3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p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p임을 믿는 가능한 상황의 존재는 조건 3의 참과 양립불가능하다.

  

   (3) ~p ~(Sp를 믿는다)

 

   위 가정법적 조건문은 p가 거짓인 모든 가능한 상황들(~p가 참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조건문은 ~p가 적용되는 모든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Sp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p이지만 Sp를 믿는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p~(Sp를 믿는다)를 도출하거나 논리적으로 함축한다고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정법적 조건문은 도출과는 다르다. 가정법적 조건문 3은 도출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따라서 p가 거짓이지만 Sp를 믿게 되는 가능한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 조건 3이 거짓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p이고 Sp를 믿는 가능한 상황이 존재한다고 해도 조건 3은 참일 수 있다.

  

   가정법적 조건문 3이 말하는 것은 p가 거짓인 경우에 적용되는 상황이다. p가 거짓인 모든 가능한 상황이, 만약 p가 거짓이라면 적용될 상황인 것은 아니다. 가능세계 존재론의 방식대로 말하면, 가정법적 조건문 3은 실제 세계에 가장 근접한 ~p 세계에 대해서 말하거나, 좀 더 강하게 말해 실제 세계의 ~p 근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조건문 3은 이러한 ~p 세계에서 Sp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p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조건 3은 관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악마에 의해서 기만되거나 수조에서 떠다니게 되는 회의주의자의 가능성(이를 SK라 부르자)은 만약 p가 거짓인 경우에 이 가능성이 획득될 경우에만 가정법적 조건 3에 대한 반박이 된다. , 오직 실제 세계의 ~p 근방에 이 가능성들 중에 하나가 존재해야 조건 3에 대한 반박이 된다. 조건 3은 말한다. 만약 p가 거짓이라면 S는 여전히 p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회의주의자가 제시했듯 p가 거짓이고 Sp를 믿는 상황인 SK가 존재한다고 해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비록 p가 거짓이고 Sp를 믿는 상황 SK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p가 거짓이라면 S는 여전히 p를 믿지 않을 것이다. 만약 회의주의자가 p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상황 SK를 기술한다면, 상황 SK는 조건 3이 거짓임을 보여주지 않으며 (최소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지식을 차단하지 않는다. 조건 C는 회의주의적 가설들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C: ~p SK는 성립하지 않는다.

 

   조건 3을 만족하는 그 어떤 회의주의적 상황 SK도 배제된다. 회의주의적 상황 SK는 우리가 p를 알지 못함을 보여주고자 하므로, SK는 이를 배제하는 C를 만족시키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대신 SK는 아래와 같은 C의 부정을 만족할 경우 얻어지는 상황임이 분명하다.

  

   ~(~p SK는 성립하지 않는다)

 

   비록 회의주의자의 상상된 상황들이 조건 3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같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조건 3을 만족하며 따라서 배제된다.

  

   회의주의자는 아마도 자신의 상상된 상황 SK가 조건 C에 의해 배제되는지의 여부, 만약 p가 거짓이면 SK가 성립하지 않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계속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은 더 강력한 질문을 한다. 과연 우리는 회의주의자의 상상된 상황이 실제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우리가 악마, 꿈 혹은 수조 속에서의 떠다님으로 인해 기만당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는 p를 알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회의주의자의 상상된 상황이 우리는 p를 모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에 이르게 된다.

 

-2. 회의주의적 결과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에 따르면, S는 회의주의자의 상황 SK가 성립하지 않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래와 같다는 것을 안다.

  

   (1) SK는 성립하지 않는다.

   (2) SSK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3) 만약 SK가 성립한다면, SSK가 성립하지 않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

   (4) 만약 SK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SSK가 성립하지 않음을 믿을 것이다.

  

   위 조건들 중 세 번째 조건에 초점을 맞춰 보자. 회의주의자는 만약 SK가 성립하더라도 우리는 SK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도록 신중하게 자신의 상황 SK를 선택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것이 아니라고, 기만당하지 않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꿈꾸고 있고 기만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회의주의자는 만약 SK가 성립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SK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도록 상황 SK를 선택한 것이다.

  

