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일종의 투쟁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세상은 늘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 개인은 세상 혹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공동체의 제도적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개인은 공동체가 마련한 제도 속에서 늘 경쟁과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다수의 학생은 우리 사회의 주어진 입시 제도 내에서 서로 경쟁과 투쟁을 벌인다. 대학에 입학하면 졸업 후 제대로 된 직장을 갖기 위한 경쟁을 시작한다. 취업하면? 결혼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조직에서 더 높은 지위로 나아가기 위해 경쟁하고 투쟁한다.
나 역시 이런 투쟁을 피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우리 사회의 입시 제도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했고,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철학 공부와 취업 사이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내 나름대로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다. 남자인 나로서는 군대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아주 중요한 숙제였다. 첫 직장인 한국장학재단에 취직한 이후에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일이 중요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사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도전 과제였고, 이 과제가 이토록 어렵다는 사실은 내 안에서 일종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의식주가 사람 사는 기본이라며? 그런데 내 집 한 채를 마련하는 일이 이토록 불가능한 과업인 상황이 말이 되는가? 대체 어떤 사람들이 대도시의 집값을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부풀려 놓았는가?
그래도 나는 우리 사회가 마련한 규칙들을 착실하게 지키며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소심한 원칙주의자인 나로서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사는 일이 너무나 힘겹게 여겨졌다. 사실 어디에 살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첫 직장이었던 한국장학재단을 따라왔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대구로 이전하는 한국장학재단을 따라 대구로 내려왔고, 아내가 계속 직장을 다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한국장학재단에서 국립대구과학관으로 이직했다. 집을 대구 시내에 마련하지는 않았다. 국립대구과학관이 소재한 대구 남서쪽 신도시인 테크노폴리스에 집을 마련했다. 다행히 이곳의 집값은 대구 시내에 비해 크게 저렴한 편이어서, 부모님께 큰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
능력이 아니라 젊음과 패기 아니 오기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래서 힘겹게 한국 사회의 중산층이라 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나는 국립대학교의 교수이고 아내는 국립과학관의 연구원이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중산층이라고 할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나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더 높이 올라가기를 꿈꾸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는 나와 아내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시간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안전한 집,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깔끔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한다.
특히 부모의 삶은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므로, 아이들의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나는 우리 사회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원칙을 지키며,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고, 그저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되 그 도가 지나치지 않고, 먹는 음식과 입는 옷과 사는 집이 소박하고, 돈과 지위를 쫓아가는 삶이 아니라 취미와 여유를 즐기는 삶을 보여주고 싶다. 결론적으로, 이제 내 삶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내 아이들이 있다. 내가 삶을 계속 열심히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중요한 의미에서 내가 아니라 내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적 전통 속에서 이를 이어나감 (0) | 2025.01.08 |
---|---|
한 명의 선비로서 산다는 것 (7) | 2024.12.29 |
2024년을 돌아보고, 2025년을 준비함 (8) | 2024.12.25 |
내 몫의 운명을 따라서 (6) | 2024.12.15 |
다시 교수의 일상으로 (2) | 202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