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글의 주제는 이것이다. “Reconsidering Einstein’s Philosophy of Science : Or, Putting Einstein’s philosophy into the tradition of philosophy of science”. 내가 이런 대담한(?) 주제를 생각할 수 있는 것 또한 당연히 여러 아인슈타인 연구자들의 과학사적 연구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과학철학자들이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러한 우상화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를 일종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면서 과학철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초기 생각은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오늘날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그 점에서 나는 이론물리학자 리 스몰린과 일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이해하기로 스몰린 역시 학생이던 시절 아인슈타인의 ‘수학적 판타지’에 홀리듯 물리학에 입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의 실재성을 긍정하면서 다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경험 세계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라이헨바흐는 자신을 처음부터 ‘철학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자연과학과 수학의 최신 성과들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이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철학자들이 당시에 거의 없었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그나마 그가 존경했던 사람이 에른스트 카시러였을 것이다. 물론 그는 철학적 수학자였던 다비트 힐베르트, 철학적 물리학자였던 플랑크의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학적 수학자는 결국 수학자이지 철학자가 아니며, 철학적 물리학자는 결국 물리학자이지 철학자가 아니다. 라이헨바흐는 자신이 철학자라는 측면에서 칸트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점차 칸트 철학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늘날 철학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고, 철학의 유용함이 심각한 의문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런 의문과 비판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물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자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이상하게 생각했겠는가? 덕과 정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과연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불멸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를 보고 동시대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했겠는가?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렇게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태어난 철학이 지구 위에서 소멸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그 자체로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생명력이 강한 학문이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철학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물리학을 위해 철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철학을 이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흄과 마흐의 경험주의 철학을 이용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뒤집었다. 그는 상대성의 원리를 완벽하게 일반화한다는 일종의 ‘착각’(혹은 발견법)을 가지고 중력관성장을 기술하는 ‘장’의 이론을 새로 만들었다. 수학적 단순성 추구를 통해 전자기장과 중력관성장을 통합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 또한 그의 철학적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적 관점은 가능한 여러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 관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와 대안적인 다른 관점을 취할 수 있다.
결국 과학철학은 철학이다. 그런데 왜 과학이냐고? 그것은 오늘날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을 다루고 있는 주된 학문이 과학이기 때문이다(물론 과학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과학이 없었다면 여전히 철학은 자연철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를 푸는 것 혹은 실용적인 유용성 추구를 넘어 ‘의미’를 묻고 ‘문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관점과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철학’이다. 과학철학자는 과학‘철학’을 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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