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2010년 겨울 독서모임 공부자료 03

강형구 2016. 8. 29. 07:07

 

1.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1891-1953)

  

   ① 라이헨바흐의 삶: 라이헨바흐는 1891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유태계이지만 세례를 받은 아버지와 비유태인인 어머니 사이의 네 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중등학교와 대학교 재학 시절 라이헨바흐는 사회주의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부터 11년까지 그는 스튜가르트(Stuttgart)에 있는 고등기술학교에서 도시공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베를린, 뮌헨, 괴팅겐 대학 등에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인 에른스트 카씨러, 막스 플랑크, 아르놀트 좀머펠트, 다비트 힐베르트, 막스 보른 등으로부터 물리학, 철학, 수학을 배웠다. 신칸트주의자였던 파울 나토르프(Paul Natorp)가 라이헨바흐를 자신의 학생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자, 라이헨바흐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대부분 자력으로 작성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논문을 심사해 줄 다른 교수들을 찾았고, 그의 논문은 결국 1915년에 에를랑겐 대학에서 철학자인 파울 헨셀과 수학자인 막스 뇌더에 의해 최종적으로 승인된다. 그는 러시아 전선에 있는 독일의 통신 부대에서 복무했으나 도중 큰 상처를 입어 1916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1917년에 그는 전파 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기술자로 일하게 되면서 군 복무의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베를린에서 라이헨바흐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강연들에 참석한 후 이로부터 큰 인상을 받았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이후 평생에 걸친 우정이 지속된다. 그는 아인슈타인을 변호하는 몇몇 유명한 글들을 작성했으며, 그 글들은 특히 1919년에 있었던 일식이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을 입증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1920년에 그는 스튜가르트 고등기술학교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이후 이 곳에서 교환교수가 된다.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인식은 물리학 분야에서의 그의 교수자격논문으로 승인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라이헨바흐는 엘리자베스 린게너와 결혼하여, 1922년에는 한스 갈라마가, 1924년에는 한스 유타가 출생한다. 스튜가르트에 있을 때 라이헨바흐는 모리츠 슐릭, 루돌프 카르납, 에르빈 슈뢰딩거와의 교류를 발전시킨다. 우여곡절 끝에 1926년에 라이헨바흐는 베를린 대학에서 자연철학을 가르치는 직위를 받아들이고, 그는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1933년까지 그 곳에서 머문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과학적 철학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을 조직하는데, 이 모임은 그 성격상 비엔나 모임과 비슷했다. 라이헨바흐가 조직한 모임은 베를린 모임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쿠르트 그렐링, 쿠르트 레빈, 리카르트 폰 미제스가 참여했으며, 후반부에는 칼 헴펠도 참여하게 된다. 라이헨바흐는 1930년에 비엔나 모임의 구성원들과 함께, 과학적 철학의 토론장의 역할을 하는 철학잡지인식(Erkenntnis)의 출판을 시작한다. 슐릭이 라이헨바흐의 서문에 대한 반응으로 사임한 이후, 라이헨바흐와 카르납은인식(Erkenntnis)의 편집자로서 활동했다. 그와 더불어 (몇몇 재정적인 이유로) 라이헨바흐는 과학적 주제들에 대한 대중적인 글들도 많이 작성했으며, 과학적 주제에 대한 라디오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부상하면서 베를린과 비엔나 모임이 표방하던 견해와 방법들은 유태인 철학으로 낙인찍혔고, 유태인 국가사회의주의자로 분류되고 그가 학생시절에 썼던 사회주의적 저작들로 인해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라이헨바흐는, 결국 대학에서 해고되고 라디오 방송일도 그만두게 된다. 그는 1933년에 이스탄불 대학으로 옮기는데, 당시 터키에서는 서구화의 노력을 하고 있었고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유럽을 떠나는 지성인들을 모으기 위한 새로운 대학을 수립하려던 참이었다. 라이헨바흐는 32명의 다른 독일인 교수들과 이스탄불 대학의 서구화 운동에 동참하는데, 이 때 함께 한 교수들 중에 주목할 만한 학자들로는 리카르트 폰 미제스가 있다. 그는 확률이론을 전문으로 하는 수학자로서 이후 라이헨바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들 중에는 에르빈 프로인트리히도 있었는데, 프로인트리히는 베를린 시절에 천문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경험이 있으며, 1914년의 일식 때 중력 휨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난 독일 원정대를 지휘했던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그 원정은 실패했으며, 당시 원정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전쟁 포로가 되었다!) 프로인트리히는 이후 포츠담에 있는 아인슈타인 관측소의 일원이 된다.