   조건 3이 지식을 위한 필요조건이므로, 이로부터 우리는 SK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만약 사악한 악마가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만약 우리가 특정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만약 우리가 수조 속에 떠 있고 우리의 뇌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극받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악한 악마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며, 우리가 수조 속에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하며, 우리가 꿈을 꾸고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회의주의자의 입장이자 지식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기만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와 같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만약 그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해도,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똑같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 역시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을 믿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는 그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느끼고 이러한 느낌은 정확하다.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이와 같은 결과를 도출하고 설명해준다는 것은 이 설명이 갖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회의주의자는 그가 제시한 가능성들이 성립하지 않음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옳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안다고 주장함으로써 회의주의를 회피하려는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회의주의자의 가능성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들이 성립하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있게 실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를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들이 우리에게 의심을 남기고 우리에게 이것이 나쁜 믿음이라고 호소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회의주의자는 단순히 명백하고 사소한 어떤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회의주의자의 가능성들이 성립하지 않음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는 당혹스러우며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악마에 의해서 기만당하고 있지 않음을, 꿈을 꾸고 있지 않음을, 수조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극받지 않고 있음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는 우리가 자신감 있게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한 것들을 우리가 실제로는 모르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모른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회의주의자의 지적에 의해, 이전까지는 명백하다고 가정되었던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킬 때 어떤 상황(혹은 세계)S에게는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doxically) 실제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보자. 만약 S가 그 상황에 있게 되면 S는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믿음을(doxa) 갖게 될 것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어떤 사람 S가 두 개의 상황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된다면 두 상황은 S에게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 동일하다. 실제의 상황과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동일하지만 비실제적인 상황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실제 세계와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동일하지만 대부분의 믿음들이 거짓인 세계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와 같은 세계들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러한 세계들을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믿음과 참됨 사이에 분기(divergence)가 일어날 여지를 남긴다. 이는 마치 우리가 3차원 사물들에 대한 2차원적 평면 사영들만을 갖는 것과 같다. 서로 다른 3차원적 사물들도 방향만 적절하게 조절하면 동일한 2차원적 평면 사영을 갖게 된다. 유사하게, 서로 다른 상황들 또는 세계들이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믿음들을 갖도록 이끈다. 놀라운 것은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 동일한 세계들이 얼마나 서로 다를 수 있는가이다. 과연 한 세계에서 믿어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거짓이 될 수 있을 만큼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지식이 간접적으로 알려진다는 것은 항상 이와 같이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동일하지만 서로 매우 다른 세계들을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며, 우리의 경우에서도 회의주의자의 가능성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러한 여지가 남는다. 특히 우리가 우리는 회의주의자의 가능성이 성립되지 않음을 모른다는 것을 상기할 때, 이는 결코 사소한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부분의 것이 거짓이지만 판단 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

  

   회의주의자는 이에 더해 무엇을 더 보여주기를 요청하거나 희망할 수 있을까? 회의주의자의 입장을 너무 쉽게 기각하지 않고자 하는 나의 바람에 공감하는 독자들조차도 우리가 너무나 지나친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회의주의자의 입장이 갖는 힘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입장에 굴복했기(succumb)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을 우리는 모른다고 주장한다. 회의주의자는 우리가 앞서 놀랐던 것처럼 회의주의자의 (사소하지 않은) 가능성 SK가 성립하지 않음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우리가 몰랐고 여전히 모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짧은 단계만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꿈을 꾸지 않고 있다는 것, 악마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고 있다는 것, 수조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면, 예를 들어 내가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며,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책의 한 페이지를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는가?

  

   그러나, 비록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우리는 ~SK임을 모른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자에 동의하더라도, 이것이 나는 지금 펜을 갖고 종이 위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데에 위협적인(formidable)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참이고, 나는 이를 믿고 있으며, 만약 내가 글을 쓰고 있지 않다면 나는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내가 글을 쓰고 있다면 나는 이를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략했다.) 또한, 당신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제발 그만 두지 말기를!), 당신은 이를 믿으며, 만약 당신이 책을 읽고 있지 않다면 이를 믿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책을 읽고 있다면 이를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내가 펜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당신은 당신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회의주의로 우리를 이끌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회의주의자의 주장처럼 우리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 기만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 수조 속에 떠다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면, 내가 펜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거나 당신이 스스로가 책을 읽고 있음을 아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회의주의자의 단순 경로를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회의주의자의 이 단순 경로가 불합리하거나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비정합적임이 드러날 것이다.

 

-3. 닫혀있지 않음(nonclosure, 열려 있음)

 

   “단순 경로를 취함에 있어 회의주의자는 다음을 가정한다. Sp를 알고 Spq를 도출하는 것을 안다면, Sq 또한 안다. 논리학자들의 용어법을 빌리자면, 회의주의자들은 지식이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다고 가정한다. , 이미 알고 있는 무엇인가로부터 이로부터 도출되는 또 다른 무엇인가로 이동하는 절차(operation)가 우리를 지식의 (닫힌) 영역 바깥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회의주의자는 역방향으로의 추론을 사용하고자 의도한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사람 Spq를 도출하는 것을 안다고 해도 Sq를 알지 못하므로 Sp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고 주장한다. 만약 Sp를 알았다면 그는 q 역시 알 것이므로, Sq를 모른다는 것은 Sp를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회의주의적 논증들의 세부 사항들은 그 구조에 있어서 다양하지만, 각각의 논증들은 지식이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 닫혀 있다는 원리의 변종을 가정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p라는 지식“Kp”로 간단하게 표기하고 도출하다를 낚시 고리 기호 로 표시한다면, 우리는 닫혀 있음의 원리를 아래와 같은 가정법적 원리로 써볼 수 있다.

