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물리학의 철학 독서노트 02

강형구 2016. 9. 1. 06:48

 

코소(Kosso),현상과 실재(Appearance and Reality)3,특수 상대성이론31-44.

  

   물리학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든 보편적이다. 따라서, 물리학의 법칙을 통해 공간을 구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속도 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가속 운동을 하는 계에서는 물리법칙이 정식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하나의 좌표 체계와, 정지에 대한 그것의 특정한 상태를 하나의 준거틀(reference frame)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물리 법칙이 관성계에서 같다는 것이 특수 상대성의 원리이다. 상대성원리는 갈릴레오 이래로 물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이다.

  

   공간과 시간: 그렇다면 관성계와 비관성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관성계는 과연 무엇에 대해서 등속운동하고 있는가? 공간에 대해서? 그렇다면 공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일 수 있고(실체론) 사물들 사이의 관계일 수 있다(관계론). 공간이 그 자체로 실재한다는 관점이 가능하고, 시간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을 취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이와 반대로, 사물의 운동을 통해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시간에 대한 관계론적 관점을 취할 수 있다. 물리적 사물들을 준거틀로 삼지 않는 한 공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이란 사물들의 속성들의 집합이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공간에 대한 관계론적 관점이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가? 공간에 대한 두 이론에 의거할 때, 둘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관찰적 차이가 존재하는가?

  

   관계론자인 라이프니츠의 경우, 공간의 실체성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체론자인 뉴턴은, 등속도 운동은 감지할 수 없는 반면, 절대적인 가속운동은 감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되는 것이 유명한 양동이에 관한 실험이다. 양동이에 물을 넣고 돌리면, 처음에는 양동이는 돌고 물은 안 돌고 물 표면이 평평하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양동이가 돌고, 물이 돌고, 물 중심이 움푹 패이게 된다. 이후에는, 양동이는 돌지 않지만 물은 돌고, 물 표면의 패인 곳은 계속 유지가 된다. 이 때 회전하는 물과 회전하지 않는 물의 차이는 분명하다. 양동이에 대해 상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뉴턴은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회전하는 물은 절대공간에 대해서 회전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회전하는 물과 그렇지 않은 물을 구분할 수 있다. 물의 회전은 실체적인 공간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는 양동이 실험에 관한 뉴턴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마흐에 따르면, 회전하는 물의 중앙이 움푹 패이는 것은 멀리 있는 천체들의 영향 때문이다. 공간 그 자체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공간에 아무런 물체도 없다면 회전하는 물의 쏠림 현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다른 물체에 대한 상대적인 운동만이 관찰 가능한 효과를 낳는다.

  

   위와 같은 논의들을 보면, 실체론적 논변과 상대론적 논변 모두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 속성과 절대적 속성: 운동이란 사물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이 속성은 절대적인 속성인가 상대적인 속성인가? 두 눈을 갖고 있는 것을 실체론적 속성이라 한다면, 키가 더 큰 것은 관계론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연필의 위치는 연필에 대한 상대적인 속성이지만, 연필의 길이는 절대적인 속성이다. 뉴턴에 의하면, 비관성운동의 일종인 회전은 절대적이다. 이와 유사하게, 벌레가 연필 끝에 달려 있는 지우개를 먹는 지속의 시간은 절대적이다.

  

   특정한 물리적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공간-공간 다이어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고, 시간-공간 다이어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다. 공간-공간 다이어그램이 물리적 사태를 비교적 대응적으로 그리고 있는 반면, 시간-공간 다이어그램은 특정한 물리적 사태에 대한 수학적 표상(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스클라(Lawrence Sklar),물리학의 철학(Philosophy of Physics)11-25.

  

   세상에 완전무결한 지식은 없을까? 기하학적 지식은 다르지 않을까? 그리스 시대 이래로 기하학은 확실성에 대한 표준적 지식으로서 여겨졌다. 학자들은 기하학의 본을 받아, 자명한 제1원리들을 찾고 그 원리들로부터 모든 정리들을 도출하려고 애썼다.

  

   근대 이후 자연에 대한 기하학적 방법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흄의 경우, 세계에 대한 모든 유의미한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칸트는, 산술과 기하의 지식이 흄이 말한대로 공허하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기하학과 산술은 세계를 지각하는 마음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수학에 대한 선험적 입장을 추구한 학자들이 있었고(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 특히 이탈리아의 수학자인 페아노의 경우), 존 스튜어트 밀의 경우에는 수학에 대해 경험적인 입장을 취했다.

  

   선험적 입장과 경험적 입장 이외의 중도적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모든 이론적 명제들에는 선험적 요소와 경험적 요소가 둘 다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이론적 명제는 이론적 연결망 속에서 경험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공간은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일견 공간은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의 담지자로서 여겨지기도 한다. 공간이 대칭적인 데 비해서 시간은 비대칭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과거와 현재가 다르다). 제논의 역설은 운동에 관한 수학과 철학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정신적 환각에 있어서도 공간의 어떤 특성은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사이의 논쟁: 라이프니츠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실체론적 입장을 부정했다. , 그는 관계론의 입장을 취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공간이란 사물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공간적인 질서이며, 공간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은 그가 제시한 충족이유율에 어긋난다.

  

   이에 반해 뉴턴은, 관성 운동과 비관성 운동이 분명하게 구분됨을 근거로(두 운동 사이의 구분은 절대적이다 혹은 가속도는 절대적이다), 가속도가 절대적이므로 가속도의 측도인 시간 또한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19세기 말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마흐는, 뉴턴이 주된 논거로 드는 양동이 실험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을 제시한다. 회전하는 양동이의 물이 양동이 벽쪽으로 쏠리는 것은 양동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거대한 질량의 천체들이 양동이에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때문이다.

  

   간략한 논평: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필요성에 대한 역학적 설명은 없는가? , 뉴턴역학에 있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이 왜 중요한지를 이론 내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는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계론적 관점을 취할 경우, 역학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특정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가?

  

   뉴턴의 세 가지 운동 법칙과 중력법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는가? 관성계를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의할 수는 없는가? 한 물체가 힘을 받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선, 특정한 하나의 관측계가 대략적으로 관성계라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대략적인 가정일 뿐이다. 미소한 영역과 미소한 시간 동안에는 관성계의 특성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전제도 일종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어떤 계가 관성계일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들어가지만, 실제로 그 계가 관성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충분히 의식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로 관성계가 아닌지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따져볼 수 있다.

  

   즉, 특정한 좌표계가 관성계라는 가정은 일종의 과학적 가설이고, 그 가설의 타당성은 그 가설을 통해 수립된 이론이 얼마나 경험적으로 성공적인지에 의해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