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한 명의 선비로서 산다는 것

강형구 2024. 12. 29. 06:24

   아무리 서양의 문물 속에서 산다고 해도 동양이자 한국의 사람이 서양 사람이 되겠느냐. 내 속에는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내가 태어나서 그 속에서 자란 나의 나라 대한민국,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규칙적 질서 속에서 어떤 종류의 말 역할을 하고 있느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떤 종류의 삶을 꿈꾸고 추구했으며, 지금 나는 어떤 위치에 와 있느냐.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린 학생이던 시절부터 지향했던 삶은 ‘지조 있는 선비의 삶’이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학문을 깊이 탐구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싶었지만, 과거 시험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하여 장관이 되거나 장군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저 나는 한 명의 촌부로서 밭 갈고 김을 매며 글 읽기를 즐겨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만족하고자 했다. 다만 나라에 위기가 생기면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떨쳐 일어나 나라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나는 세상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되 지조 있게 사는 선비, 글만 읽는 유약한 선비가 아닌 필요하면 총과 칼을 잡고 떨쳐 일어나 적과 싸울 줄 아는 선비가 되고 싶었다.

 

   내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국립목포대학교에서 과학기술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으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던 삶을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꿈꾸는 삶은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선비의 삶이지, 서구적인 형태의 철학적 삶은 아니다. 나의 문화적 전통에 속하는 선비적인 삶을 서양의 철학적 전통과 접목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자연의 이치를 성찰하고 탐구하려는 유학과 불교의 전통적 지향을 서양의 철학적 탐구와 연결하고자 하며, 나 자신의 역사적 소명이 그런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세계화된 오늘날은 우리 모두 동서양 구분 없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회인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서구적인 생활 양식 역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게 아니라 하나의 우연한 상황일 뿐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무엇이다. 대체될 수 없는 것은 역사다. 역사는 가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내가 내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자랐다는 것, 내 부모님 역시 내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에게서 태어나 대한민국 현대사의 일원으로서 살았다는 것 등은 가상이나 상상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일종의 역사적 현실이다.

 

   나의 친구 중 어떤 이는 장사를 하고, 어떤 이는 법률 전문가가 되어 법조인으로 일하며, 어떤 이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로서 일하고, 어떤 이는 과학기술을 계속 연구하여 과학기술자로서 일한다. 철학 교수로서의 삶이라. 한편으로는 나에게 참 어울리는 삶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삶이다. 실제로 나는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와 더불어 철학 연구를 병행하는 삶을 살려 하였으나, 인생은 나에게 교수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앞에 온 그 기회를 잡았다. 아직 대학교수가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나는 매일 내 운명의 의미에 대해 조용히 곱씹어보는 시간을 보내곤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속한 문화적 전통 아래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은 지조 있는 선비의 삶이다.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높은 지위를 탐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소소하게 내가 옳다고 믿는 학문을 추구하며 성실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전통이 나라는 한 개인에게 제공해 준 여러 선택지 중 내가 나의 성향에 맞게 취사선택한 것이다.