  

   이스탄불 대학과의 5년 간의 계약 때문에 라이헨바흐는 아인슈타인과 시드니 후크의 주선을 통해 뉴욕 대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고 1938년까지 터키에 머물렀다. 1938년에 여러 사람들, 특히 찰스 모리스의 주선으로 라이헨바흐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켈리포니아 대학으로 옮긴다. 로스엔젤레스에 옮기기 직전에 알프스를 등반하던 라이헨바흐는 심장의 고통을 느꼈고, 이로 인해 그는 미국과의 계약이 시작된 첫 번째 달에 교육활동을 할 수 없었다. (라이헨바흐는 활발한 등산가이자 스키 애호가였지만 육체적으로 인상적인 편은 못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신티아 슈스터는 1950년 경의 라이헨바흐의 겉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키가 작고, 둥글둥글하며, 땅딸막한 손과 발을 갖고 있었으며, 얼굴 또한 둥근 형태였으며, 들창코에다가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고, 치아도 고르지 못했으며, 보청기를 끼고 있었고, 가늘고 높은 성조의 음성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학생들에 대한 라이헨바흐의 영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1941년에 미국이 세계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독일 이방인 거주자로서의 라이헨바흐는 그가 194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기 전까지 가택에 연금을 당한 상태에서 일하거나 의학적 목적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만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전쟁 도중 라이헨바흐는 독일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밖으로 빼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독일의 동료들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해 있던 동료들(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을 위한 자리를 UCLA에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후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토마스 만은 로스엔젤레스에 있던 라이헨바흐의 독일인 지성인 모임의 일원이 된다. 1939년에 그는 이스탄불에서의 동료였던 마리아 몰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1939년이 되어 둘은 마리아가 이혼한 그 다음 날인 결혼한다. 라이헨바흐는 195349일의 심장 충격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이로 인해 그는 같은 해 가을에 예정되어 있었던 윌리엄 제임스 강연을 하지 못했으며, 당시에 아서 쉴릅에 의해 계획되어 있던 살아있는 철학자 총서 씨리즈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2. 루돌프 카르납(1891-1970)

  

   카르납은 서부 독일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그의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변변치 않은 집안이었다. 그는 부퍼탈에 있는 바멘 김나지움에서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10년에서 14년까지 그는 예나 대학에 다니면서 물리학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그는 또한 브루노 바우흐의 강의를 들으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꼼꼼하게 연구했으며, 그는 프레게의 수리논리학 강의를 수강한 몇 안되는 학생들 중 하나였다. 세계1차대전 동안에 3년 간 독일 군대에서 복무한 후 1917-18년에 걸쳐 카르납은 베를린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때 베를린 대학에는 그 즈음에 새로 임명되었던 아인슈타인이 있었다. 이후 카르납은 다시 예나 대학으로 가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공리적 이론을 제시하는 자신의 논문을 작성했다. 물리학과에서는 이 논문이 너무 철학적이라고 했고, 철학과에 있던 브루노 바우흐는 이 논문이 순수 물리학이라고 했다. 따라서 카르납은 바우흐의 지도 아래에 또 다른 논문을 작성하는데, 이 때 그는 좀 더 전통적인 칸트적 관점에서 공간에 대한 이론을 작성하고, 이는 잡지칸트 연구의 보충 주제 중 일부로서공간(der Raum)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다(1922).

  

   당시 러셀의 기념비적인 저작인수학원리를 구할 수 없었던 까닭에 카르납은 1921년에 러셀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고, 이에 러셀은 손수 자신의 책의 많은 부분들을 복사해서 카르납에게 보내주었다. 1924년에서 1925년까지 카르납은 현상학의 창시작인 에드문트 후썰의 세미나에 참석했고, 논리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물리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술했다.

  

   1923년에 열린 회의에서 카르납은 한스 라이헨바흐를 만나고 그와 자신의 견해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헨바흐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였던 모리츠 슐릭에게 카르납을 소개해주었고, 슐릭은 자신이 소속된 비엔나 대학에서의 자리를 카르납에게 추천해주었으며 카르납은 1926년에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카르납은 비엔나 출신의 지성인들이 만든 비공식적인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비엔나 모임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 모임은 모리츠 슐릭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며 한스 한,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오토 노이라트, 헤르베르트 파이글이 이 모임에 참석했으며, 한의 제자였던 쿠르트 괴델 또한 가끔씩 모습을 비췄다. 비트겐슈타인이 비엔나에 방문했을 때 카르납은 그를 만났다. (, 노이라트와 함께) 카르납은 1929년에 비엔나 모임 선언을 작성하고, (라이헨바흐와 함께) 철학 잡지인인식을 발간한다.

