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글 쓰는 사람 02

강형구 2016. 1. 19. 09:44

 

   철학 역시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전문화된 학문 분과이며, 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현대의 철학자들, 특히 20세기 이후 영미 분석철학자들이 내놓는 작업을 보면 아주 전문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이는 내가 학창시절 철학에서 바라던 바와는 사뭇 달랐다. 과학도였던 나는 수학과 과학을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철학을 찾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20세기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를 들 수 있다. 표준적인 양자역학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인물들과 풍부한 대화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이 책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 이래의 전통을 따라 등장인물들 사이에서의 대화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읽어나갈 끈기가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책을 읽기 전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그것이 물리학 전공자 수준의 정확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나는 호기심 많은 보통 사람으로서, 수학과 과학을 좀 더 잘 알고자 하는 욕심이 강했기에 철학이라는 학문을 택했다. 이때 잘 알고자 하는 것은, 좀 더 잘 이해하는 것이었지 문제를 더 잘 푸는 것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학부 성적이 시원찮았던 내가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던 것은 학부에서의 공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학철학에서 논리경험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흐의 저작들 중, 그가 29살에 쓴 교수자격심사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그에 관해 학부 졸업논문을 썼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라이헨바흐의 이후 저작들에 대해 더 공부하고 이해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원에서는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다양한 과목들을 수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졌던 논리경험주의의 철학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목이 개설되지 않아,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논리경험주의, 특히 한스 라이헨바흐의 철학에 대해서 연구해야 했다. 1920년에 [상대성이론과 선험적 지식]이라는 교수자격심사 논문을 쓴 라이헨바흐는 이후 계속 상대성이론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 1924년에 [상대성이론의 공리화]라는 책이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나에게 놀라웠던 것은, 그의 1924년 저작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를 과학철학 문헌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부 졸업논문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책 [상대성이론의 공리화]를 주제로 삼아 석사논문을 작성했다.

 

   나의 학부논문이 1920년을 다루었다면, 석사논문은 1924년을 다룬 셈이다. 라이헨바흐가 1953년에 사망했고(라이헨바흐와 우정을 유지했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사망했다) 논리경험주의의 철학이 1960년 정도까지 융성하였으니, 내가 연구해야 할 시기가 30년은 더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박사과정에 입학한 직후 나는 여러 난관들에 부딪쳤다. 우선, 박사과정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재능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은 나보다 독창적이고 뛰어난 것 같았고, 교수님들로부터도 나는 철학적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특정한 전문성을 전제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어렵긴 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글, 일반적인 수준의 이해를 위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공부를 접고 6개월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직장에 취직했다. 직장 생활을 하니 공부에 대한 열정이 더 절실해졌다. 하루 1시간 글을 읽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쉬는 시간이나 주말에는 자연스레 책에 손이 갔다. 본격적으로 학계에 진출하기도,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공부라는 나의 오래된 습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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