  

   P: K(pq)&Kp Kq

 

   만약 어떤 사람이 pq를 도출하는 것을 알고 그가 p임을 안다면 그는 q를 알 것이다. 가정법적 조건문 형식의 원리 P의 전건으로 알려져 있는 두 진술로부터 전건긍정법에 의해 진술 q가 따라 나온다. 이 원리 Pq로의 추론을 도출하는 그 사람을 신뢰한다.

  

   당신은 당신이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에 있다는 것이 당신이 현재 위치하고 있는 장소 X에 당신이 위치하고 있지 않음을 도출한다는 사실을 안다. (여기서 필자는 제한된 독자들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이의 대우명제, 즉 당신이 장소 X에 위치하면 당신은 자신이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에 있지 않음이 도출된다는 것을 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이 X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에 당신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와 같은 마지막 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회의주의자가 주장하며 우리가 동의한 바 있는 것처럼) 따라서 (회의주의자가 주장하기를) 당신은 자신이 X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회의주의자가 논증을 제시하는 또 다른 직관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두 개의 진술들이 양립 불가능함을 알고 당신이 첫 번째 진술이 참임을 안다면, 당신은 두 번째 진술의 부정을 안다. 당신은 당신이 X에 있는 것과 당신이 알파 센타우리의 수조 속에 있는 것이 양립 불가능함을 안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X에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알파 센타우리의 수조 속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 당신은 두 번째 진술을 모르므로, 첫 번째 진술도 모른다.

  

   물론 원리 P의 세부사항들에 대해서 논증하며 이 원리가 겉보기와 달리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Kp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p를 아는지를 모르고(, ~KKp) q로의 추론을 도출하지 못할 수 있다. 또는 그 사람은 ~KK(pq)이므로 추론을 하지 못할 수 있다. 다른 유사한 원리들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난점들을 갖는다. 예를 들어, K(pq) (KpKq)라는 원리는 만약 Kp ~(pq)이면 실패한다. 또한 K(pq) K(KpKq)라는 원리는 어떤 사람이 pq임을 잊어버리고 그가 q에로의 추론을 도출하지 못할 때 실패한다. 우리는 우리가 KK(pq)&KKpKKq와 유사한 것에 이르기 위해 K 연산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연산은 P의 전제를 상당히 강화하는 것을 포함하며, 따라서 p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회의주의자의 논증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정된 원리로부터는 기껏해야 p가 알려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가 P의 세부 내용을 갖고 트집을 잡는 것(quibble)은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이다. 비록 이 세부 내용들을 분명히 하는 것은 어렵지만, P와 같은 무엇인가가 계속 옳게 보일 것이다. 만약 S“pq를 도출한다를 알고, p를 알고, “p이고, pq를 도출한다면, q가 도출된다를 알면, 그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q로의 추론을 도출하고 이러한 추론 절차를 통해서 q를 믿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는 q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다량의 세부 내용을 원리 P로 단순화시키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까? , 우리가 이 원리를 세부 내용들이 성립하는 사례들에만 적용한다고, 또한 문제가 되는 회의주의적 사례들에만 적용한다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는 반 레어 재단 건물에 있는 것은, 내가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도출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 추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나는 내가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에 있지 않다고 믿는다. (비록 오직 이와 같은 추론만을 통해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사례는 원리의 세부 내용을 정확하게 만족시키며, 이를 통해 내가 알파 센타우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 도출되지 않는가? 회의주의자는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동의할 것이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는 내가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내가 예루살렘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원리 P에 대한 특수한 공식화가 갖는 세부 내용들의 난점을 들춰내는 것은 이 원리의 직관적인 호소력을 약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트집 잡기는 기껏해야 말벌이 스팀롤러 차량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회의주의자의 논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잘못된 믿음을 갖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원리 P는 잘못되었고, 그것이 단지 세부사항에서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지식은 이미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다. Sp라는 참된 믿음을 갖고 있고, Sp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며(조건 3), Sp라는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조건 4) Sp를 안다. 마지막에 제시된 두 조건들 중 그 어떤 것도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다.

  

   우선 아래와 같은 조건 3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 보자.

  

   (3) 만약 p가 거짓이라면, Sp를 믿지 않을 것이다.

  

   Sp를 아는 경우 p에 대한 그의 믿음은 p의 참됨을 조건으로 하는데(contingent on), 이때 가정법적 조건 3이 기술하는 방식의 조건을 갖는다. 이제 pq를 도출하고(이를 S도 안다), p에 대한 S의 믿음이 가정법적으로 p의 참됨을 조건으로 하며, Sq를 믿고, q에 대한 S의 믿음은 q의 참됨에 가정법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 이 경우에는 다음의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

  

   (3’) 만약 q가 거짓이라면, Sq를 믿지 않을 것이다.

