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노직, [지식과 회의주의(1981)](01)

강형구 2017. 7. 16. 18:52

 

 

지식

 

지식의 조건들

  

우리의 임무는 아래의 내용과 부합하는 추가적인 조건들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1) p는 참이다.

    (2) Sp를 믿는다.

  

   우리는 각각의 조건이 지식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어, 이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하는 사례는 어떤 사례도 지식의 사례가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조건들의 결합이 지식에 대한 충분조건이 되어, 이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사례는 어떤 경우에도 지식의 사례가 되도록 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일상적인 사례들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고, 지식을 지식으로 분류하고 지식이 아닌 것을 지식이 아니라고 분류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조건들을 공식화시키겠다. 그리고 난 후 우리는 이 조건들이 다른 논문들 속에서 등장한 어려운 사례들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언급된 지식을 위한 인과적 조건은, 수학적이고 윤리학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비호의적인(inhospitable)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인과적 연결의 유형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잘 알려진 난점들 역시 존재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조 위를 떠다니면서도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자. 이때 그 사람에게 (두뇌에 직접적인 전기적 화학적 자극을 가함으로써) 자신이 두뇌에 자극을 받으면서 수조 위를 떠다니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면, 비록 그 사실이 그의 믿음의 원인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그것이 참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제 지식의 세 번째 조건을 살펴보자.

  

   (3) 만약 p가 참이 아니라면, Sp를 믿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만일 라면이라는 가정법적 조건을 화살표로 나타낼 것이고, 한 문장의 부정을 문장 앞에 를 붙여 표시할 것이다. 이 경우 위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재서술할 수 있다.

  

   (3) p → ~(Sp를 믿는다)

  

   이와 같은 가정법적 조건은 인과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p가 누군가로 하여금 p임을 믿게 하는 것의 (부분적인) 원인이 될 경우, 이는 그 믿음을 갖기 위한 인과적 필요조건인 경우가 많다. 원인이 없다면 결과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가정법적 조건 (3) 역시 만족된다. 그러나 이 조건이 인과적 조건과 동등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과적 조건은 인과적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의 사례에서도 만족되기 때문이다. 중층결정의 사례란, 결과를 일으키는 데 충분한 원인이 복수로 작용하거나, 첫 번째 원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동일한 효과에 대한 보충 원인이 작용했을 경우를 말한다. 가정법적 조건 (3)이 이와 같은 중층결정의 사례에 반드시 적용되지는 않는다. 두 개의 조건(가정법적 조건과 인과적 조건)이 서로 일치할 경우 인과성은 지식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인과성은 가정법적 조건 (3)을 참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정법적 조건 (3), 에드워드 게티어에 의해서 최초로 기술된 바 있었던 종류의 사례들을 배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내 사무실에 두 명의 사람이 있고 나는 둘 중의 첫 번째 사람이 포드 차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나에게는 나의 이러한 믿음을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증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첫 번째 사람은 포드 차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나에게는 낯선 두 번째 사람이 포드 차를 갖고 있다. 이 경우 나는 내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가 포드 차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이러한 나의 믿음은 정당화되지만, 게티어는 이 경우 지식이란 단순히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게티어의 사례는 가정법적 조건 (3)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만약 내 사무실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포드 차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누군가가 포드 차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포드 차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내 사무실에 있는 낯선 사람 역시 포드 차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만약 내가 여전히 누군가가 포드 차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내게 친숙한 첫 번째 사람이 포드 차를 갖고 있다고 여전히 믿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위 사례에서 나의 믿음은 가정법적 조건 (3)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가정법적 조건 (3)은 게티어의 사례를 지식의 사례로부터 배제한다.

  

   가정법적 조건은 강력하고 직관적이지만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조건은 지식이 아닌 모든 사례들을 지식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 가정법적 조건문인 “p가 참이라면 q는 참이다”, pqpq를 도출한다 또는 p이지만 q인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 조건은 p가 참인 경우에는 q 역시 참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은 가정법적 조건문을 가능세계로 설명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 세계와 가장 근접한 모든 가능세계들에서 p가 참이고 q가 참인 경우, 가정법적 조건문은 참이다. 실제 세계와 동떨어져 있고 p가 참인 세계에서 q가 참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이 가정법적 조건문의 참됨과 무관하다. 여기서 필자는 가정법적 조건문에 대한 특정 종류의 가능세계 설명을 편들려는 것이 아니며, 필자 자신이 이러한 종류의 설명에 헌신하고(committed)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설명이 논점들을 아주 명료한 방식으로 드러낼 경우에는 가끔씩 이 설명을 사용할 것이다.

  

   주어진 맥락에서 당신이 p에 유관한 대안들을 배제할 수 있을 경우 당신은 p를 안다는 관점이 있다. 가정법적 조건 3은 이러한 관점에 관련하여 난점들을 제기하는 사례들 역시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게일 스타인(Gail Stein)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자.

