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이야기

국소화되고 역사화된 실재론으로서의 구조적 실재론

강형구 2016. 8. 4. 06:47

 

   토머스 쿤(Thomans Kuhn)이 지적했던 것처럼, 과학의 역사는 과학이라는 광범위한 범주에 포함되는 여러 이론들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여러 차례의 의미론적 단절들을 겪어왔음을 보여준다. 갈릴레이의 역학과 뉴턴의 역학 사이, 뉴턴의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역학 사이, 프레넬(Fresnel)의 광학과 맥스웰의 광학 사이에는 깊은 의미론적 간극이 존재한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한 예들에서의 선행 이론과 후행 이론은, 적어도 의미론적 차원에서는 세계와 관계된 동일한 근사적 참을 공유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행 이론과 후행 이론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상호간 전적으로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대개 후행 이론은 선행 이론이 설명할 수 있었던 경험적 영역을 보존하고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후행 이론에서 등장하는 수학적 법칙들의 형태가 선행 이론의 법칙들과 구조적으로유사하기 때문이다.

  

   쿤은 과학이 진화로서의 진보를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고, 반 프라센(Van Frassen) 또한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현재의 과학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한 것을 다윈주의자의 관점에서 당연하게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다윈적 설명이 정밀 과학의 성공 및 정밀 과학에 속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연속성에 대한 의문들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갈릴레오 역학에서의 질량, 운동량, 힘 개념이 뉴턴 역학에서의 질량, 운동량, 힘 개념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두 이론에 등장하는 물체의 낙하법칙은 수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일까? 뉴턴 역학에서의 질량, 시간, 길이의 개념이 상대론적 역학에서의 질량, 시간, 길이의 개념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상대론적 좌표변환은 극한적인 경우에 갈릴레이 좌표변환과 근사적으로 일치하는 것일까? 이러한 유사성근사적 일치를 단순히 진화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까?

  

   위와 관련된 문제 의식에 입각해, 존 워럴(John Worrall)은 이른바 구조적 실재론을 제시한다. 우선 워럴은 구조적 실재론의 영역을 성숙 과학으로 국소화시킨다. 이 때 성숙 과학을 판단하는 기준은 해당 과학이 자연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예측 능력을 갖는지의 여부다. 특정 과학을 구성할 때 참조된,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들만을 사후적으로 설명할 뿐 이후 새롭고 참신한 예측을 하지 못하는 과학은 성숙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성숙 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선행 이론과 후행 이론이 있을 경우, 두 이론 사이에 의미론적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두 이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수학적 법칙들 사이에 강한 구조적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하자. 이 때 우리는 적어도 두 이론 모두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과 관련되는 세계의 특정한 구조를 제대로 포착했으며, 이러한 구조의 차원에서 후행 이론은 선행 이론보다 더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우리는 왜 후행 이론의 경험적 영역이 선행 이론에 비해 더 확장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후행 이론의 주요 법칙들이 극한적인 조건에서 선행 이론의 주요 법칙들과 근사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후행 이론의 법칙들이 기술하는 현상에 대한 수학적 구조가 선행 이론의 그것보다 세계의 실제 구조와 더 정확하게 일치함을 의미한다. 정밀 과학에서의 경험적 예측능력이 해당 이론을 구성하는 수학적 법칙들에 강하게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세계의 구조에 대한 더 정확한 수학적 법칙들을 보유하고 있는 과학 이론이 상대적으로 그보다 덜한 과학 이론보다 더 확장된 경험적 영역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조적 실재론은 과학 이론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의미론적 차원에서의 급격한 변동에도 불구하고 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 뿐만 아니라, 현재의 과학 이론이 전에 비해 경험적으로 더 적합한 이유 또한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구조적 실재론이 이전까지의 실재론에 비해 그 영역과 접근 방식이 상당히 국소화되고 역사화되었다는 것이다. 워럴은 주요 법칙들을 정확하게 수식화하는 것이 가능하면서도 일반적인 예측 능력을 갖는 정밀 과학의 사례들로 실재론의 논의를 한정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선행 이론이 갖는 수학적 법칙들이 후행 이론이 갖는 법칙들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지를 역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보존되고 유지되는 특정한 수학적 구조가 실제 세계의 구조를 반영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워럴의 국소화되고 역사화된 실재론적 전략은, 적어도 근대 이후 이른바 정밀 과학이라고 불리는 수학적 물리학이 보여주는 세계와의 적합성 또는 일치를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렇듯 실재론의 논의를 수학적 물리학에 한정할 경우, 부분적으로만 수학화가 가능한 화학, 생물학, 지질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과 같은 기타 개별 과학들에 대해서는 실재론적 입장을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난점이 생긴다.

  

   논의의 영역을 수학적 물리학에 한정시킨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개별 사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제시되는 세계의 구조, 세계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만약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낙하 법칙에 관한 세계의 구조’, ‘중력 법칙에 관한 세계의 구조’, ‘빛 전파의 법칙에 관한 세계의 구조등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구조들의 실재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부분적인 수학적 구조들이 상호 간에 어떠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또한 비교적 큰 단위의 이론들(예를 들어 역학) 사이의 전체적인 구조적 관계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구조적 실재론이 말하는 실재의 모습은 혼란스럽게 흐트러진 조각그림과 같은 상태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이 강력한 설명력을 가진 실재론으로 남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다른 개별 사례들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고, 그러한 분석을 통해 규명된 부분적 구조들의 상을 종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수행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구조적 실재론이 말하는 구조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구조에 대한 명료화 작업이 꼭 필요한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위와 같은 작업을 통해 구조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특징이 명확히 밝혀져야지만 구조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특정한 이론에 국한되는 부분적인 수학적 구조들만 존재하고 정밀 과학 전체를 포괄하는 수학적 기본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 경우, 이러한 구조들이 실제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들이 단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 예측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도구일 뿐인지를 의심할 수 있다. 반면 정밀 과학 전체를 포괄하는 수학적 기본 구조가 존재하고 그러한 기본 구조가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도 상당 부분 지속되고 보존된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는 우리의 정밀 과학이 갖고 있는 수학적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반영한다는 강한 증거가 될 것이다.

  

   진화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구성적 경험주의자의 입장에서는 구조적 실재론이 말하는 구조 또한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일 수 있다는 반론을 펼 수 있다. 우리의 과학 이론, 특히 정밀 과학에 속하는 이론들이 점차적으로 특정한 수학적 구조에 근접해가고 있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수학적 구조 또한 인간이라는 생물체가 세계 속에서 잘 살아남도록 해주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론에 직면한다고 하더라도, 구조적 실재론에서 말하는 구조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구성적 경험주의자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할 경우, 구조적 실재론자의 입장은 크게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향후 구조적 실재론의 과제는 정밀 과학의 여러 부분적 구조들을 종합하고, 그러한 종합된 수학적 구조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명히 밝히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