  

   조건 3’는 만약 q가 거짓인 경우 S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이는 비록 pq를 도출하더라도 p가 거짓인 경우에 적용되는 상황과는 매우 다른 상황일 것이다. 당신이 어떤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부터 당신이 지구 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도출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도시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당신이 지구 위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그러한 가능성들이 서로 매우 다르므로, 그 가능성들에 대한 믿음 역시도 서로 매우 다를 것이다. pq를 도출할 때 pq보다 강한 진술일 것이며, 따라서 ~q(조건 3’의 전제인)~p(조건 3의 전제인)보다 더 강한 진술일 것이다. 당신이 이와 같은 서로 다른 강도를 가진 전제들을 갖는 이 두 사례들에서 동일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p 세계와 (가장 근접한) ~q 세계가 판단의 기준 상으로 당신에게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으며, 비록 pq를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두 세계 중 하나의 세계에서 당신이 갖는 믿음이 다른 세계에서 당신이 갖는 믿음의 ()부분 집합이 될 것이라고 가정할 근거가 없다. 이제 다음과 같은 두 진술들을 고려해 보자.

  

   p = 나는 깨어 있고 예루살렘에서 의자 위에 앉아 있다.

   q = 나는 p를 믿도록 전기화학적 수단을 사용하여 자극하는,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에서 떠다니고 있지 않다.

 

   첫 번째 진술은 두 번째 진술을 도출한다. pq를 도출한다. 또한 나는 pq를 도출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p를 안다. 만약 p가 거짓이라면 나는 동일한 도시에서 서 있거나 누워 있을 것이며, 거기서 자고 있을 수도 있고, 그와는 다른 도시 또는 동네에 있을 수 있다. 만약 q가 거짓이라면 나는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에서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분명 이 둘은 서로 매우 다른 상황들이며, 내가 무엇을 믿을지에 관해서 상당한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만약 p가 거짓이라면, 만약 내가 깨어서 예루살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지 않다면, 나는 p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q가 거짓이라면, 만약 내가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수조 속을 떠다닌다면, 나는 내가 수조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q를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나는 여전히 p를 믿을 것이다.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 비록 pq를 도출하고(이를 나도 알고) 내가 p를 알고 있더라도 나는 q를 모르는 것이다.

  

   지식이 이미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는 것이 이렇듯 실패하는 것은, 조건 3이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부터 비롯된다. 조건 3p에서 q가 도출될 때 S가 믿고 있는 p에 대해서는 적용되지만 q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에 대한 필요조건에 가정법적 조건 3, ~p ~(Sp를 믿는다)을 포함하는 지식에 대한 설명이라면 그 어떤 설명도, 지식이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다는 귀결을 얻을 것이다.

  

   pq를 도출하고 당신이 pq를 각각 믿고 있는 경우, 만약 당신이 p라는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왜냐하면 p는 참이므로) 당신은 q라는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것에 대해서 거짓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그것에 대해서 거짓된 믿음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pq를 도출하고 당신이 pq를 믿고 당신은 p라는 거짓된 믿음을 갖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q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지식은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는 이미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지식이 (단순히) 참된 믿음과 동일하다면 지식은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을 것이다(함축된 진술들을 믿는다는 전제 하에). 그러나 지식은 단순히 참된 믿음이 아니다. 추가적인 조건들이 필요하다. (도출된 진술을 믿는 경우라도 추가적인 조건들 중 최소한 하나의 조건이 그 자체로 열려 있는 경우) 이러한 추가적인 조건들이 지식을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열린 것으로 만들 것이다. 모든 추가적인 조건들이 닫혀 있는 경우(에만) 지식은 닫힌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는 그와 같은 조건들에 대해 사소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특성화를 하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러한 통찰력 있는 특성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와 같은 추가적인 조건들이 지식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자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p가 특정한 방식으로 p의 진리값과 함께 변동할 때만 지식이다. 지식을 위한 인과적인 조건은 믿음이 사실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으로 특성화되지만, 이 조건은 사실과 함께 변동한다는 올바른 종류의 조건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가정법적 조건 3과 조건 4는 그와 같은 변동을 특성화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였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변동을 아무리 상세히 설명하더라도(spell out), 믿음 p가 지식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부분적으로는 p가 거짓인 몇몇 상황에서 믿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의존한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p가 거짓인 모든 상황에서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설명은 우리에게 사실과 함께 변동하는 양식(mode)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보존되는 것은 참됨이므로,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보존되는 그 어떤 조건도 pq가 참인 경우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만을 말할 것이며, pq 중 하나 이상이 거짓인 경우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조건은 함께 변동한다는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따라서 참인 믿음에 오직 그와 같은 조건들을 추가하는 것은 지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우리가 믿는 것의 참됨이 우리의 믿음과 함께 변동하는 것은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지 않다. p라는 지식이 그와 같은 변동을 포함하기에, 지식은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도 닫혀 있지 않은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지식이 그와 같은 변동을 포함한다는 것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수조 안에서 떠다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는 그의 논증은 지식이 변동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수조 속을 떠다니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수조 속을 떠다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당신은 자신이 수조 속을 떠다니고 있지 않은지를 모른다.”) 그러나, 비록 회의주의자의 논증 일부에서 지식이 그와 같은 변동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논증의 다른 부분은 지식이 그와 같은 변동을 포함하지 않음을 전제한다. 후자는 지식이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에서 닫혀 있다는 것에 의존한다. 회의주의자는 당신은 ~SK임을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이 수조 안에서 떠다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자신이 책을 읽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이때 이러한 닫혀 있음에 의존한다. 그와 같은 닫힘은 오직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만 성립된다. 회의주의자는 두 가지 상황에서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회의주의자가 지식은 변동을 포함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수조 속에 떠다니고 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는 입장을 취할 때 그는 옳다. 그러나 회의주의자가 지식은 알려진 논리적 함축 아래 닫혀 있으며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결론내릴 때 그는 틀렸다.

