헴펠,『자연과학의 철학』8장, ‘이론적 환원(Theoretical Reduction)’
8.1. 기계론과 생기론의 논쟁
신생기론자들은 생물체와 생물학적인 과정이 어떤 근본적인 면에서 순전히 물리-화학적인 물체나 과정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기계론자들은 생물체가 매우 복잡한 물리-화학적인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 기계론과 생기론의 논쟁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으며, 헴펠은 이 논쟁이 철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료하게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철학적 명료화를 토대로 논쟁의 해결 가능성에 대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 생물체들이 지닌 모든 특성들은 물리학과 화학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완전히 기술될 수 있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해서 표현하자면,
: 생물학 용어들이 물리학과 화학의 전체 어휘들 중에서 택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정의될 수 있다.
: 생물체에 일어나는 움직임의 모든 측면들은, 그것들이 설명될 수 있기만 하다면, 물리-화학적인 법칙들과 이론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해서 표현하자면,
: 생물학의 모든 법칙들이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과 이론적 원리들로부터 이끌어내 질 수 있다.
진술
과
가 결합하면 ‘생물학은 물리학과 화학에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표현하게 된다. 기계론자들은 이러한 환원가능성의 주장을 지지하는 셈이고, 반대로 신생기론자는 ‘생물학의 개념들과 원리들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을 지지하는 셈이다.
8.2. 용어의 환원
주장
은, 생물학적 용어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야만 할 경우 생물학적 용어의 의미가 물리학의 개념들과 화학의 개념들에 의해서 적절히 표현될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은 생물학적 개념들에 대해 물리-화학적 용어들을 사용하여 ‘기술적 정의(descriptive definition)’를 부여하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와 같은 기술적 정의는 분석적 정의가 되기 힘들며, 정의항이 피정의항과 동일한 내포를 가질 필요는 없고 다만 동일한 외연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외연을 갖는 정의를 ‘외연적 정의(extensional definition)’라고 부른다. 환원적 입장을 지지하는 기계론자들은, 물리-화학적 용어들을 사용해서 생물학적 용어들에 대한 적절한 외연적 정의를 부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외연적 정의는 개별과학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들을 표현한다. 즉 외연적 정의는 생물학적 용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려는 목적을 갖는다기보다는, 그 용어와 관련된 경험적 탐구의 결과들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외연적 정의는 경험적 탐구가 진전됨에 따라서 변화가능하기 때문에, 특정한 용어의 외연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확장되거나 축소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특정한 생물학적 용어에 대한 적절한 외연적 정의(물리-화학적 용어를 사용해서)가 가능한지의 여부는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늘 이와 관련된 경험적 증거들을 필요로 한다.
8.3. 법칙의 환원
이제 주장
을 검토해보자. 순전히 물리학적인 용어들과 화학적인 용어들로만 표현된 진술로부터 진행되는 논리적 연역이 참으로 생물학적인 법칙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법칙인 경우 생물학적 용어들을 포함하지만, 전제에 생물학적인 용어들이 없으므로 결론에 생물학적 용어들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화학적 특성들과 생물학적 특성들 사이의 연결관계를 설명하는 전제들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진술들은 어떤 물리-화학적 특성들이 있다는 사실이 어떤 생물학적 특성이 있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혹은 필요조건 혹은 충분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법칙이 물리-화학적 법칙으로부터 유도되는 아주 단순한 형식을 생각해보자. ‘
’, ‘
’는 오직 물리-화학적 용어들만으로 이루어진 표현이다. ‘
’, ‘
’는 생물학적 용어들을 하나 이상 포함하고 있는 표현이다. ‘
이 성립하는 모든 경우에
가 성립한다’는 진술은 물리-화학적 법칙이고(이 진술을
라 한다), ‘
이 성립하는 모든 경우에
이 성립한다’와 ‘
이 성립하는 모든 경우에
이 성립한다’와 같은 진술들은 결합법칙들이다. 이 때,
에 결합법칙들을 추가 전제로 도입하게 되면 이로부터 생물학적 법칙인 ‘
이 성립하는 모든 경우에
가 성립한다’가 논리적으로 연역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적절한 결합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 문제 또한 선험적 논증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고, 그 해답은 생물학적 연구와 생물리학적 연구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8.4. 기계론에 대한 재론
물리학과 화학에서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까닭에, 비록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과학적 탐구를 진행시켜나가다 보면 결국은 생물학이 물리학과 화학에로 환원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은연 중에 물리학과 화학의 용어들이 생물학적인 용어들과 분명히 구별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과학적 발전을 통해서 생물학과 물리학-화학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20세기에 이르러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물리학과 화학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졌다는 사실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그 정도의 단계까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까닭에, 당분간은 기계론이 발견에로 이끄는 격률, 즉 연구의 진행을 이끄는 지도원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계론적 입장은 지금까지의 생물리학적 연구와 생화학적 연구의 성과들을 통해서 그 신뢰성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측면은 기계론적 입장을 신생기론적 입장과 분명히 구분짓는다.