  

   1928년에 카르납은 두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출판한다.세계의 논리적 구조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형식적인 형태의 경험주의를 발전시켰는데, 이 저서에서는 모든 과학적 용어들이 현상론적인 용어들로 정의된다.구조에서의 형식적 체계는 단일하고 원초적인 이항 술어를 근거로 하는데, 이 술어는 두 개체들이 서로 닮았을 때만족된다.구조수학원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1916년에서 29년에 걸쳐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가 발전시킨 부분-전체 위상학적인 형이상학과 비교된다. 하지만 곧 카르납은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그는 1967년까지 이 책의 영어 번역을 허용하지 않았다.

  

   『철학에서의 사이비 문제들에서 그는 많은 철학적 물음들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물음들이 제시된 방식은 언어의 남용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급진적인 관점이 조작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책임 있는 인간의 담론에서 형이상학을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유명한(notorious) 입장으로 인해 카르납은 여러 해 동안 잘 알려지게 된다.

  

   1930년에 타르스키는 비엔나에서 강연을 했고, 193011월에 카르납은 바르사우에 방문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카르납은 의미론에 대한 타르스키의 모형 이론적 접근을 상당한 정도로 익히게 된다. 1931년에 카르납은 프라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다. 그 곳에서 그는 그를 가장 유명한 논리실증주의자이자 가장 유명한 비엔나 모임의 일원으로 만들어 준 책인언어의 논리적 구문론(1934)을 출판한다. 이 책에서 그는 그의 관용의 원리(Principle of Tolerance)’를 발전시키는데, 이 원리에 따르면 올바른혹은 인 논리 또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1933년에 윌러드 콰인은 프라하에서 카르납을 만나고, 둘은 카르납의 저작에 대해서 길게 논의한다. 그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평생 동안의 상호 존경이 이어지고, 이는 콰인이 끝내 카르납의 몇몇 철학적 결론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유럽을 해방하겠다는 히틀러의 제3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카르납은, 그의 사회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확신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1935년에 미국으로 간 이후 1941년에 자연스러운 시민이 된다. 1936년에 비엔나에서 모리츠 슐릭은 살해를 당한다. 1936년에서 52년까지 카르납은 시카고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재직한다. 콰인의 편한 사무실의 덕택을 받아, 카르납은 1939년에서 41년 사이에 하버드에서 보냈고, 이 곳에서 타르스키를 다시 만난다. 훗날 카르납은 시카고에서의 시절이 다소 답답했다(irritated)고 회고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철학과에서 과학과 논리학의 우선성을 강조한 것은 그와 찰스 모리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납이 시카고에서 보낸 기간은 매우 생산적인 기간이었다. 그는 의미론, 양상논리에 관한 책들을 썼고, 1956년에 쓴 그의 책은 1959년에 소울 크립키에 의해서 시작된 논리학에서의 표준적인 가능세계의미론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또한 카르납은 확률과 귀납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저술도 남겼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의 재직 이후 카르납은 1954년에 UCLA의 철학과에 가는데, 바로 전 해에 라이헨바흐는 UCLA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은 터였다. 그는 이전에도 캘리포니아 대학으로부터의 초빙 요청을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그 초빙을 받아들이게 되면 매카시 시대의 선서에 서명을 해야 했고 카르납은 원칙적으로 그러한 서명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다. UCLA에서 카르납은 과학적 지식, 분석-종합 이분법, 입증 원리 등에 대해서 저술했다. 열역학과 확률 및 귀납의 기초에 대한 그의 저작들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3. 공부 요령

  

   공부는 혼자서 하는 것이기도 하고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 혼자서만 해서도 안되고 같이 모여서만 해서도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춘 글을 쓸 때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생각이 정리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동료들에게 말하고 써놓은 글을 동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좋다. 생각하는 주체인 내가 하는 말이나 글에서 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중요한 단점들을 동료들은 지적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고 그에 대해서 변호하는 연습은 많이 해보면 해볼수록 좋다.

  

   그리고 공부는 가급적이면 규칙적으로 연구실에서 하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다. 연구실에 나오면 주변에 동료들이 있어 자극도 되고, 주변에 책들이 많은 데다가 분위기 자체가 공부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마음이 잘 해이해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는 것은 좋지 않지만, 하루의 일정 부분을 꾸준히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 놓으면 나중에 수업에 관련된 과제를 제출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한꺼번에 몰아서 무리해서 밤새고 공부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내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반짝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매일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큰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 다음으로, 읽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분배를 잘 해야 한다. 읽고 생각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런 지적 노동의 산물들은 글로 표현되어야지만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 , 학업을 전문적인 직업으로 생각하는 대학원생이라면 일상적으로 글쓰는 연습하는 것을 하나의 습관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글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꼬박꼬박 실천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대한 자신만의 명확한 규칙을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오늘은 두 장 쓴다, 오늘은 세 장 쓴다 등으로. 그렇게 규칙을 만들어 둔 다음에 어떻게든 써보는 것이다. 많이 써보고 많이 고치면서 글솜씨는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