  

   지식은 실제적인 사실적 관계이며, 반사실적으로 특성화될 수 있고, 그 관계의 구조는 우리가 pq를 도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q에 개입하지 않고서 p에 개입하거나 p를 추적하는 것을 허용한다. 사실 및 참됨에 대한 믿음의 변동을 포함하는 그 어떤 관계도 이와 같은 구조적인 측면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몇몇 특정한 참됨- 회의주의자의 회의주의적 가능성 SK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처럼-에 대해서 추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자는 옳다. 그러나 다른 많은 참됨들을 추적하는 실제적인 지식 관계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자는 틀렸다.

  

   회의주의에 대한 문헌에는 이와 같은 회의주의적 논변을 받아들이는 저자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문헌은 회의주의자들이 그들을 회의주의적 결론으로 이끈 추론에 명시적으로 집중하고 있지 않을 때 그들 자신의 회의주의적 믿음들을 유지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흄(Hume)이다.

 

    나는 모든 믿음과 추론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어떤 의견도 다른 의견보다 더 그럴 듯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성은 이러한 구름들을 물리칠 수 없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하다. 자연은 인간 마음의 이와 같은 성향을 이완시키거나 나의 감각을 생생하게 자극함으로써 이러한 모든 망상들(chimera)을 흐릿하게 하고, 나를 철학적 우울(melancholy)과 착란(delirium)으로부터 치유한다. 나는 식사를 하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대화하며, 친구들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서너 시간 즐겁게 보낸 후에 다시 철학적 고찰들로 돌아가면, 이 고찰들은 너무나 차갑고 메마르고 어리석게 여겨져서, 나는 내 마음이 더 이상 이 고찰들로부터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47)

  

   피론이즘(회의주의)의 위대한 전복가(subverter), 회의주의의 강력한 원리들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을 잠식한다. 회의주의의 원리들은 학교에서 번성하고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 원리들은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실제로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 원리들이 우리의 실제 열정과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실재하는 사물들에 의해 그림자 밖으로 나오게 되면, 이 원리들이 우리 본성에 있는 더 강력한 원리들에 맞서게 되면, 이 원리들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고 가장 확고한 회의주의자조차도 다른 생명들(mortals)과 마찬가지의 조건 속에 남겨둔다... 피론주의자(회의주의자)가 그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심오한 추론을 통해 잠시 동안 놀람과 혼동의 상태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일상의 가장 기본적이고 사소한 사건들은 그의 모든 의심과 망설임을 날려버릴 것이며, 전혀 철학적 탐구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행동과 생각 모두 동일하게 남겨둘 것이다. 회의주의자가 그의 잠에서 깨어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호탕하게 웃을 것이며 그의 모든 반론들이 그저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할 것이다.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212)

 

   우리가 제시한 바 있는 지식이론은 다양한 종류의 회의주의자들이 왜 자신들의 광범위한 회의주의적 고찰들을 서재 밖에서도 유지하기가 힘든지, 왜 그들이 회의주의적 논증이나 가능성 SK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이 고찰 속에 남아 있기 힘든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다.

  

   회의주의자의 논증은 우리가 회의주의자의 가능성 SK가 성립되지 않음을 모른다는 것을 (오직 그것만을) 보여준다. 우리가 SK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옳다. (만약 그것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자의 논증은 우리가 다른 사실들을 (~SK를 도출하는 사실들을 포함하여)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다른 사실들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지식은 알려진 논리적 도출 아래 닫혀 있지 않다). 당신은 당신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추적할 수 있고 나는 종이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추적할 수 있듯 우리는 다른 사실들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회의주의자 역시도 그러한 사실들을 추적할 수 있으므로, 그가 이런 사실들에 초점을 맞춰 자신이 그와 같은 사실들에 대해 갖는 관계를 생각하면, 그는 그가 그러한 사실들을 모른다는 관점을 기억하거나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회의주의자가 ~SK인 사실과 자신이 맺는 관계에 대해서 주목을 할 때만, 이 관계는 추적이 되지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회의주의적 믿음을 되살리고 이를 명백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주의를 다른 사실들에 돌리면 그의 회의주의적 승리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직 회의주의적 가능성 SK에 고정시킬 때만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회의주의적 덕목을 유지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자신이 쉽게 속아 넘어갔다는 죄를 고백하도록 강요된다.