8.5. 심리학의 환원: 행동주의
심리학에서의 환원주의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심리학에 특유한 용어들과 법칙들은 생물학, 화학, 물리학의 용어들과 법칙들에로 순차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심리학적 용어를 환원시키는 ‘정의’는 심리학적 용어가 나타내는 정신적인 특성, 상태,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하고도 충분한 생물학적 또는 물리-화학적 조건들을 명확하게 진술해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적 법칙들의 환원은 심리학적 용어들 뿐만 아니라, 생물학이나 물리-화학적 용어들을 포함하는 적절한 결합법칙들을 필요로 한다. 심리학적인 상태들과 조건들을 나타내는 생물학적이거나 물리학적인 표지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심리적 상태나 사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보여주는 공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 행동들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신체의 움직임, 얼굴의 표정, 어떤 일들의 수행 등이고, 다른 하나는 혈압, 맥박의 변화, 피부의 전기 저항 등과 같은 미세한 반응들이다.
행동주의는 심리현상에 관한 논의를 행동현상에 관한 논의에로 환원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행동주의를 옹호하는 한 학자의 경우, 모든 심리적 용어들이 행동을 나타내는 용어들에 의해서 분명하게 구체화된 적용기준을 가져야만 하며, 따라서 심리학의 가설들과 이론들이 공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행동에 관한 시험명제들을 가져야만 한다고 가정한다. 행동주의에서는 심리학이 그에 대응하는 행동현상과 구별되는가 구별되지 않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행동주의에 속하는 한 견해의 경우, 심리적인 용어들이란 결국에는 행동이 지닌 다소 복잡한 면들에 관해서 말하는 도구로서만 소용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행동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기계 속의 유령’)를 찾는 일이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과는 달리 심리학의 모든 개념들이 비심리학적인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심리학적인 개념을 이에 관련된 특수한 행동들의 집합으로 완전하게 정의하기가 힘들다. 둘째로, 심리학적인 개념들은 순수하게 행동주의적인 어휘들에 의해서 정확되게 진술되기 어렵다. 심리학적인 개념들을 행동주의적으로 정의하는 진술들 속에는 일상언어의 비전문적인 표현들이 포함될 것이며, 이 표현들을 종류별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심리학적인 용어들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심리학적인 용어들이 언급하는 행동유형, 행동경향, 행동능력의 특징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행동주의적 어휘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용어들도 또한 필요로 한다.
8.6. 논평
헴펠의 이 글은 과학철학의 논의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인 ‘환원’에 대한 간략하고 광범위한 논의이다. 특히 헴펠은 서로 다른 과학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질적 환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다. 환원의 논의의 중요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만약 기초적인 과학의 분과들(물리학, 화학 등)을 통해 이보다 덜 기초적인 과학의 분과들이 환원될 수 있다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적 지식 전반의 통일성이 확보될 수 있다. 환원이 꼭 환원되는 이론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복수의 이론 사이에 맺어지는 환원의 관계가 강한 의미에서의 환원일 수도 있고 약한 의미에서의 환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헴펠은 자신의 논의에서 매우 강한 의미에서 환원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로 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선행하는 이론(
)과 후행하는 이론(
) 사이에 환원 관계가 맺어질 경우, 우리는 두 이론 사이에 일종의 연속성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으로부터
로의 이행이 일종의 ‘진보’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은 이와 같은 관점을 옹호한다. 대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완벽하게 선형적이고 연속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로는) 발전하고 진보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이론들 사이에 환원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분명하게 밝힐 경우, 이는 과학적 지식의 역사를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진보적 역사관)을 지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환원과 관련된 매우 다양한 논의들이 과학철학 내에서 이루어져왔다. 어니스트 네이글(Ernest Nagel)의 ‘동질적 환원’, ‘이질적 환원’ 사이의 구분 및 ‘연결가능성의 조건’, ‘도출가능성의 조건’ 제시는 환원 논의의 기초적인 토대를 제시해준다. 쿤(Kuhn)과 파이어아벤트(Feyerabend)의 경우에는 역사적인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과학사에서는 네이글이 말한 종류의 강한 환원 관계를 이론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후 케메니(Kemeny)-오펜하임(Oppenheim) 및 섀프너(Schaffner)와 같은 과학철학자들은 네이글의 환원 조건을 완화함으로써 쿤과 파이어아벤트의 반박을 포섭할 수 있는 새로운 환원의 모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헐(Hull)은 생물학사의 사례(멘델 유전학과 분자 유전학 사이의 관계)를 들어가며 완화된 환원 모형 조차도 실제의 과학사적 사례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과연 과학적 지식의 여러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지, 아니면 분절적으로 흩어져있고 상호 독립적인 관계를 갖는지, 과학적 지식이 역사적으로 연속적인 진보를 이루는지 아니면 단절을 나타내는지를 따지는 데 있어 과학철학에서의 환원 논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환원’이라는 주제는 과학철학통론2 수업에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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