 

  

   하나의 대안을 어떤 맥락에서는 유관하고 다른 맥락에서는 유관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교외를 운전하던 민수는 헛간과 같은 겉모습을 하고 있는 물체를 보았다. 이 때 민수는 물체를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최적의 상황 아래에 있었다.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물체가 헛간임을 민수가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 보자. 민수는 몰랐지만 민수가 운전하던 지역은 헛간의 겉모습만을 정교하게 복사한 복제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민수가 자신이 본 물체가 복제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민수가 그 물체는 헛간임을 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어떤 물체가 헛간의 복제물이라는 것이 유관한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복제물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민수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이러한 두 상황 모두 해당 물체가 헛간의 복제물이라는 가설을 유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한가?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 논의의 상황이 아주 명백하지는 않아 보인다.

 

   이제 p를 들판에 실제로 헛간이 놓여 있다는 진술이라고 하고, q를 들판에 놓여 있는 것은 헛간의 복제물이라는 진술이라고 하자. 해당 지역에 복제물 헛간들이 산재해 있을 경우, 다시 말해 p가 거짓이라면, 아마도 q는 참일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민수가 여전히 p를 믿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아래의 가정법적 조건 (3)은 충족되지 않으며 따라서 민수는 p를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3) p → ~(Sp를 믿는다)

  

   그러나 헛간의 복제물들이 해당 지역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 산재해 있을 경우, 비록 p가 거짓이라도 q 역시 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민수는 p임을 알 수도 있다. 만약 p가 참이 아닐 경우 q가 참이 되는 상황이라면, pq인 상황이라면, q는 명확하게 p에 반대되며 두 명제는 유관하다. p가 참이 아닐 경우 q 역시 참이 되지 않는다면, p→~q인 경우, qp와 반대되지 않으며 두 명제는 무관하다. 위의 두 가정법적 조건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p가 참이 아닌 경우에 q는 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조건 3을 포함하는 지식의 설명 및 가정법적 조건을 다루는 지금까지의 서술에 따르면, q 역시 유관하다. 따라서 조건 3유관한 대안설명을 당황스럽게 하는(befuddle) 사례들을 처리할 수 있다. 비록 이 설명이 대안이 유관한 경우에 앞서 제시된 가정법적 조건 기준을 채용할 수 있을지라도, 그렇게 될 경우 그것은 단순한 대안이 되며 더 이상 조건 3을 진술하지 않는다.

  

   만약 p가 참이 아니라면 Sp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이 강력하고 직관적인 힘을 갖고 있을지라도, 이 조건은 (앞선 두 조건들과 결합하여) 문제가 되는 모든 사례들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수조 속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뇌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전기화학적 자극에 의해서 그가 수조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될 경우, 그는 이 믿음이 참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가정법적 조건 (3)은 만족된다. 만약 그가 수조 속에 있지 않다면 그는 그가 수조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조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수조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은 참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믿음이 사실의 내용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믿음은 그 사실에 민감하지 않다. 수조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믿음도 생산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수조 속에 들어 있지 않다라는 거짓된 믿음을 포함해서 말이다. 만약 그들이 그러한 거짓된 믿음을 생산해냈다면 그는 그 믿음을 믿었을 것이다. 완벽한 민감성은 믿음과 사실이 함께 변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변화의 일부를 최소한 다음과 같은 가정법적인 표현을 통해 확보하고 있다. 만약 p가 거짓이라면 그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가정법적 조건문을 통해 구체화되는 이와 같은 민감성은 모든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의 p의 참 또는 거짓과 함께 변하는 믿음을 포함하지 않으며, 단지 p가 거짓일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믿음만을 포함한다.

  

   가정법적 조건 (3) ~p ~(Sp를 믿는다) 은 그의 믿음이 p의 진리값에 얼마나 민감한지에 대한 이야기의 반쪽만을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 조건은 그의 믿음 상태가 p의 거짓에 얼마나 민감한지 보여주지만 p의 참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 조건은 만약 p가 거짓이라면 그의 믿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해주지만, 만약 p가 참이라면 그의 믿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분명 조건 (1)(2)p가 참이고 그는 p가 참임을 믿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이로부터는 그가 p를 믿는 것이 p의 참됨에 민감하다는 것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추가적인 민감성은 다음과 같은 별도의 가정법적 조건문에 의해서 주어진다. 만약 p가 참이라면, 그는 p를 믿을 것이다.

  

   (4) p Sp를 믿는다.

  

   p가 참이고 Sp를 믿을 뿐만 아니라, 만약 p가 참이라면 Sp를 믿을 것이다. 이를 다음의 진술들과 비교해보라. 양자가 방출되었고 왼쪽으로 갔을 뿐만 아니라, 만약 양자가 방출되었다면 왼쪽으로 갔을 것이다. 전제와 결론의 참만으로는 가정법적 조건문의 참임에 대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4)(1)(2)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법적 조건문에 대한 적법한 설명을 전제한다. 위에서 제시한 잠정적인 제안에 따르면, S가 실제로 진심으로 p를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p가 참인 세계와 근접한세계들에서도 그가 p를 믿어야만 (4)의 참이 유지된다. S는 실제 세계에서 p와 다소 떨어져 있는 p의 근방에서도 p를 믿는다. 유사하게, (3)은 실제 세계의 p가 아닌 모든 근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중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설명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직관적인 방법으로 조건문 (3)(4)를 이해해도 된다.)