 

-4. 회의주의와 지식의 조건들

 

   우리는 회의주의적 가능성 SK로부터 비롯된 회의주의자의 논증이 어떻게 조건 3을 속이는지(play off) 보았다. 조건 3은 만약 p가 참이 아니라면 Sp를 믿지 않을 것임을 주장한다. 회의주의자의 논증은 이 조건을 활용함으로써 그 힘을 얻는다. (“그러나 비록 SK가 성립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SK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므로, 당신은 SK가 성립하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이 논증의 깊은 직관적 위력은 조건 3(또는 이와 아주 유사한 것)이 지식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나타낸다. 이와 유사하게 조건 4를 속이는 회의주의적 논증이 존재할까? 조건 4는 만약 p가 참이라면 Sp를 믿을 것이라고(~p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조건 3이 믿어지는 것의 진리값에 따라 믿음이 어떻게 변동해야 하는지를 특성화하고 있다면, 조건 4는 믿어지는 것의 진리값이 변하지 않을 때 믿음이 어떻게 변동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특성화하고 있다. 조건 3이 변동 조건이라면 조건 4는 유지(adherence) 조건이다. 이 두 조건들을 통해 S(참으로 p를 믿고 있는 사람)p라는 참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개념을 포착한다. 그는 p가 거짓일 경우 거짓인 믿음 p를 갖지 않을 것이다(조건 3). 그는 p가 참일 경우 참인 믿음 p를 가질 것이다(조건 4). 믿음이 변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변동하지 않음을 회의주의자가 앞서 논증한 것처럼, 회의주의자는 믿음이 변동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변동함을 논증함으로써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음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조건 4를 속이는 회의주의적 논증이 조건 3을 속이는 논증에 비해서 덜 강력하고 덜 설득력 있기를 기대한다. 조건 3은 우리가 거짓으로 p를 믿지 않기를 요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거짓으로 p를 믿게 되거나 실제로 p를 거짓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조건 4는 우리가 참되게 p를 믿기를(거짓되게 ~p를 믿지 않기를) 요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요구를 위배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p를 믿고 있으며 ~p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 4를 속이는 회의주의적 논증은 조건 3을 속이는 논증과는 달리, 우리가 해당 조건이 나타내는 요구사항을 위배했는지 궁금해 하게 하지 않는다.

  

   조건 4는 유지 조건이므로, 어떻게 당신이 안전하게 참됨에 묶여 있는지에 관해서 의심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고 있는 p에 관한 많은(대부분의?) 사항들에 대해서, 만약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가가 ~p라고 말하면서 당신을 속인다면 당신은 이 사람들을 믿고 p를 믿는 것을 중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실험들은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해서 빈번하게 행해졌다.) 따라서 당신은 정말로 p를 아는 것일까? 만약 물리학자들이 당신에게 다가와 뉴턴의 이론이 결국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뉴턴의 이론이 그르다고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전과 같이, 당신이 어떤 것을 믿지 않을 때 그것이 참일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만으로는 당신이 그것을 실제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가능성은 분명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당신이 믿지 않을 때 p가 참인 이와 같은 가능성을 sk라고 하자. (대문자 SK는 당신이 p를 믿고 있을 때 p가 거짓일 가능성이라면, 소문자 sk는 당신이 p를 믿지 않을 때 p가 참일 가능성이다.) p가 참이고 sk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는(psk) 가능성 sk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sk는 실제 세계의 p 근방의 첫 번째 부분 전체에서 거짓이다. 나를 속이려는 사람들이 없을 것임을 내가 안다는 것, 나는 내가 에머슨 홀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만약 내가 그곳에 없다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사람들이 나를 내가 그곳에 있다고 믿도록 속이거나 최면을 거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다.

이제 내가 진실로 p를 믿는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논증을 제시하여 그를 납득시킨 후 그가 ~p를 믿도록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그가 얼마나 쉽게 p를 믿는 것에서 ~p를 믿는 것으로 움직였는지를 살펴보자. 만약 내가 그에게 논증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p를 믿기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고 여전히 p를 믿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는 p를 알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그의 지식이 안전하지 않은 상황인가 아니면 그와 같은 불안정성은 그것이 전혀 지식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회의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논증할 수 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는 대부분의 p 각각에 대해서, 비록 p가 참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p를 믿게 하는 논증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회의주의자의 주장에 앞서와 유사하게 응답한다. p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p를 믿게 만다는 몇몇 가능한 논증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조건 4가 거짓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건 4는 만약 p가 참이면 Sp를 믿을 것이고 S~p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건 4가 거짓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회의주의자는 만약 p가 참인 경우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p가 참인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가 언급하는 것은 관련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물들에 대해서 믿게 하지 않는 논증들 중에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증 역시 포함된다. 이 논증들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들은 p를 안다고 믿는 것을 중지하게끔 만든다. 그들은 그들이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기술해야 할까? 처음에는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회의주의자의 논증들을 듣고 난 후 더 이상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 것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들은 회의주의자의 논증을 듣기 전부터 그들이 p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전에 갖고 있었던, 자신들이 p를 안다는 믿음은 변동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변동할 것이므로 조건 4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회의주의자의 논증들을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역시 (만약 그들이 회의주의자의 논증들을 듣는다면) 그들이 p를 모른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의 논증이 갖는 타당함(cogency)이 아닌 그럴듯함(plausibility)으로 인해 그들이 부분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회의주의적 논증들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p를 모른다고 그릇되게 믿을 것이며, 이들은 그들이 그것을 안다는 것을 모른다. 회의주의적 논증들의 존재는 몇몇 사람들에 대해 회의주의적 결론의 한 유형(우리는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을 참으로 만든다.

  

   메논(Meno)은 어뢰와도 같은(torpedolike)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질문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덕에 대해서 우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메논은 덕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이 이전까지 메논이 갖고 있던 혼동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비록 메논을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소피스트의 질문들이었지만, 그로 하여금 예전과 반대의 견해를 믿게 한 것을 지식이라 할 수는 없다. 지식은 좀 더 견고한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

  

   몇몇 회의주의적 논증들은 조건 3을 속이고 다른 논증들은 조건 4를 속인다. 이러한 조건들에 더해, 지식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조건 34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복수의 방법들이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발생하는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에 대한 조건을 공식화시켰다. 이러한 더 중요한 것에 대한 조건을 속이는 회의주의적 논증이 있을까? 추적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들로서, 우리의 믿음을 생산하는 다음과 같은 주된 원천들을 드러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에 적합할 것이다. 신념, 편견, 자기 중심주의, 종족 중심주의, 깊은 심리학적 동기들. 더 중요한 것에 대한 관점은 가정법적 조건문들을 포함하지만, p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 진행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회의주의자에게 대응하는 것이 있는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비교가 될 만할 것이다. 반대되는 모든 다른 방법들을 결합한 비중보다 특정한 방법의 비중이 더 커야한다는 것이, 추적하는 방법에 대한 필요조건은 아니었음을 상기하자. 믿음에 이르도록 사용된 모든 다른 방법들의 권고들이 고정되어 있을 때, 어떤 사람의 믿음은 추적하는 방법의 판단에 따라서만 변화하면 되었다. (표에서 검토가 필요한 것은 오직 사례 3이었다.) 추적하지 않는 방법들의 판단이 실제적으로 분기되는 그 어떤 것도 기꺼이 회의주의자를 위한 지지사례가 될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추적이 실제로 제시하는 것을 넘어 권고하는 것에 대항해서 다른 방법들을 적재하지 않아도 된다. 더 많은 것을 가정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다.

  