  

   수조 속에 있는 사람은 조건문 (4)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가 수조 속에 있고 오늘 자신이 수조 속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 상황에서 어떤 조건문이 참인지를 생각해보자. 그가 수조에 있다면 그는 자신이 수조에 있음을 믿는 것이 이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수조에 있지만 수조 운영자들이 그에게 자신이 수조에 있다고 믿게 하지 않는 근접 세계에서는, 그는 자신이 수조에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조에 있고 자신이 수조에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만약 그가 수조에 있다면 그는 자신이 수조에 있다고 믿을 것이라는 진술은 참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수조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가정법적 조건문 (4)는 길버트 하만에 의해 제시된 사례 역시 다룰 수 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살해당했다. 신문들은 초판에 통치자의 살해 소식을 실었으나, 이후 신문들 및 다른 매체들에서는 살해 소식을 부정했고 이는 그릇된 것이었다. 살해 소식의 부정을 접한 모든 사람들은 이를 믿었다. 그 나라의 오직 한 사람만이 그러한 살해 소식의 부정을 듣는 데에 실패했고 그는 여전히 참을 믿고 있었다. 그는 (1)부터 (3)까지의 조건을 만족시키지만 우리는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부정 보도를 들었다면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부정 보도를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참에 민감하게 조정되지 않으며, 그는 p가 참이라면 Sp를 믿을 것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조건 (4)가 만족되지 않는 것이다.

  

   지식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이 조건 (3)(4)를 관련시키는 것, 그리고 조건 (3)(4)를 처음의 두 조건들과 연관시키는 것에는 기분 좋은 대칭성이 존재한다. 지식에 대한 이 설명은 아래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

  

   (1) p는 참이다.

   (2) Sp를 믿는다.

   (3) p → ~(Sp를 믿는다)

   (4) p Sp를 믿는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대칭성을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 번째 조건과 네 번째 조건을 구성해서 이 조건들이 몇몇 대칭적으로 보이는 물음들에 대해 대칭적인 해답이 되도록 할 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은 참인 믿음의 성분들에 대한 유사한 물음들로부터 병렬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칭성은 표현하는 내용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표현 양식의 특징인 것으로 보인다. 대칭적 진술들의 균일한 변환은 그 결과를 비대칭적으로 남겨둘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대칭성이 표현 양식과 결부된다면, 예를 들어 대칭성을 나타내는 자연 법칙들의 심오한 특징이 대칭성이 될 수 있는가? 여전히 우리의 주제를 대칭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참인 믿음을 지식과 연관 짓는 것을 두드러지게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필자에 생각에 대칭적으로 공식화시키는 것은 진리에 대한 표식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이해를 나타내주는 기호이다. 만약 우리가 근저에 있는 대칭성으로부터 특정한 요소에 대한 연산을 시행하여 도출된 비대칭성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해당 방향에서 왜 비대칭성이 존재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 사람은 그가 p를 진실로 믿고 있지 않더라도 p를 알지만, 그는 진실로 p를 믿고 있을 수 있고 p를 그릇되게 믿지 않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참된 믿음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법적으로도 참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p가 참이고 그가 p를 믿는다는 것은 참이다. 만약 p가 참이 아니라면 그는 p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p가 참이라면 그는 p를 믿고자 할 것이다. p를 안다는 것은 p가 참일 때 p를 믿고자 하고, p가 거짓일 때 p를 믿지 않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사실과 가정법적 조건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한 용어를 갖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참인 p를 믿고 있으며 조건 (3)(4)가 만족되는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의 믿음은 p의 참을 추적한다(track)고 하자. 안다는 것은 참을 추적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지식이란 세계와 연결되는 특정한 방식이며, 세계와 구체적이며 실재적인 사실적 연결을 갖는다. 지식은 세계를 추적한다.

  

   조건 (4)에 대한 추가적인 정교화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p를 믿으면서도 p를 믿는 모순된 믿음들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이 쉽게 조건 (4)를 만족시킨다고 보지 않으며, 우리는 p의 참됨에 민감한 그의 믿음 상태가 p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조건 (4)를 아래와 같이 다시 서술해보자.

  

   (4) p Sp를 믿는다. 그리고 Sp를 믿고 있지 않다.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추적으로서의 지식을 설명하는 이 입장은 추가적인 정교화 및 부수적인 장치들(epicycles)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정교화 작업을 건너뛰고 싶은 독자들은 회의주의에 대해서 다루는 이 논문의 두 번째 부분으로 옮겨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