   몇몇 회의주의적 논증들은 조건 3을 속이고, 몇몇 논증들은 조건 4를 속이고, 복수의 방법들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에는 더 중요한 것에 대한 조건을 속인다. 여전히 다른 회의주의적 논증들은 방법들 그 자체를 속이고, 지식은 믿음의 경로 또는 방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속인다. 우리가 무슨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는가? 우리가 이를 아는지의 여부에 대해 결정하기 위해서는, 조건 3에 따라 우리는 만약 우리가 그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우리가 무엇을 믿게 될 지에 대해서 고려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믿음을 유지할까? 만약 그렇다면 조건 3이 위배되므로 우리는 우리가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실제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로를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다양한 사실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우리가 조건 3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상황인데),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도대체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다양한 사실들을 추적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방법 M은 우리가 방법 M을 사용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바로 그 방법일 수 있다. M이 우리의 (합리적인 또는 효과적인) 방법들의 총합으로서 광범위하고 충분히 심도 있게 기술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우리가 그 방법 M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조건 3에 의하면 우리가 방법 M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물음을 해결해야 한다. “만약 내가 M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내가 믿고 있던 것을 믿을 것인가?” 이 물음에 의해 나에게 남겨진 믿음의 방법은 무엇인가? 조건 3은 완전히 공식화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p이고, SM을 통해 p의 진리값에 대한 믿음에 도달했다면, ~(Sp를 믿는다). 그리고 조건 3의 방법 M은 조건 2(SM을 통해서 p를 믿는다)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다고 말해진 바로 그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S는 방법 M 그 자체의 사용을 통해서 자신이 방법 M을 적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이 상황에서 S가 알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고자 하는 진술 p는 다음과 같다고 하자. S는 방법 M을 사용한다. 완전한 조건 3에 진술 p를 대입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만약 S가 방법 M을 사용하지 않고, S가 방법 M을 통해 “S는 방법 M을 사용하고 있다라는 진술의 진리값을 결정하고자 한다면, S“S는 방법 M을 사용하고 있다라는 진술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법적 조건문의 전제는 S가 방법 M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이 가정은 조건 3의 전제의 ~p이다) S는 방법 M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그는 p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 조건 3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이 방법은 조건 2에서 그가 실제로 p를 믿는 데 사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두이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한 일관된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SM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S가 무엇을 믿을지를 결정하는 데 방법 M의 사용을 단순하게 포함시킬 수 없으며,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 (조건 3의 목적을 위해) S가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믿음에 도달했다고 단순하게 가정할 수도 없다. 앞서 우리는 다양한 예들을 살펴보며 지식에 관한 물음들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방법을 유지하는 것의 막대한 중요성을 확인했다. 자신을 방문한 손자를 보고 손자가 건강하며 걸을 수 있다고 믿는 할머니의 예를 떠올려 보라. 그러나 만약 손자가 걸어 다닐 수 없다면, 다른 친척들은 할머니에게 할머니께서 걱정하고 속상해하지 않도록 손자가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할머니는 손자가 걸어 다니는 것을 본다. 과연 그녀는 손자가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조건 3에 따르면 우리는 손자가 걸어 다니지 못할 때 할머니께서 무엇을 믿을지에 대해서 물어야만 한다. 만약 할머니의 믿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고정되지 않는다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릇될 것이다. 만약 손자가 걸어 다니지 못한다면, 할머니께서 여전히 (다른 친척들의 말을 듣고) 손자가 건강하다고 믿을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손자가 걸어 다니지 못하고 할머니께서 손자를 보고 손자와 이야기한다면 할머니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따라서 할머니의 지식에 관한 올바른 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반드시 고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의 방법 또는 경로에 대한 명료한 참조(언급)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방법 M을 통해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과연 그가 자신이 M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지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만약 그가 이를 알고 있다면, 자신이 이를 알고 있다는 그의 믿음은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추적하며 이 사실과 함께 변동한다.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만약 p가 거짓일 때 그가 무엇을 믿을지의 문제, 즉 그가 방법 M을 사용하지 않을 때 무엇을 믿을 것인지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물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지식에 관한 옳은 답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할머니의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S의 믿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 M을 고정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동시에 방법 M을 고정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S가 방법 M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그가 방법 M을 사용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방법 M을 사용하는 (명백하게) 비일관적인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동시에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가정한다.

  

   우리가 특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방법을 통해 아는 경우에는 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우리의 가장 심도 있는 방법의 사용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만 제기되며, 특정한 경우에 이러한 방법에 대한 얕은 명세화에 대해서는 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이러한 가장 심도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에 관해 또는 우리가 이 방법을 적용하는 고전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당신은 당신이 합리적임을, 당신이 제정신임을 아는가? 만약 당신이 비합리적이거나 제정신이 아니라면, 당신은 자신이 합리적이고 제정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겠지만, 그러한 생각은 합리성과 제정신인(고정된) 조건 속에서 방법을 적용하는 것에 의해서는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조건 3이 만족되지 않아 당신은 자신이 합리적인지 또는 제정신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단순하게 결론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건은 방법이 변동하도록 허용되어 있을 경우에만 만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 방법이 사용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나는 당신이 M을 사용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발견하기 위해, 또는 내가 과거에 M을 사용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발견하기 위해 M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M이 지금 사용되고 있다면 M은 그것이 과거에 사용되지 않았음을 감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단순히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것이 분명하고 명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합리적인지 또는 제정신인지 아는 것에 관한 물음들은 사용된 방법의 변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방법을 적용하면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합리성과 판단의 건전성의 외관이라면, 설사 우리가 그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제정신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제정신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보이는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일치가 존재해야 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이 미쳤고 비합리적일 가능성, 또는 내가 합리적이고 제정신이라고 나를 확신시키는 음모에 참여할 가능성은 제쳐두자. 만약 내가 합리적이고 제정신이라면 이와 같은 가능성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미치고 비합리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동의하고 있다고, 즉 다른 사람들의 부동의를 합의로 오해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미치고 비합리적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동의한다고 보인다면, 그에게 자신은 제정신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에게는 사물들의 상태가 그가 합리적이고 제정신으로 세계를 판단하는 상황과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떻게 방법을 사용하는지가 사용자에 의해서 내적으로 경험되는 한, 여기서 방법의 변동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그와 같은 특별한 회의주의적 상황 SK에 있지 않음을 아는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그러한 특정한 ~SK를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다른 것들도 모른다는 결론, 예를 들어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제정신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제정신이고 합리적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특정한 방식으로 제정신이고 합리적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이러한 회의주의자의 가능성 SK가 아니다. 이러한 측면들은 만약 우리가 모든 지식 일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지식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들을 고려할 때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